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이 '인민혁명당(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대해 재심 결정을 내렸다. 1975년 4월 8일 대법원의 사형확정 이후 하루도 채 안 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8명의 원혼이 넋으로나마 다시 법정에 서게 됐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3부(이기택 재판장)는 27일 열린 재심청구 사건 공판에서 "당시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 공판 기록과 이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 결과 등을 검토한 결과 당시 재판에 문제가 있었고, 사건 자체가 조작됐을 가능성이 있다"며 "긴급조치 2호에 의해 설치된 비상보통군법회의에서 선고한 1974년 선고에 대해 재심을 개시한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앞으로 검찰이 3일 안에 불복 의사를 밝히지 않는 한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30년 만에 새로운 재판부에서 다시 재판을 받게 됐다.
***법원, '사법살인' 인혁당 재건위 사건 재심 결정**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란 1974년 "일부 세력이 인혁당을 다시 세워 북한의 지령을 받아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민청학련'을 조종해 국가를 뒤엎으려 했다"고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간첩사건으로, 당시 23명이 구속돼 15명이 무기징역을 받았고 김용원, 도예종, 서도원, 송상진, 우홍선, 여정남, 이수병 등 8명이 비상보통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975년 4월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됐다.
특히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된 후 불과 20여 시간만에 사형이 집행돼 국제법학자협회가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한 '사법살인'의 대표적 사건으로 꼽혀왔다. 당시 재판에 참여했던 강신옥 변호사는 "법은 정치의 시녀, 권력의 시녀, 이 재판은 사법살인 행위"라고 주장하다 구속되기도 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2002년 9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이 사건을 '정권안보를 위한 중앙정보부의 조작극'이라고 규정했고, 의문사위의 조사 내용을 바탕으로 유족들은 같은 해 12월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하지만 3년이 넘게 이 재심청구 사건에 대한 결정이 지연돼왔다. 원칙적으로 재심은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 확정판결이 난 사건은 다시 재판하지 않는다)의 원칙'에 반한다는 이유로 법원은 재심 결정에 매우 인색한 편이다. 형사소송법은 재심 사유를 '원 판결의 서류 또는 증거물이 위조, 변조된 사실이 확정 판결에 의해 증명된 때', '무죄 또는 면소(免訴)를 인정할 명백한 증거가 새로 발견된 때' 등으로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
***사법부의 과거사 청산 가속화될지 주목**
그러던 중 2005년 이용훈 신임 대법원장이 취임하며 '사법부의 과거사 청산'에 대한 강한 의지를 밝혔고, 국정원 진실위가 2005년 12월 다시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대해 "명백한 증거 없이 고문에 의해 조작된 사건이며, 사형 집행과정도 박정희 대통령의 재가 없이는 사실상 불가능했다"고 발표함에 따라 이 사건 재심 여부에 대한 관심이 다시 높아졌다.
한편 대법원은 이번 재심 결정과는 별도로 과거사 청산 차원에서 과거 군사독재정권 시절의 시국공안 사건의 판결문들을 수집해 분석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져, 인혁당 재건위 사건과 비슷한 다른 사건들의 재심 여부 결정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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