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방의 뒤편 변기 바깥쪽 창문으로 다른 감방의 벗들과 소통하는 것이 통방이다. 감방에서의 유일한 낙은 면회, 즉 접견(接見)과 통방일 터이다. 아직 선고가 나오지 않았을 때 왼쪽으로 한 방 건너 지금은 목사님이 된 서울대 법대의 김경남 아우, 그 곁에 기독교사회운동의 맹장 황인성 아우, 오른쪽으로 한 방 건너 한때 지하철노조위원장을 하다 지금은 녹색교통을 시작한 정윤광 아우, 그 곁에 지금 국회의원인 장영달 아우, 아래층 왼쪽으로 두 방 건너 지금 '조선일보' 주필인 유근일 선배, 오른쪽으로 두 방 건너 인혁당 하재완 씨 등이 살고 있어 좋은 통방 이웃을 이루었으니 매일같이 통방, 통방, 통방이었다.
혹간 가다 구치소 간부에게라도 걸리면 다시는 안 하겠다고 약속한 뒤 돌아서자마자 그 일을 가지고 또 통방! 그렇다. 통방으로 해가 떠서 통방으로 해가 지는 통방 징역이었다. 통방! 그것은 유신 시절의 메스컴이었던 '유비통신'(流蜚通信·유언비어를 그렇게 불렀다)처럼 우리의 '서대문통신'이었다. 각자의 집안 소식, 친구 소식에서부터 정세분석과 철학강좌까지 별의별 섹션이 다 갖추어진 거의 완벽한 매스컴이었으니 누가 이것을 녹음이라도 했다가 풀어 CD로 내거나 출판했다면 틀림없는 떼돈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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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통방도 사형을 선고받자마자 그날로 잡범들과 합방시켜버려 자취를 감췄다. 1.75평의 좁은 공간, 더운 초여름 날씨에 8명씩 들어앉아 있자니 그보다 더한 지옥은 없는 성 싶었다.
내 생전 '생태학적 필요공간'이라는 말을 처음 실감했을 때다. 사람과 사람 사이가 전선줄에 늘어앉은 참새와 참새 사이보다 더 좁아서 맨살이라도 살짝 닿는 날이면 "개새끼! 소새끼!" 하며 말싸움이 벌어지기 일쑤고, 서로 눈길이 마주치기라도 하는 날이면 "씹할 놈아! 뼉할 놈아!" 하고 대판 주먹질이 오가기 십상이었다.
나는 어엿한 감방장으로서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의 책임을 져야 했다. 참으로 궁리에 궁리를 거듭하다 하도 안 풀려 천하태평(天下泰平)의 도를 공모했다. 세 사람 입에서 한 마디가 동시에 터져나왔다.
'강아지!'
그렇다. 강아지만이 태평의 도였다. 강아지란 담배의 은어(隱語)다. 나는 그날로 청소 담당 기결수와 담배 거래를 시작했다. 내 영치금에서 그 값을 빼내가는 순 왕도둑 장사, 엄청나게 비싼 장사였다. 그러나 강아지가 한 모금씩 돌고 나면 8명의 나팔들이 일시에 빙긋이 미소지으며 눈을 게슴츠레하니 뜨고 일대 평화와 정적의 낙원으로 들어갔던 것이니, 범법임을 번히 알면서도 강아지 거래를 끊을 수 없었다.
그러다 한번은 간부에게 걸려 보안과까지 가서 시말서를 썼다. 그러나 돌아오자마자 계속되었으니 아아! 평화란 얼마나 값지고 고귀한 것인가! 체호프의 '담배의 해독에 관하여'를 압도하는 '담배의 미덕에 관하여'를 언젠가는 집필하리라는 꿈마저 꿀 정도였다.
그러는 중에도 외부에 메시지를 내보낸 것이 도움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동아일보' 기자들이 이부영(李富榮) 형을 중심으로 자유실천선언을 하여 사내에 상주하는 정보부원을 내쫓는 데 힘을 모으고, 신문 편집에 관한 간섭을 배제하는 등 자유투위 운동을 벌이기 시작하여 다른 신문에까지 번질 기세요, 야당이 국회에서 한판 떠들썩하게 벌이는 등 정국의 조짐이 심상치 않았고, 그 무엇보다 가톨릭이 지속적으로 구국(救國)미사를 올리며 정의구현전국사제단(正義具現全國司祭團)이라는 암흑 속의 횃불이 타오르는 등 그야말로 야단법석(野壇法席), 기독교와 일반 지식인들 그리고 대학생들이 대거 궐기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충격적인 것은 일본과 미국 여론의 악화였으니, 미국 의회는 사형 등 중형과 반민주 행태에 항의하여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 중단 논의에까지 반(反)박정희 바람이 불어대고 일본에서는 좌익과 중도계(中道系)는 물론 우익단체까지 반박(反朴) 운동을 서슴지 않았다.
유럽에서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같은 정세가 반복되었고, 유학생들의 반박 활동은 유명한 것이었다.
거기에다 8·15 기념식 때는 재일교포 문세광(文世光)이 박정희를 저격하다 실패하고 부인 육영수(陸英修) 여사만 죽었다. 온 나라가 장례를 치르느라 시끄러웠다.
박정희는 그야말로 사면초가(四面楚歌)였다. 이럴 때를 일러 수즉부족(守則不足), 공즉유여(攻則有餘) 하는 것이니 우리가 되레 공세(攻勢)를 틀어쥐게 된 것이다.
나는 느긋한 마음으로 책을 읽다가도 문득문득 지주교님의 영상이 떠올라 괴로워하기도 했다. 한번은 복도에서 뵈었는데 '푸른옷'을 입고, 양 손 열 손가락에 검은 칠을 한 채 지장(脂章), 즉 '피아노'를 치고 계셨다. 눈이 서로 마주쳤는데 주교님은 싱긋 웃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푸른옷을 입은 사제의 모습을 보았다. 뒷날 함세웅(咸世雄) 신부님과 문정현(文正鉉) 신부님을 푸른옷의 모습으로 뵌 적이 있지만 아마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사제의 모습은 죄인(罪人)의 수의(囚衣)를 입은 성직자의 고통받는 그것일 듯 짜릿한 감동을 느낀 적이 있다.
우리는 한 번 단식(斷食) 파동(波動)을 겪은 적이 있으나 나는 만류하였으니 이기는 싸움을 하는 사람답게 고요할 것, 겸손할 것 그리고 모두 항소(抗訴)를 포기하고 징역 살러 갈 것. 불과 몇 개월 안에 상황은 끝날 것이라는 연락을 몇 군데 보내며 곁으로 전하라고 일렀다. 불과 1주일만에 인혁당(人革黨) 외에는 사형은 무기로, 무기는 20년 등으로 감형되었고 우리는 곧 집단적인 항소 포기를 하였으며 이어 형이 확정되자 이감하기 시작했다.
나는 무기징역에 영등포감옥으로 이감(移監)이 확정되어 한 날 다른 감옥으로 이감하는 김동길(金東吉) 교수님과 같은 호송차를 탔다.
<'월간중앙'과 동시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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