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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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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14>

석방

인혁당과 이현배(李鉉培)·유인태 아우 등을 제외한 전원이 석방되었다. 영등포감옥 문앞에는 거의 모든 내외신이 집결했다.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여기저기서 플래시가 터지고 가까운 문우들에 의해 나는 갑자기 공중으로 높이 헹가래쳐졌다. 그리고는 끝없는 끝없는 질문의 홍수,
"소감은?"
"느낌은?"
"얼굴이 수척하다. 갑자기 밖으로 나온 느낌은?"
"이제부터는?"
"현정부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유신철폐운동을 계속할 것인가."
"심한 고문을 당했는가."
"이번에 태어난 아들에 대해서는?"
"솔직한 지금 심경은?"

<사진>

끊임없이 쏟아지는 질문들에 대해 내가 한 대답은 두 세 가지밖에 생각 안 난다.
"내가 미쳤든지 세월이 미쳤든지 둘 다 미쳤든지 하여간 알 수 없다. 사형에 무기징역 등을 선고하고 10개월만에 석방하는 것은 미쳤다고밖에 볼 수 없다. 누구겠는가. 미친쪽은…."
"이제부터 서서히 어둠속에 갇혔던 잔혹한 사실들이 모두 터져나올 것이다. 그 터져나오는 순서에 따라 현정권도 서서히 붕괴해가기 시작할 것이다. 서서히!"

김상현(金相賢) 씨가 보였다. 김상현 씨 및 내 가족과 함께 천주교 서울교구청으로 김추기경님께 인사갔다.

방에 들어서자 추기경께서 한 잔의 위스키를 주셨다. 그것을 마시니 머리 속과 온몸이 후끈하게 달아오르며 한결 개운해졌다.

나는 조금 들떠 있었다. 가라앉히지 않으면 실수할 것 같았다. 인사를 끝내고 재빨리 정릉(貞陵)에 있는 처가로 돌아갔다. 아내와 아기와 장모님과 아기의 고할매가 모두 잠들었다. 추운 겨울날 영등포감옥 앞에서 진종일 떨며 견뎠으니 지칠 만도 했다. 나는 전등 아래 오도카니 앉아 새벽을 기다리고 있었다.

새벽 네 시. 통금 해제 사이렌이 불자 나는 일어나 아직도 캄캄한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아득한 곳에서 먼동이 터오는, 그러나 아직은 밤이 가시지 않은 거리에서 보고 싶은 사람이 있었으니 윤배 형님. 돈암동까지 걸어나가 홍대앞 극동방송쪽으로 가는 택시를 잡아탔다. 차에 앉아 스쳐가는 밤거리를 내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오늘 나는 옥문(獄門)을 나온 작은, 피묻은 손가락이다. 그 길고 긴, 넋과 육신이 함께 해방되는 그날에의 기다림이 꾀많은 마귀의 간지(奸智)에 의해 장난질당하고, 그 장난 덕으로 옥문 밖에 내동댕이쳐진 잘린 손가락이다. 껍질이다. 넋 잃은 육신일 뿐이다. 내 넋, 그토록 일치된 내 넋은 어디에 있나?

밤거리에는 바람만 분다. 내 넋은 어디에 두고 와 이 빈 밤거리를 내 텅텅 빈 육신만이 바람에 불려다니나? 아아 아직도 해방되지 않은 나의 벗들, 장(腸)이 부서지고 빠져나간 채 어둠 속에 두 눈을 부릅뜨고 웅크리고 있는 그 가래 끓는 목소리들, 나의 정다운 '도둑놈들'.

헤어질 때 울던 그 '베트남'에서의 양민학살범. 나는 바로 그들이었다. 그들이 바로 나였다. 그래! 그렇다.

내 넋은 그 감옥에 두고 왔다. 빈 껍질만이 왔다. 내 넋이 거기서 울고 있다. 통곡하며, 해방시켜 달라고, 다시금 다시금 일치되자고 통일되자고 미친 듯이 내 육신을 부르고 있다. 서로 만나자고 외치고 있다. 내 넋이 나를 오라고 손짓하고 있다. 바람찬 잿빛 거리에 텅 빈 내 육신만 홀로 바람에 이리저리 굴러다닌다.

가자! 내 넋을 찾으러 가자! 가서 옥문을 열고 내 넋을 해방시키자! 해방시켜 울며 부둥켜 안자! 일치하자! 일치하자! 통일하자! 통일하자!

내 넋을 만날 때까지 내 육신은 싸우리라. 그것이 매질 아래 산산조각나 흩어져 저 바람결에 사라져 없어져 버릴 때까지(동아일보의 '고행… 1974'의 마지막 부분이다).

<'월간중앙'과 동시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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