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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혁당…우리는 이제 희망의 길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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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혁당…우리는 이제 희망의 길을 떠난다

〈기고〉 인혁당 사건에 대한 재심 결정을 보고

27일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대한 사법부의 재심 결정이 있었다. 1975년 인혁당 관련자 8명의 사형이 집행된 후 30년 만에 사법부가 재판 과정에 대한 유족들의 이의를 받아들여 재심을 결정한 것이다.

이날 인혁당 관련자로 사형당한 여정남 씨의 조카 여상화 씨가 〈프레시안〉에 글을 보내왔다. 그는 기고문을 통해 "지금 가장 가슴이 아픈 것은 이 재판의 가장 중요한 당사자인 피고인들이 없다는 것"이라며 이들 '사법학살'의 희생자 8명의 죽음이 "다시는 이 땅 위에서 혹여 그 누구라도 국가의 권력과 횡포에 희생당하지 않을 그런 커다란 선물"이 되기를 기원했다. 〈편집자〉

지난 4월 9일 인혁당 희생자 30주기가 있었다. 30주기를 맞으며 쓴 나의 글 '이제 30년이다. 세상아 그만 문을 열어라'에서 나는 이렇게 썼다.

"이제 30년이다. 하지만 인혁당은 침묵의 두터운 어둠이다. 30년 전 1975년 4월 9일 새벽. 차례로 교수형을 당한 여덟 분들이 뿌린 피의 대가를 우리가 정의와 진실로서 거두기에는 멀었는가. 아직도 멀었는가. 얼마나 더 고통의 어두운 세월을 세상은 원하는가?"

그리고 글을 마무리하면서 이렇게 썼다.

"사람은 희망에 기대어 사는 동물이다. 나는 이 글을 마무리하며 희망을 얘기하고 싶다. 인혁당 사형수들은 아직 30년 전 그 곳, 서대문 형무소 사형대에 있다. 세상에는 봄이 왔으나 봄은 그 담장을 넘지 못하고 인혁당이라는 그곳은 아직 얼어붙은 겨울이다. 머지않아 그 곳에도 봄이 올 것이라고 믿고 싶다.

드디어 담장을 넘어 봄의 발자국 소리가 콩콩 조금씩 울리며 서 있는 나무들 사이로 지나가고, 그리고 그 나무들이 힘차게 몸을 틀며 푸른 영들의 작은 휘파람 소리와 숨소리들이 새어나오고. 잎과 꽃들을 준비하는 달랑거리는 소리와 깔닥거리는 소리, 술렁이는 소리들이 뒤섞여 흘러흘러 가며 '아, 인혁당에 드디어 봄이 왔다!' 마음껏 소리쳐 외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믿고 또 믿는다.

세상에서 가장 고귀해야 할 '인간의 양심'이라는 것에 그래도 끝내 마음을 바쳐보는 것이다. 아, 세상아 이제 그만하면 넘치고도 넘치지 않았느냐. 문을 열어라. 인혁당에 대한 빗장을 걷고 활짝 문을 열어라."

그리고 12월 27일, 마.침.내.법.원.은.인.혁.당.사.건.재.심.을.개.시.하.기.로.결.정.했.다.

2002년 9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이 사건을 중앙정보부의 조작극으로 결론 내렸고, 우리 유족들은 2002년 12월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그리고 만 3년 만에 재심개시 결정이 난 것이다.

서울중앙지법 형사부 311호 법정 안은 유가족들과 관련자들, 그리고 언론사 취재기자들로 꽉 차 있었고 분위기는 무어라고 표현할 수 없는 기운이 감돌았다. 사람들은 30년 전, 세계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이름 지워졌던 사법살인의 진실을 밝혀줄 재판부의 전향적인 양심선언을 굳게 믿고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 가장 가슴이 아픈 것은 이 재판의 가장 중요한 당사자인 피고인들이 없다는 것…. 재심 없이 사형을 당하였다는 것…. 긴급조치로 인한 비상군법회의. 이미 없어진 재판이며 대통령에 의해 일시적으로 개정된 재판이었다.
지금 이 자리가 이미 죽어서 말없는 피고인들을 대신하여 이 사건의 진실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사정들은 이 재판의 역사적 위치와 함께 재심을 통한 피고인들의 권리 구제의 한계를 잘 보여주는 것이어서 더욱 마음이 무겁다. 피고인들의 명복을 빌며 재심판결의 확정….

재심개시 결정 공판의 모두에서 이 같은 재판부의 발언을 들으며 머릿속은 지금 이 시간과 지난 시간들을 넘나들며 얼굴에선 쉴새 없이 눈물과 콧물이 흘렀다.

1975년 2월 17일, 도하 각 신문들은 민청학련 관련자들의 석방 소식을 환호의 사진들과 함께 큰 활자로 알렸다. 2월 12일 국민투표라는 것을 실시해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적 합의가 이뤄졌다면서 석방시킨 것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기쁨의 순간들을 기사로 전했다.

"'만세'를 불렀다. 1년 만에 만나는 '그리운 얼굴'들이었다. 다정한 벗들은 감격을 못 이겨 헹가래를 쳐 올렸고 어느 출감자는 가족의 눈물 어린 얼굴을 보며 껄껄 웃었다. 도무지 현실 같지 않은 현실 앞에서, 출감자들은 차례, 차례로 가족과 친지들 품에 안겼다."

석방자들의 기쁨은 이어진다.

"옥고 1년…. 뜨거운 재회. '감옥 제대, 달려온 교인들과 플래카드 아래 헹가래'"

이렇게 축제 분위기의 지면은 이어지고, 이렇게 떠들썩한 축제 분위기 속에 저편 한구석에서는 몇몇의 부인들이 함석헌 옹을 붙들고 울음을 터뜨리고 있고 함 옹도 두 볼로 흐르는 눈물을 닦을 염도 않고 위로의 말씀을 건네고 있다.

'보세요. 이렇게 나오지 않아요. 조금만 참으세요. 조금만 참으면 다 나올 텐데 뭐.'
'우리 아빠는 안 풀려….'

인혁당 사건에 관련돼 사형선고를 받은 피고의 어린 4남매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사형수 여덟 분은 채 2개월이 못 된 4월 9일 새벽, 함석헌 옹이 조금만 참으면 다 나올 수 있으리라고 해서 굳게 믿고 있었던 그분들은 죽었다. 일찌감치 대한민국에서 제거대상으로 지목되었던 그분들은 합법적인 절차에 의해 교수형으로 대한민국에서 영원히 제거되었던 것이다…

재판부는 "의문사위 조사 과정에서 당시 구치소 교도관 및 다른 공동 피고인, 가족, 심지어 수사관조차 피고인 8명에 대해 고문 및 가혹행위가 있었다고 진술한 내용에 신빙성이 있어 재심 사유가 충족됐다. 따라서 대통령 긴급조치 2호에 의해 설치된 비상보통군법회의의 1974년 1월8일 선고와 우홍선, 송상진, 서도원, 하재완, 이수병, 김용원, 도예종에 대한 7월11일, 여정남에 대한 7월13일 선고에 대해 재심을 개시한다"고 말했다.

줄곧 30년 전과 후를 드나들며 있던 나는 그 순간 기쁨과 회한의 감정들이 뒤섞여 가슴속에서 도저히 무어라고 표현할 수 없을 감정의 파장이 일었다.

이제 30년 전, 그 축제의 기쁨과 흥분 속에서 소외된 채 신문지면의 한 모퉁이에서 오두마니, 털썩 주저앉아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통곡하는 인혁당 피고 가족들의 외로운 모습은 이제 더 이상 없는 것이다.

그리고 천주교인권위원회와 인혁당사건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을 위한 대책위원회의 '사법부의 인혁당사건 재심 개시 결정 환영 기자회견'은 오랜만에 기자들의 터지는 플래쉬들로 환했다.

법원을 나와 유가족과 인혁당사건 관련 선생님들과 그리고 30년 동안 인혁당의 진실을 위해 애쓰신 분들과 서대문형무소 사형장으로 갔다. 30년 전 여덟 분들의 선량한 목을 휘감았을 오랏줄과 그분들이 앉으셨을 교수대 위의 의자. 어쩌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을지 모르는 그곳에서 우리는 차마 꿈속에서라도 잊을 수 없는 그 여덟 분들과 우리들은 다시 만났다.

"그분은 이미 돌아가셨고 살아 있는 우리들도 지금 죽어가고 있다. 평생을 누명을 벗겨 주리라 다짐하며 통곡과 피로 새겨진 가슴을 끌어안고 사는 것이 아니라 버티면서 살아가고 있다. 남편을 그렇게 보내고 그냥 이렇게 이 목숨마저 다하고 나면 어찌 하늘에 올라 도대체 무슨 염치로 남편의 얼굴을 볼 수가 있겠나."

추모제 때마다 미혼으로 돌아가신 나의 삼촌 여정남을 제외한 일곱 분의 부인들은 절규하셨다.

처형 장소 앞에 서서 한꺼번에 터지는 울음과 오열. 어찌 오늘 같은 날 울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 울음 속에, 통곡 속에 지나간 30년 세월의 고통이 다 담기지는 못하겠지만 유가족들은 기쁨의 눈물과 함께 참혹했던 세월을 토해내고 있는 것이다.

30년이다. 그래 30년이다…. 그 분들이 사법학살을 당하시고 30년 만에 역사의 진실이 쓰여지고 있는 것이다.

'역사는 강자의 붓끝으로 쓰여진다'고 대개 사람들은 말한다. 하지만 인혁당 유가족들은 '역사는 진실의 붓끝으로 쓰여지는 것이다'라는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30년을 달리고 달려 왔다. 그것은 그냥 쓰여지는 것이 아니다. 진실을 밝히려는 한마음을 가지고 끊임없이 노력할 때에야 가능한 것이다. 또한 진실을 밝히고자 하는 의지와 끊임없는 인내로 많은 사람들이 함께 그 길을 같이 달려와 주셨다. 말로는 다 하지 못할 고마움이 가득하다.

30년 세월을 하루같이 투쟁과 위로, 그리고 격려와 아픔으로 함께 해 주신 우리의 시노트 신부님, 오글 목사님, 문정현 신부님, 함세웅 신부님 그리고 천주교인권위원회와 인혁당 대책위원회 위원님들에게 고개 숙여 깊이깊이 감사드린다. 또한 지난 세월동안 목격자의 역할로 관심을 갖고 함께 해 오신 많은 사람들의 애정과 격려도 빼놓을 수 없는 것이다.

이제 재심이 속개되어 원래의 재판에서 범한 중대한 사실의 오인을 명명백백하게 바로잡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법적으로 아직 사형이 진행 중인 인혁당 사형수들이 무죄가 되고 죽은 사람의 인격과 명예,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가 회복되어야 할 것이다. 나는 그런 날이 머지않아 오리라 확신한다.

이제 내년 4월 9일. 그 여덟 분들이 돌아가신 그 날. 지나간 30년 동안 어김없이 봄과 함께 찾아 왔던 4월의, 겨울처럼 차가웠던 그 날이 마른 잎들이 생명으로 다시 살아나는 푸르른 봄날로, 죽어 있던 땅이 깨어 모란을 피워내고 잠든 뿌리를 뒤흔들 봄비가 되어 오리라.

1975년 4월 9일 새벽 그 악랄했던 죽임의 처참했던 기억으로가 아닌, 다시는 이 땅 위에서 혹여 그 누구라도 국가의 권력과 횡포에 희생당하지 않을 그런 커다란 선물을 자신의 목숨을 다해 우리 모두에게 주고 가셨던 4월의 찬란한 그 날로 기억되기를 바란다.

우리가 역사를 진실 되게 기록하고 그리고 그 역사를 소중히 간직하여야 하는 까닭은 그것을 미래로 건네주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이제 그것을 향하여 걸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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