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접고용"을 주장하는 승무원들과 "법적 책임이 없다"고 대응해 온 철도공사 사이의 2년 가까운 갈등에서 법원이 승무원들의 주장에 손을 들어준 것이다.
'철도공사의 사용자성 인정' 첫 법원 판결
KTX 여승무원들은 입사 당시에는 철도공사의 자회사인 한국철도유통(구 홍익회) 소속이었으나 지난해 3월부터 "철도공사가 불법파견으로 승무원을 사용해 왔다"며 직접고용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여 왔다.
오랜 시간 첨예한 논란이 되며 노동부의 2차 조사까지 불러 온 이 사건에 대해 서울중앙지법 형사2단독 구회근 판사는 "KTX 여승무원들이 한국철도유통과 체결한 근로계약은 형식적이고 명목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법원은 이어 "한국철도공사와 KTX 여승무원들 사이에는 적어도 묵시적 근로계약관계가 성립돼 있다"며 "따라서 한국철도공사는 KTX 여승무원들에 대한 관계에서 실질적으로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상의 '사용자' 지위에 있다"고 밝혔다.
두 차례에 걸친 조사에서 노동부는 '적법 도급' 판정을 내렸으나 법원은 반대로 사실상 '위장 도급'이라고 해석한 것이다.
당초 이 사건은 지난해 2월과 3월 여승무원들이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사복 착용' 및 '불법 파업'을 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데 따른 것이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민세원 KTX서울열차승무지부장에게 쟁의 행위의 절차상 문제점을 근거로 벌금 150만 원을 선고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쟁의행위의 적법성에 대한 승무원측의 유죄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쟁의 행위 목적의 정당성 여부에 대한 판단에서는 승무원 측의 주장을 인정했다.
구 판사는 "철도공사가 사용자 지위에 있는 이상 KTX 여승무원들이 철도공사를 상대로 '정규직'으로의 전환을 요구하는 것은 근로조건의 유지·개선과 근로자의 경제적·사회적 지위의 향상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라고 판시해 승무원들 쟁의행위의 정당성을 부여했다.
승무원 "법원이 우리 주장 인정" vs. 철도공사 "법적 구속력 없다"
KTX 승무원들은 "처음부터 우리가 주장했던 것을 법원이 인정해준 것"이라고 반겼지만 철도공사는 "법적 구속력이 없다"며 평가절하했다. 철도공사는 이날 보도자료를 통해 "이번 판결은 민세원 씨 개인에 대한 판결"이라며 "이를 근거로 코레일이 승무원들을 직접고용해야 한다고 볼 수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번 판결은 법원이 철도공사에게 승무원들의 직접고용 의무를 내린 것"으로 해석했다. 단순히 교섭의무를 지는 사용자성만을 인정한 것을 넘어서는 판결이라는 것이다.
조순경 이화여대 교수는 "묵시적인 근로계약관계가 성립한다는 것은 형식적인 근로계약 관계가 없다 하더라도 이미 근로자로 본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특히 "재판부가 판단이유로 들고 있는 대부분의 사실들은 노동부의 2차례에 걸친 조사 등에서 사실무근으로 밝혀졌다"는 철도공사의 주장에 대해 전문가들은 "노동부의 재조사 결과 자체가 문제가 있었다"고 반박했다. "일부 불법의 소지가 있으나 종합하면 적법"이라는 것은 그간의 도급과 파견을 나누는 기준과 다른 논리였다는 것.
검찰이 재판부의 판결에 불복해 항소하지 않을 경우 법원의 판결은 확정된다. 그 경우 철도공사가 승무원들을 상대로 제기한 각종 민사 소송에서도 유사한 판결이 나올 가능성이 높다.
더욱이 확정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단점이 있으나 승무원들이 철도공사를 상대로 근로자지위 확인 소송 등을 제기할 경우에도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같은 법원, 같은 사건, 다른 판결
반면 철도공사는 "같은 서울중앙지법에서 동일한 행위를 한 다른 KTX 승무원에 대해서는 코레일이 이들의 사용자에 해당한다고 볼 아무런 근거가 없다라고 판시한 점에 주목한다"라고 반박했다.
지난 11월 서울중앙지법 신용호 판사는 같은 혐의로 기소된 KTX 승무원들에 대해 업무방해 혐의 등에 대해 벌금형을 선고하며 "피고인들 및 변호인이 제출한 모든 자료들에 의하더라도 한국철도공사가 KTX 여승무원들의 사용자에 해당한다거나, 위와 같은 업무방해 행위 및 퇴거불응 행위가 법률에 의하여 보호받을 수 있는 정당한 파업행위라고 볼 아무런 근거가 없다"고 판단했다.
다만 '사용자성'을 인정한 구회근 판사의 판결문에는 사용자성을 인정할 수 있는 근거를 상세히 설명한데 비해, 신 판사는 "제출한 모든 자료들에 의하더라도"라고만 한 채 결론을 내린 점이 눈에 띈다. 따라서 같은 법원에서 같은 사건에 대한 두 판사의 다른 해석은 이후에도 논란이 될 전망이다.
"'타결' 서명 직전 철도공사 입장 바꿔"…승무원, 단식 농성 돌입
한편 철도노사는 이 문제 해결을 위해 지난 11월 16일부터 한 달이 넘도록 승무원이 아닌 역무계약직 채용을 전제로 협상을 벌여 왔지만 합의서 사인 직전 공사 측의 태도가 변해 불발로 끝났다. 이에 승무원들은 27일부터 서울역 앞에서 무기한 천막 단식 농성에 들어간다고 밝혔다.
김천환 철도공사 여객사업본부장, 이철의 철도노조 정책실장, 정혜인 KTX부산열차승무지부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수 차례에 걸쳐 열린 협상 끝에 노사는 지난 14일 "현재 투쟁 중인 승무원 80명을 역무계약직으로 채용한다"는 합의서를 작성했다. 승무직으로의 복귀를 지속적으로 요구해 왔던 승무원들이 승무직이 아닌 역무직을 받아들이면서 가능했던 합의였다.
하지만 이 합의는 끝내 발표되지 못했다. 이철의 정책실장은 "이미 합의서와 공동발표문의 단어까지 다 조율해 놓은 상황에서 공사가 발표를 미뤄달라고 해 여러 차례 조인식을 연기했다"며 "하지만 지난 24일 공사가 최종적으로 '연내에는 어렵겠다'는 입장을 밝혀 왔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철도공사는 "공사의 공식입장이 아닌 실무자 차원의 논의를 자의적으로 확대해석한 것에 불과하다"며 "승무원 개개인에 대한 고용문제 해결차원에서 노사간 논의를 진행해왔지만 그것조차도 원칙 위배 및 특혜라는 내부 문제제기로 진통을 겪고 있다"고 밝혔다.
더욱이 지난 11월 파업 철회 책임을 지고 현 집행부가 사퇴하고 오는 28일까지 철도노조가 새 집행부 선거를 진행중임에 따라 합의의 시기적인 문제도 걸림돌로 작용한 것으로 전해졌다.
승무원들은 이날 기자회견을 통해 "노동조합 합의서로 작성하기 힘든 내용이었지만 승무원들의 생존권을 위해 모든 비판과 비난을 감수하기로 했으나 이제 와서 공사의 주장이 대부분 반영된 잠정합의서를 휴지조각으로 만들었다"며 "자신들의 손으로 직접 작성한 합의서를 무시하는 철도공사의 행태를 보면서 우리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게 됐다"고 단식 농성의 배경을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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