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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대법원도 지금 같았더라면…"

'인혁당 재건위' 사건 30년만에 재심

1974년 7월 이른바 '인혁당 재건위'(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 1심 판결이 있던 날. 당시 비상보통군법회의는 우홍선 씨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우 씨는 그의 아내 강순희 씨에게 웃으며 "괜찮다"고 말했다.

같은 해 9월 2심 판결이 있던 날. 당시 비상고등군법회의는 우홍선 씨에게 역시 사형을 선고했다. 우 씨는 이번에는 괜찮지 않았다. 강 씨는 "남편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군요"라고 회상했다.

이듬해 4월8일 대법원 선고가 있던 날. 민간 법정에 걸었던 한 줄기 희망은 물거품이 됐다. 역시 '사형.' 우 씨와 강 씨 둘 다 얼이 빠져 아무 말도 못 했다. 강 씨는 대법관 13명이 모두 빠져나간 뒤에야 분을 참지 못하고 손에 든 양산을 부서져라 의자에 내리치며 "당신들은 살인자"라고 외치다 끌려 나왔다.

***'사법 살인' 당한 피고인들 자리엔 노년의 미망인들 눈물만**

30여 년이 지난 2006년 3월20일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방법원 311호 법정. 강 씨는 남편을 대신해 피고인석에 앉았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대해 법원이 재심 결정을 내렸지만, 이미 남편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1975년 대법원의 확정판결이 내려지고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아 다음날 새벽 우 씨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세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기록된 그 날이다.

당시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사형을 당한 피고인은 8명. 이날 법정에는 8개의 피고인석이 마련됐지만, 그 자리엔 노년의 미망인들만 앉아 회한의 눈물을 닦을 뿐이었다.

강 씨는 재판이 끝난 뒤 기자들의 열띤 취재 세례를 받았다. 30여 년 전 대법정에서 끌려나간 뒤 '간첩의 가족'으로 낙인 찍혀 모진 핍박을 받으며 살아 온 세월을 감안하면 또 다시 눈물을 흘릴만한 일이었다.

강 씨는 한이 맺힌 듯 얘기했다. "대법원 판사는 인권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 아니었던가. 그런 그들이 그랬으니 우리는 누구를 믿고 살아야 했겠나.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민청학련 조작 뜻 못 이룬 정권에 의한 무고한 희생"**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3부(문용선 재판장)의 심리로 이날 열린 재심 첫 공판에서 변호인 측은 당시 엄혹했던 유신 정권을 맹성토했다.

변호인 측은 모두 진술을 통해 "당시 독재정권은 유신독재 반대 투쟁을 벌이던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을 북한을 추종하는 반국가단체로 조작해 수사하던 중, 당시 민청학련에는 재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유명 인사들이 많이 포함돼 대대적인 구명운동이 일자 이들을 대신할 불순한 이미지의 집단이 필요했다"며 "재야활동을 활발하게 하지도 않고 유명하지도 않았던 인사들을 '인혁당 재건위'라는 이름으로 엮어 민청학련의 배후세력으로 조작해 희생양으로 삼았다"고 주장했다.

변호인 측은 이어 "당시 '긴급조치' 하에서 북한 지령을 받고 국가를 전복하려는 공산주의 세력이라고 낙인 찍힌 인혁당 재건위에 관심을 가질 용기 있는 사람들이 드물었다"며 "민청학련 사건의 가장 큰 피해자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피해자와 유가족들로 그들은 정권에 의해 처절하게 희생당했다"고 말했다.

변호인 측은 "당시 수사를 했던 수사관들도 '인혁당 재건위'라는 말을 수사결과 발표를 통해서 들었다고 증언할 정도로 '인혁당 재건위'라는 말 자체가 중앙정보부에 의해 창조된 것"이라며 "가끔 모여 시국에 대해 논의하던 이들을 체포해 고문을 통해 허위자백을 하게 만들고 수사결과를 조작한 대표적인 인권 탄압 사례"라고 지적했다.

반면 검찰 측의 모두 진술은 비교적 간단했다. 검찰 측은 "이번 사건은 검찰이 아니라 유신 시절 긴급조치 2호에 따라 설치된 비상군법회의에서 수사와 기소, 재판을 맡았지만 검찰은 공익의 대표자로서 객관적인 진실 규명을 위해 노력하겠다"고만 말했다.

***인혁당 재건위 생존자들도 재심 청구 준비 중. 민사 소송도**

이날 방청석에는 피고인의 배우자 등 유가족은 물론, 인혁당 재건위·민청학련 관계자들이 대거 참석해 재판을 지켜봤다.

1974년 이 사건으로 김수환 추기경을 만나러 온 가족들과 사무실 복도에서 우연히 마주친 뒤 '운동'에 눈을 떴다는 문정현 신부가 평택에서 올라와 방청석 맨 앞줄에 앉아 있었다. 그 뒤에는 함세웅 신부, 장영달 의원 등이 재판을 지켜봤고, 일부 인사들은 공판이 끝나자 일어서서 박수를 쳤으며, 사건을 맡아 재심 결정을 받아낸 김형태 변호사의 손을 붙들고 연신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김 변호사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기소된 24명 중 사형당한 8명은 이번 재심을 받게 됐고, 나머지 무기징역 등을 선고 받았었던 피해자 16명 중 14명은 이미 재심 청구 의사를 밝혔다"고 말했다.

김 변호사는 또한 "이번 재심이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 같다"며 "형사사건인 이번 재심 결과를 지켜본 뒤, 피해자와 유가족들이 그동안 받아 온 고통을 감안해 국가를 상대로 민사상의 손해배상을 청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다음 재판은 4월24일 열리며, 변호인 측은 유인태, 이철 씨 등 민청학련 관련자들을 증인으로 신청할 방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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