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비판적 지식인이나 전문적 논객들에 대해 더러는 실망스러운 때가 많다. 지금까지 진보 쪽 사람들은 보수 쪽 사람들에 대해 '근거 없이' 진보진영을 악의적으로 비판하는 몰상식한 부류들이라고 비난하곤 하였다. 이 경우 많은 경우는 사실이었다. 대개는 보수진영의 논객들이 보수진영 전체와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에 급급한 나머지 '충분한 근거' 없이 자신을 일방적으로 변호하거나 진보 쪽을 비판(사실상 근거 없는 비난)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는 보수 쪽 지식인이나 전문가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보수나 진보나, 그것이 기득권이든, 자신의 기존 신념이든, 또는 오래된 관성이든, 무엇이든 간에, 기존의 것을 지키려는 욕망이 개입되면 누구나 저지를 수 있는 오류임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비판적 지식인이나 전문적 논객들의 순기능은 세상의 잘못을 올바르게 지적하고, 취약한 부분을 미리 알게 함으로써 이를 교정하도록 하고, 기존의 것을 더 진보시키는 일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비판적 기능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들의 활약은 모두에게 유익하고, 이로 인해 사회적 편익이 극대화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충분한 근거와 자기 논리를 갖춘 '좋은' 비판일 경우에만 그렇다. 악의적 심성으로 상대방을 근거 없이 비난하는 '나쁜' 비판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 또, 이 정도의 악의적 비난은 아니라 할지라도 충분한 '근거가 없는' 비판, 또는 '과거의 관성'에 의한 안일한 비판도 상황을 나쁘게 만드는 데는 매일반이라 하겠다.
지난 7월 17일, 값비싼 민간의료보험에 가입하는 것 대신에 모든 병원비를 국민건강보험 하나로 해결하자는 내용으로 '건강보험 하나로' 시민회의가 출범하였다. 이 운동에 대해 진보진영 내부에서 일부 반대의견이 개진되었다. 필자를 포함하여 이 시민운동을 추진하는 사람들은 기업을 대표하는 전경련이나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외치며 친 자본 정부를 지휘하는 청와대가 강력하게 반대의견을 개진할 것을 기대하였다. 보수 세력과의 일전을 치를 각오로 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들은 조용하게 추이를 지켜보고 있는 중이다. 어떤 코멘트도 내놓지 않고 조심스러워한다. 국민이 돈을 더 내겠다는데, 정부가 나서 반대할 수도 없으므로 국민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이다. 허를 찔린 보수 세력은 우리 운동이 스스로 망하기만을 바라면서 속수무책으로 애간장을 태우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제기된 '건강보험 하나로'에 대한 진보진영 일부의 비판과 반대는 매우 중차대한 것이다. 여차하면 전경련과 청와대가 숨죽이고 지켜보며 기대하는 대로 진보진영 내부의 문제제기와 갈등으로 이 시민운동이 동력을 잃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진정으로 요구되는 비판은 충분한 근거와 자기 논리를 가진 '좋은 비판'일 것이다. 결코 '나쁜 비판'이어서는 안 된다. 잘못된 근거나 과거의 관성에 의한 비판도 비판자 자신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우리 운동 전체에 악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건강보험 하나로 시민운동과 관련하여 진보진영 내부에서 제기된 비판은 적어도 특정 정파나 세력의 이익을 노린 '악의적' 비판과는 거리가 멀다. 이 점은 확실하다. 그럼에도 잘못된 근거나 과거의 관성에 의한 비판이 많았다는 점에서는 성찰할 부분이 있다 하겠다.
'건강보험 하나로' 시민운동을 반대한다는 한 지식인은 "국민건강보험료를 인상하는 방식에는 동의할 수 없으므로 국고지원을 늘려서 보장성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논리로 '건강보험 하나로' 시민운동을 비판하였다. 이 분이 이렇게 주장한 데는 '국민건강보험료 인상보다는 국고지원이 더 진보적일 것이라는 믿음'이 근저에 깔려있다. 과연 그런가?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국민건강보험료는 직장가입자 소득의 5.33%(이 중 절반은 가입자가, 나머지 절반은 고용주가 각각 부담)로 정률 적용되므로 월 소득이 천만 원인 사람은 매월 약 26만 원을 건강보험료로 내야하는데 비해, 월 소득이 백만 원인 사람은 약 2만 6천 원을 건강보험료로 낸다. 금액으로 보면 10배의 차이다. 소득에 따른 누진제는 아니지만 최소한 역진적이지도 않다. 소득에 비례적인 방식이다.
그렇다면, 이제 국고지원을 보자. 국고는 조세수입으로 충당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직접세가 전체 세수의 50% 정도를 차지하는데, 세계적으로 그 비중이 낮은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이마저도 현 정부 들어 직접세 중심으로 추진된 감세(개인소득세, 법인소득세, 종합부동산세 등)로 인해 직접세의 비중이 더 줄어들고 있다. 나머지는 간접세인데 알다시피 간접세는 부자나 빈자나 물건을 구입할 때 동일한 금액이 부과되는 역진적인 조세다. 직접세 중에서도 개인소득세와 같이 누진적인 부분은 대략 전체 세수의 25% 정도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직접세의 나머지는 금융소득 과세 등으로 건강보험료와 같은 방식의 소득 비례적인 정률 방식에 의한 것이다. 불행하게도 우리나라의 국고는 절반 이상이 소득에 역진적이고, 25% 정도만이 누진적이므로 전반적으로 볼 때 직장가입자 건강보험료의 50%를 고용주가 부담하는 현행 국민건강보험료 방식보다 더 누진적인 방식은 결코 아니다. 그러므로 국고가 건강보험료보다 더 누진적이고 진보적이라는 생각은 근거가 없는 '과거의 관성'에 의한 주장인 셈이다.
사실, 국고지원 방식은 국민건강보험료 인상 방식에 비해 우리나라의 조건에서는 훨씬 더 나쁜 결과를 빚게 된다. 첫째, 건강보험료는 '의료보장'을 목적으로 법적으로 설치된 사실상의 준조세로서 일종의 '건강보장 목적세'다. 이는 최근 진보진영에서 사회복지의 확충을 위해 설치하자고 주장하고 있는 '사회복지 목적세'와 그 성격이 같은 것이다. 그런데 기존에 존재하고 있는 이 목적세의 규모를 늘리는 데 반대하고 기존의 국고재정을 가져다가 의료보장에 사용하자는 것은 'GDP(국내총생산) 대비 정부재정의 크기'를 늘리자는 '복지국가 또는 사회진보'의 논리를 부정하고, 사실상 신자유주의 '작은 정부'의 논리 지지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우리는 지금 보편적 복지를 담당할 '더 큰 재정'을 가진 책임 있는 '큰 정부'를 지지해야 한다.
둘째, 국고를 의료보장을 위해 가져다 사용하겠다는 발상은 사회정책 전체의 입장에서 볼 때 매우 잘못된 것이다. 기존의 국고를 끌어다 사용하든, 증세를 통해 국고를 늘린 상태에서 이를 가져다 사용하든 간에 국고재정을 의료보장으로 가져오는 것은 우선순위에서 잘못된 것이다. 의료보장의 확충을 위해서는 기존의 국민건강보험료를 인상하여 필요 재원을 스스로 조달할 수 있는 훌륭한 별도의 재정기전이 존재하고 있고, 지금 노동시장의 양극화 해소를 위한 일자리 정책, 양질의 보편적 보육과 교육, 보편적 소득보장 등 역동적 복지국가를 위해 추진해야 할 우선순위가 높은 재정사업들이 수두룩하게 늘려있다.
셋째, 국고지원 방식에 의한 국민건강보험의 보장성 확충은 국민건강보험료 인상에 비해 현실적으로 실현하기가 매우 어렵다. 누진적 개인소득세 증세가 정답이겠으나 지금의 정치사회적 조건에서 이는 쉽지 않다. 그래서 사회복지 목적세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으나, 이 또한 우선순위가 높은 사회복지의 확충이라는 긴급한 용도에 머물러야 하며, 장차 정공법으로 누진적 증세를 추진하는 길로 가야 할 것이다. 더불어 강조하고 싶은 것은 '세금은 부담능력에 따라 누구나 공평하게 부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보편적 복지국가로 가는 길이다. 아무리 작은 수입이더라도 상징적 수준의 최소 세금은 내야 한다. 그래야 보편적 복지를 요구할 자격이 생기는 것이다. 소득 있는 모든 곳에 누진적연대적으로 세금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깨어 있는" 시민들로 넘쳐날 때 우리사회에서 비로소 보편적 복지국가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국민건강보험료 인상을 통한 보장성 확충 운동은 이러한 복지국가의 원리에 잘 부합한다.
▲ 간병인의 도움을 받고 있는 환자들. 사람은 누구나 환자가 된다는 사실은 우리를 불안하게 한다. 누구나 느끼는 불안이라면, 민간기업보다는 공적 장치를 통해 해결하는 게 더 합리적이지 않을까. ⓒ프레시안 |
이 주장은 얼핏 매우 급진적이고 계급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실은 진실에 매우 부합하는 것이다. 의료 등을 포함한 사회보장을 위해 부담하는 사회보장분담금의 GDP 대비 비율을 보면, 우리나라는 근로자가 GDP의 3%를 부담하고 고용주가 GDP의 2.1%만을 부담하는 데 비해, OECD 국가들 평균은 근로자가 GDP의 3%를, 고용주가 GDP의 5.5%를 각각 부담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고용주는 사회보장분담금을 다른 OECD 국가들에 비해 너무 작게 부담하고 있다. 결국, 자본에게 부담을 지우자는 이들의 주장은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들의 진보적 철학에도 충실한 것이다. 필자는 우리나라의 계급적 역관계에 따른 현실적 실현 가능성 때문에 이들의 이러한 주장을 수용하지는 않고 있지만, 언젠가는 이 주장을 앞장 서 관철해야 할 것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므로 이들의 비판은 충분한 근거에 입각하여 우리에게 성찰의 계기와 미래의 정책 방향을 제공하는 '좋은' 비판인 것이다.
또 일부 지식인과 논객들은 "현행 행위별수가제라는 낭비적 보수지불방식이 개편되지 않는 한 국민건강보험 재정의 획기적 확충을 반대"한다는 논리를 편다. 이것 또한 '나쁜 비판'에 속한다. 근거가 없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행위별수가제와 국민건강보험의 보장성 강화는 우리가 해결해야 할 별개의 정책과제들이며, 이 둘은 직접적인 관련성이 없다. 행위별수가제라는 낭비적 지출구조는 그것대로 고쳐나가면 된다. 이는 주치의제도 등 의료전달체계의 강화 기획과 함께 우리 시민운동이 지속적으로 추진해야 할 중요한 과제임에 틀림이 없다. 우리는 현행 행위별수가제라는 악조건 속에서도 국민건강보험의 보장성 수준을 획기적으로 확충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 실손 민간의료보험이 행위별수가제가 협주하여 국민의료비를 급증시키는 현재의 악성 구조를 개편하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의료비의 약 60%는 국민건강보험이 지불하고 있고, 나머지 40%는 환자 개인이 지불하는 사적영역이다. 선진국에 비해 후자의 비중이 너무 크므로 국민들이 의료비 불안을 느끼고 결국 값비싼 민간의료보험에 가입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나라 전체 가구의 80%가, 전국 성인의 70%가 민간의료보험에 가입해 있다. '건강보험 하나로' 시민운동은 국민건강보험의 보장성 수준을 획기적으로 높임으로써 경쟁관계에 있는 '실손'형 민간의료보험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도록 하자는 것이다. 즉, 실손 민간의료보험에 돈을 내는 것 대신 그 일부를 국민건강보험에 더 내자는 운동이다. 이것은 행위별수가제 논의와는 아무런 직접적인 관련성이 없다. 왜냐하면 국민건강보험이나 실손 민간의료보험이나 모두 현재 동일하게 행위별수가제로 의료보수를 지불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논의의 핵심은 행위별수가제 개편이 아니라 의료민영화의 핵심 사안인 실손 민간의료보험을 몰아내고 국민건강보험의 보장성을 획기적으로 높이자는 것이다.
현재, 의료비 불안으로 값비싼 민간의료보험에 마지못해 가입하는 보통 국민의 고통을 덜어주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의료민영화의 핵심요소인 '활성화된 실손 민간의료보험'이 국민건강보험을 급속하게 위축시키는 과정을 더 이상 방치해서도 안 된다. 그래서 우리는 조속히 국민건강보험 재정을 획기적으로 확충해야 한다. 실손 민간의료보험을 몰아내고 국민건강보험이 공적 의료재정 기전으로서의 역할을 전면적으로 수행하게 된다면, 행위별수가제가 존재하더라도 민간의료보험이 의료비 지불의 큰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 지금보다는 국민의료비를 훨씬 더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현재 행위별수가제와 실손 민간의료보험이라는 두 개의 낭비적 지출구조와 정면으로 대치하고 있는 바, 이 둘의 협주를 끝장내고 민간의료보험을 몰아낼 최선의 전략으로 '건강보험 하나로' 시민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의료민영화를 저지하고 의료공공성을 확장하기 위해서는 건강보험 하나로 시민운동이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류세력의 반대를 돌파할 엄청난 규모의 국민적 에너지가 요구된다. '건강보험 하나로' 시민운동이 기존 사회운동단체들의 연합방식이 아닌, 어렵지만 '풀뿌리 시민운동' 방식을 택한 이유다. 지금 전국적으로 광역단위 시민회의가 조직되고 있다. 머지않아 기초단위의 시민모임도 속속 결성될 것이다. 궁극적으로 보통 시민들이 이 운동의 중심 주체가 되도록 할 것이다. 우리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유권, 정치권에 이어 사회권의 보장을 요구함으로써 마침내 '시민권'을 완성하는, 그리고 '깨어있는' 시민들의 거대한 힘이 지역별로 네트워크 형태로 연결되고 모여지는 그런 시민운동을 설정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비판적 지식인이나 전문적 논객들의 비판자 역할도 계속될 것이다. 다만, 필자가 바라는 것은 충분한 근거와 정합성 있는 논리에 따른 '좋은' 비판을 통해 역동적 복지국가를 향한 우리의 진보역량이 더욱 성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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