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정권 시절 대표적인 공안사건이었던 1964년의 인혁당 사건과 1974년의 민청학련·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대통령과 중앙정보부(중정)에 의해 조작된 것으로 드러났다.
또 인혁당은 중정의 발표와는 달리 북한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조직으로 당 수준으로까지 볼 수 없으며 2차 인혁당 사건에 해당하는 인혁당 재건위는 존재조차 하지 않았고 특히 민청학련 사건의 경우 조사 과정에서 고문, 가혹행위 등이 관행적으로 가해진 것으로 확인됐다.
***"형 확정 18시간 후 사형 집행은 박정희 대통령 선에서 정해져"**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진실위)는 7일 오후 국정원 강당에서 사건조사 결과 발표회를 갖고 이같은 내용을 공개했다.
〈사진1 : 발표 장면〉
진실위는 이들 사건이 학생시위로 인한 정권의 위기 상황 속에서 제대로 수사도 않은 상태에서 발표한 것으로 규정, "일단 대통령이나 중앙정보부장의 발표에서 규정된 인혁당이나 민청학련의 성격은 그대로 수사지침이 되어 짜맞추기가 진행돼 이들 단체를 무리하게 반국가단체로 만들어간 것"이라고 밝혔다.
진실위는 특히 1975년 4월 8일 인혁당 재건위에 관한 대법원의 상고기각 결정이 내려진 지 18시간만에 관련자 8명에 대한 사형이 집행됐던 일과 관련해 '즉시 처형' 방침이 청와대 선에서 이미 정해져 있었던 것으로 판단했다.
진실위는 이와 관련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사형이 전격적으로 집행됐다는 사실을 확인해줄 문서나 증언을 찾을 수는 없었다"면서도 "(그러나) 사전에 국방부, 법무부 등의 긴밀한 협조와 준비가 있어야만 사형이 집행될 수 있다는 점에 비춰" 이같은 판단을 내렸다고 밝혔다.
당시 국제법학자협회는 이날을 '사법사상 치욕의 날'로 선포하기도 했던 사형 집행의 배경에 대해 진실위는 형이 결정된 이날 대통령 긴급조치 7호가 발동됐는데 대통령이 고려대라는 1개 대학의 휴교조치를 긴급조치로 발동해 지시할 정도로 "유신정권은 이성을 잃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인혁당은 '서클 형태의 모임'…민청학련은 '연락망 수준의 조직'**
인혁당의 실재 여부에 대해 진실위는 이 조직이 당시 사법당국이 판단한 것처럼 당 수준에 이르지 못한 '서클 형태'의 모임을 가져온 것에 지나지 않았고, 인민혁명당이란 명칭은 여러 명칭 중 하나로 언급되었을 뿐이며 강령·규약도 일부 구성원 사이에 논의된 적은 있으나 정식으로 채택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진실위는 인혁당이 5.16 군사쿠데타로 사회단체의 정치활동이 전면 금지되자 혁신계 주요 인물들이 장차 합법화될 혁신정당 활동에 대비해 혁신계 청년의 통합을 논의해 오던 활동이 드러난 것으로 "국가변란을 기도한 반국가단체로 실재했다고 할 수 없다"고 최종 판단했다.
또한 당시 중정에 의해 인혁당과 학생운동의 연결고리로 지목된 오병철 등과 관련, 학생 데모가 전국에 파급된 것은 대일 굴욕외교에 대해 학생들이 의분에 못이겨 한 행동이지 어떠한 지령이나 선동에 의해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피해자들의 진술을 받아들였다.
〈사진2: 민청학련 사건 당시 사진〉
1974년 민청학련 사건과 관련, 진실위는 '반유신 투쟁을 위한 학생들의 연락망 수준의 조직이 유인물에 표기한 조직명칭에 불과한 것'이라고 규정하고, 간첩 배후설과 관련해서도 "수사 이전에 미리 발표된 대통령의 담화문 내용과 수사 결과가 일치되도록 만드는 전형적인 짜맞추기 수사가 진행됐음을 보여준다"고 밝히고 있다.
또 민청학련이 인혁당 재건위의 배후조직이었다는 당시 공안당국의 발표는 '증거를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고 못박았다. 또 조총련 및 일본 공산당원과의 연계설과 관련해서도 "일본인들이 유인태 등과의 접촉과정에서 '무장' 운운하는 발언을 한 사실은 있지만 중앙정보부가 조총련이나 일본 공산당이 민청학련의 배후라고 한 발표는 아무런 근거가 없이 조작된 것"이라고 밝혔다.
***"피해 회복을 위한 국가차원의 조치 필요"**
이같은 결론을 내린 진실위는 "피해자들의 피해 회복을 위한 국가 차원의 적절한 조치가 신속하게 이뤄져야 할 것"이라며 "권위주의 시절 국가안보의 이름 아래 국가보안법을 이용해 시민들의 헌법적 권리를 중대하게 침해해 왔는데 이제 이러한 과거와 결별하려는 국가 차원의 결단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사진 3: 발표 장면〉
진실위는 또 세 가지 사건에 대한 수사가 중정의 책임 아래 진행됐지만 "정권 차원의 위기 상황에서 권력자의 자의적 요구에 따라 수사의 방향이 미리 결정돼 집행됨으로써 국가최고정보기관으로서의 독립성과 자율성이 중대하게 침해된 사건"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진실위는 이어 "국가최고정보기관이 국가 차원이 아닌 정권 차원의 정치적 필요성에 의해 흔들리는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국정원은 부단히 자기반성의 노력을 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박스기사 시작〉
***인혁당·민청학련 사건이란**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진실위)가 7일 조사결과를 발표한 인혁당 및 민청학련 사건은 박정희 정권 당시의 대표적인 시국사건으로 그동안 끊임없이 의혹의 대상이 돼 왔다.
특히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대법원의 확정판결 다음 날 관련자 8명 전원의 사형이 집행돼 '사법살인', '사법사상 암흑의 날'이라는 오명을 얻기도 했다.
〈사진4: 인혁당 희생자들〉
1차 인혁당 사건은 1964년 8월 14일 발표된 사건으로, 한일회담과 대일 굴욕외교를 반대하는 시위가 거셌던 시국에서 불거졌다.
당시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1964년 8월 14일 북한의 지령을 받고 국가변란을 기도한 대규모 지하조직인 인민혁명당을 적발해 관련자 57명 가운데 41명을 구속하고 나머지 16명을 수배중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 사건을 송치한 서울지검 공안부 담당검사가 수사후 '증거 불충분'으로 기소를 거부하자 당직 검사를 통해 26명을 국가보안법 혐의로 기소했다.
그에 재판부는 1965년 6월 29일 서울고법 항소심에서 도예종에게 징역 3년 등 전원 유죄 판결했으며 1965년 9월 21일 대법원은 항소심 형량을 그대로 확정했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불리는 2차 인혁당 사건은 1973년 서울대 학생들의 시위를 계기로 반(反)유신체제 운동이 급속히 확산되는 가운데 '민청학련' 명의의 유인물이 배포됐고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1974년 4월 3일 긴급조치 4호가 선포돼 민청학련과 그와 관련된 일체의 활동을 금지했던 시기에 발생했다.
중정은 민청학련의 배후로 인혁당 재건위를 지목, 인혁당 재건위 및 민청학련 관련자를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사법처리했고 인혁당 관련자 23명에게는 징역 15년에서 사형에 이르는 중형이 선고됐다.
이 가운데 사형이 선고된 8명은 1975년 4월 8일 대법원의 상고기각 결정이 내려진 다음 날 새벽에 형이 집행돼 당시 국제법학자협회는 이날을 '사법사상 치욕의 날'로 선포하기도 했다.
강신옥 변호사는 민청학련사건 변론에서 "나도 직업상 변호인석에 앉아 있으나 그렇지 않다면 차라리 피고인들과 뜻을 같이하여 피고인석에 앉아 있겠다"고 말해 6개월 동안 구속되기도 했다.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에는 이해찬 국무총리를 비롯 열린우리당 김근태 유인태 의원, 이철 전 의원, 유홍준 문화재청장, 이강철 전 청와대 시민사회수석, 김지하 시인 등이 포함돼 있다.
그 후 시민단체와 유가족들은 중정의 고문, 조작 의혹을 지속적으로 제기했다.
의문사진상규명위는 2002년 9월 "북한의 지령을 받아 재건위를 구성하고 학생들을 배후조종했다는 것을 입증할 증거가 없었다"며 조작극으로 판단하고 신문조서 조작과정에서 고문이 자행됐다고 밝혔다.
인혁당 사건 유족들은 의문사위 조사결과 등을 근거로 2002년 12월 법원에 재심 신청을 냈으며 2003년 11월까지 두 차례 재판에 이어 지난 7월 심리가 재개됐다.
한편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는 작년 12월 이 총리와 유인태 의원, 이철 전 의원, 유 문화재청장 등 민청학련 관련자 9명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했다.
(연합뉴스)
〈박스기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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