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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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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06>

홍도

목포의 사촌누이 집에 들렀던 게 화근이었다. 아니, 화근이라기보다 별로 두려워하지도 않았으니 반쯤은 이미 화를 자초한 셈이었다. 마음 약한 매형이 혹시 자기 가족에게 화가 미칠까 걱정해서 일찌감치 경찰에 신고해버린 것이다. 우리가 대흑산(大黑山)에 묵지 않고 바로 홍도(紅島)로 직행한 때였다.

산더미 같은 물결들을 헤치며 큰 바다를 질러갔다. 홍도의 흰 동백숲이 첫 목표였기 때문이다.

흰 동백숲은 꽃들이 이제 막 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노을녘에 검은 돌무더기들과 축축한 검은 흙 위에 떨어져 누운 흰 동백들은 마치 불행한 한 여인의 갖가지 표정의 얼굴들 같고, 또 흰 미륵 부처들 같기도 했다. 그리고 기일게, 길게 울리는 뱃고동에 몸을 뒤척이는 한 청년의 갖가지 정감의 상징들 같았다. 노을녘 그 숲속에서 촬영이 시작되자마자 시(詩) 한 토막이 문득 떠올랐다.

꽃지는 사월
동백숲 외딴 돌무더기에
너를 묻고 떠난다

길었던 기다림
짧았던 만남

<사진>

그날 밤 원두는 이 토막 시에 곡을 붙여 기타를 동당거리기 시작했고, 눈먼 여주인공 역을 하던 '하나'라는 이름의 젊은 여배우는 너무 슬프다고 조용히 눈물바람을 했다.

영화 '청녀'는 앙드레 지드의 소설 '전원교향악'(田園交響樂)을 번안·각색한 것이다. 어렸을 적 데려다 기른 눈먼 소녀를 부자가 함께 사랑한다는 삼각 드라마였다. 홍도 뒤편 절벽 위에서 사그라드는 노을 무렵에 먼 곳으로부터 오고 있는 그 집 아들을 기다리는 눈먼 소녀의 슬픔을 그린 그 이튿날 밤, 달도 별도 없는 그 새카만 밤, 술을 사러 잠깐 밖에 나갔다 돌아오던 나는 짐승을 잡기 위해 땅을 파놓고 그 위에 살짝 나뭇가지와 가마니를 덮어놓은 깊은 구덩이에 푹 빠져 버렸다.

캄캄했다. 그리고 암담했다.

도무지 혼자서는 기어나올 수 없어 원두를 부르기 시작했다. 꼭 짐승 같았다. 구덩이에 빠지고 덫에 걸린 산짐승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었다. 울부짖음! 원두를 부르는 나의 외침은 거의 짐승의 울부짖음이었다.

나를 아랫목에 눕히고 무릎과 팔꿈치 등에 머큐로크롬을 발라 주던 원두가 큰 눈을 껌벅이며 왈,
"너 여기 안 왔으면 죽었다."

촬영이 끝나고 홍도를 떠날 때다.

대흑산 예리에서 그 이튿날 목포로 떠나는 배에 대려고 밤에 홍도를 떠나는데 홰들을 잡고 미끄러운 돌짝지에서 작은 배로 옮겨타려고 펄쩍 뛰다가 갑자기 미끄러지며 앞으로 확 고꾸라져 노를 거는 쇠붙이 위에 가슴을 몹시 찧었다. 끙끙 앓으면서 뱃전에 누워 있는 나에게 횃불이 번뜩번뜩 스쳐 지나는 두 눈을 껌뻑이며 원두가 또 가라사대,
"너 여기 안 왔으면 죽었다."

그래.
아마도 헌병대나 보안사에 처음 걸려들었으면 고문에 맞아 죽었을 것이 틀림 없었다.
고비를 넘겼으니 이젠 잡혀가도 된다는 것일까.

그날 밤 대흑산 예리 관광여관의 큰 방에 모여앉아 노래들을 부르고 노는데 엉망으로 취한 내가 배우 남궁 원(南宮遠) 씨에게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고 한다. 얼마나 심하게 시비가 붙었는가 하니 내가 남씨더러,
"야 이 똥배우! 그렇게 연기할 바에는 차라리 배우 관둬! 배우라는 게 신비스러운 데가 있어야지, 넌 뭐야, 임마! 그게 얼굴이야? 떡판이지!"

남궁 원 씨가 독한 소주를 벌컥벌컥 마시기 시작하고 나는 귀퉁이방에 가서 고꾸라졌는데 술에 몹시 취한 남궁 원씨가 악을 악을 쓰며 나를 죽이겠다고 난리를 쳐 문정숙(文貞淑) 씨와 이감독(監督)이 말려 겨우 안정시켰다고 한다.

이튿날 아침 눈을 뜨니 나를 내려다보던 원두가 또 그 큰 두 눈을 껌벅이며 왈,
"너 정말 여기 안 왔으면 죽었다."

이 말이 끝나자마자 방문이 열리고 웬 사내가 머리를 들이밀었다.
"실례합니다. 김지하 시인이지요?"

그는 흑산경찰서의 민경사였다.

마침내 배가 떠났다.

나는 배 맨 위층에 있는 선장실 쇠창살에 수갑을 나눠 한 손목에 걸고 민경사와 함께 목포까지 그 먼 바다를 내내 술을 마시면서 왔다. 그 선장실에서 처음에는 조금씩, 그리고 차츰 잦아지면서 심한 기침이, 오래전 가라앉았던 그 천식이 시작되었다.

혼자 웃었다. 속으로 지껄였다.
"제기랄! 내가 무슨 체 게바라야, 뭐야? 웃기네!"

그렇게 나는 내 운명을 웃으면서 왔다.

비극도 희극도 아니었다.

멀리 검은 유달산의 바위 끝들이 보이기 시작할 때 그것이야말로 나의 운명이자 숙명이요, 또 그렇게 말하는 게 용납된다면 나의 천명이기도 했다.

훗날 들으니 바다 위에서 아래쪽 객실에서는 원두가 술에 취해 남궁 원 씨에게 마구 퍼부어 대며 경찰에 밀고했다고 욕을 욕을….

아! 그러는 게 아닌데…. 전혀 허물 없는 사람이 욕을 봤구나…. 그러는 게 아니었는데….

<'월간중앙'과 동시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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