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2월자로 된 '동아일보' 지상의 글 '고행(苦行) 1974년', 그러니까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고 사형선고, 무기감형되었다 10여개월만에 석방된 직후 기고한 이 글은 제 6국에서의 체험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정보부 6국의 저 기이한 빛깔의 방들, 악몽에서 막 깨어나 눈부신 흰 벽을 바라봤을 때의 그 기이한 느낌을 언제나 느끼고 있도록 만드는 저 음산하고 무뚝뚝한 빛깔의 방들. 그 어떤 감미로운 추억도, 빛 밝은 희망도 불가능하게 만드는 그 무서운 빛깔의 방들. 아득한 옛날 잔혹한 고문에 의해 입을 벌리고 죽은 메마른 시체가 그대로 벽에 걸린 채 수백 년을 부패해가고 있는 듯한 환각을 일으켜 주는 그 소름끼치는 빛깔의 방들. 낮인지 밤인지를 분간할 수 없는, 언제나 흐린 전등이 켜져 있는, 똑같은 크기로 된, 아무 장식도 없는 그 네모난 방들. 그 방들 속에 갇힌 채 우리는 열흘, 보름 그리고 한 달 동안을 내내 매순간 순간마다 끝없이 몸부림치며 생사를 결단하고 있었다.
못 돌아가리
한번 딛어 여기 잠들면
육신 깊이 내린 잠
저 잠의 하얀 방 저 밑모를 어지러움
못 돌아가리
일어섰다도
벽 위의 붉은 피 옛 비명들처럼
소스라쳐 소스라쳐 일어섰다도 한번
잠들고 나면 끝끝내
아아 거친 길
나그네로 두 번 다시는
굽 높은 발자욱 소리 밤새워
천장 위를 거니는 곳
보이지 않는 얼굴들 손들 몸짓들
소리쳐 웃어대는 저 방
저 하얀 방 저 밑모를 어지러움
뽑혀 나가는 손톱의 아픔으로 눈을 흡뜨고
찢어지는 살덩이로나 외쳐 행여는
여윈 넋 홀로 살아
길 위에 설까
덧없이
덧없이 스러져 간 벗들
잠들어 수치에 덮여 잠들어서 덧없이
매질 아래 발길 아래 비웃음 아래 덧없이
스러져 간 벗들
한때는 미소짓던
한때는 울부짖던
좋았던 벗들
아아 못 돌아가리 못 돌아가리
저 방에 잠이 들면
시퍼렇게 시퍼렇게
미쳐 몸부림치지 않으면 다시는
바람부는 거친 길
내 형제와
나그네로 두 번 다시는.
'불귀'(不歸)라는 시다. 그 방들 속에서의 매순간 순간들은 한마디로 죽음이었다. 죽음과의 대면! 죽음과의 싸움! 그것을 이겨 끝끝내 투사의 내적 자유로 돌아가느냐, 아니면 굴복하여 수치에 덮여 덧없이 스러져 가느냐? 1974년은 한마디로 죽음이었고 우리들 사건 전체의 이름은 이 죽음과의 싸움이었다.
죽음을 스스로 선택함으로써 비로소 죽음을 이겨내는 촛불 신비의 고행, 바로 그것이 우리의 일이었다. 이 죽음의 방, 이 죽음과의 대면의 방속에서 나는 내 아들의 탄생을 알았다. 아아, 신이여! 당신의 뜻을 이제야 비로소 알겠나이다.
잠을 재우지 않는 그 흰빛 방에서, 끝없는 기침 속에서 침묵, 거부, 침묵, 거부의 닷새가 지난 뒤 나병식(羅炳湜)이 조영래(趙英來)로부터 돈 받은 것을 고백한 것과 조영래가 체포되지 않은 것을 드디어 알아채고, 그러나 그 무엇보다 민청학련(民靑學聯)의 상부선(上部線)이 이 철(李哲)·유인태(柳寅泰)에게 2,000여원의 교통비를 준 대구 경북대학교 정심회(正心會)의 여정남(呂正男)이요, 여정남은 하재완(河在玩) 등 인혁당의 한 멤버로 민청학련의 진보세력이 반국가단체인 인혁당인 것으로 조작되고 있음을 닷새만에 알아채고 엿새째 되는 날 새벽부터 나는 상부의 지학순(池學淳) 주교로부터 받은 120만원을 유신철폐를 목적으로 한 시위자금(示威資金)으로 받아 하부의 조영래에게 전달했고, 그 자금은 조영래로부터 삼민(三民) 테제와 함께 민청학련 지도부에 전달된 것으로 안다는 진술(陳述)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 취조를 시작했을 때의 '민중(民衆)의 소리' 집필(執筆) 여부 따위는 다 날아가 버렸다.
수사 전체가 뒤집혔다.
나는 온몸의 감각으로 그것을 일일이 파악하고 있었다. 6국장 이용택(李龍澤)은 취조관을 통해 지(池)주교의 자금 액수를 삭감하자고 제의해 왔다. 나는 코웃음으로 받아넘겼다. 사건과 진실을 빼고 나면 당신들이 나를 괴롭힐 이유, 내가 당신들에게 조사받을 까닭이 하등 없다고 대답했다. 세 차례나 그 일은 반복되었다. 심지어 지주교에게 신세지면서 너무 하지 않느냐는 따위의 너절한 타령까지 나왔다.
그러나 나는 못을 딱 박아버리고 말았다. 당신들 정 이러면 변호사를 통해 돈 깎자고 흥정한 내역을 모조리 공개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드디어 상부선, 주도선(主導線)이 바뀌었다.
120 만원의 지주교가 주도선이고, 30여만원의 윤보선(尹潽善) 전 대통령과 박형규(朴炯圭) 목사님이 부주도선(副主導線)으로, 인혁당은 중간 과정에 개입한 것으로 바뀌었다. 심지어 최소한도의 통일전선 구축 혐의조차 성립시키지 못한 6국의 완전 실패작이었다.
가슴 아픈 일이지만 복수는 인혁당에게 행해졌고, 이것이 가슴 아파 나는 다시금 글을 쓰고 입을 열다 재구속되어 7년을 장기 수형(受刑)하게 된다.
나는 잠을 잘 수 있었고 곁에 배석한 헌병의 군홧발에서 비로소 벗어날 수 있었다.
<사진>
끊임없는 기침, 기침 속에서 내 첫아들 원보(圓普)의 탄생도 알았다.
나는 내가 왜 죽음을 각오했는지 그 이상한 까닭을 알 듯했다. 그것은 죽어갈 때가 되면 유난히 큰 솔방울을 내미는 소나무의 비밀이었고, 그것은 바로 생명(生命)의 신비(神秘)였다.
생명!
그러나 아직은 생명의 뜻을 확실히는 알 수 없었다.
<'월간중앙'과 동시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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