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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지 1.6매로 무기징역 때린 엘리트 판사, 그리고 대법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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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원고지 1.6매로 무기징역 때린 엘리트 판사, 그리고 대법관 됐다

[기고] 영국에서 읽는 『반헌법행위자열전』: 서성, '보신주의자'의 성공 스토리

2026년 봄, 영국에서 『반헌법행위자열전』 2권을 펼쳤다. 서성(徐晟, 1942~) 항목에서 전직 대법관 박우동(1934~)의 말이 눈에 박혔다.

"사형 다음의 중형을 선고한 판결에 그렇게 아무 감정도 고뇌의 흔적도 느낄 수 없는 것은 처음 보았다. 그 재판장이라는 사람이 원망스러웠다."

한 대법관이 동료판사의 판결문을 보고 한 말이다. 그 판결문은 무기징역 선고 이유를 원고지 1.6매에 담은 것이었다. 재판장은 서성. 그리고 서성은 나중에 대법관이 됐다.

1942년 서울출생, 제1회 사법시험 수석합격, 대한민국 최고의 엘리트 법관

서성은 1942년 9월 6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외조부 이석구(李錫九, 1880~1956)는 동덕여대와 성균관대 설립에 기여한 교육운동가였다. 1960년 경기고를 졸업하고 서울법대에 입학했으며, 대학 1학년 때 4·19혁명 시위에도 참여했다. 1963년 고등고시가 사법시험으로 전환된 후 처음 시행된 제1회 사법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했다. 이 수석합격이 서성의 이력 전체에 따라다니는 수식어가 됐다. "최고의 엘리트 법관."

그런데 이 최고의 엘리트 법관이 남긴 판결문 가운데 무기징역 선고 이유를 원고지 1.6매에 담은 것이 있다. 1969년 서울민사지법 판사로 임용된 서성은 1971년 서울형사지법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공안사건 재판부에 배속됐고, 그때부터 1980년대까지 군사독재정권이 조작한 간첩사건들의 재판을 맡아 유죄를 선고했다.

세계사 속의 동류, '보신주의적 엘리트'들

영국에서 이 장면을 들여다보면 비슷한 유형의 인물이 떠오른다. 독일 법학자 카를 슈미트(Carl Schmitt, 1888~1985)다. 당대 최고의 법학자로 명성을 쌓았으나 나치정권이 들어서자 즉각 그 체제에 봉사했다. 그의 이론은 독재에 법철학적 정당성을 부여했다. 전후 법학계에서 고립됐지만 형사 처벌은 면했다.

흥미롭게도 안기부는 서성을 가리켜 "자신의 이미지 관리에만 치중해온 이기적인 성품"의 "보신주의적 인사"라고 평가했다. 자신들에게 충성한 판사를 '보신주의자'라고 평한 것이다. 안기부의 눈에도 서성은 신념으로 독재에 부역한 것이 아니라, 출세를 위해 독재에 협력한 사람으로 보였다는 뜻이다. 이것이 서성 이야기의 가장 씁쓸한 아이러니다.

1971년 서울대생 내란예비음모 사건, 협박전화를 받으면서도

서성의 이력에는 복잡한 면이 있다. 1972년 서울대생 내란예비음모 사건 배석판사를 맡았을 때 그는 공소사실이 조작됐다고 재판부 내에서 강하게 주장했다.

"이것은 조작한 사건이다. 민주화운동을 하는 것이다."

그 말이 도청돼 어머니에게 협박전화가 걸려오기도 했다. 그러나 그 용기는 일시적이었다. 서성은 미국유학 중 재임명 배제명단에서 빠지는 조건으로 민사법원으로 전보됐다. 체제와 타협한 것이다. 그리고 1980년대 서울형사지법 부장판사로 돌아왔을 때, 그는 간첩조작사건들을 줄줄이 유죄로 처리했다.

오주석, 고창표, 박박, 허철중, 네 명의 피해자, 모두 재심 무죄

서성이 재판장으로 유죄를 선고한 사건들을 보면 한 가지 패턴이 있다. 피의자들은 법정에서 고문사실을 폭로했다. 서성은 이를 묵살했다. 그리고 유죄를 선고했다.

오주석 사건(1983년). 안기부 수사관들이 58일간 불법구금 해 고문으로 허위자백을 받았다. 오주석은 법정에서 "비눗물을 코에 붓는 고문을 당했다"고 진술했다. 서성은 징역 10년을 선고했다. 2010년 재심 무죄.

고창표 사건(1983년). 예비역 중령을 고문으로 간첩으로 조작했다. 함께 기소된 김병주에게는 사형, 고창표에게는 징역 15년을 선고했다. 2012년 재심 무죄.

박박 사건(1984년). 재일한국인을 39일 불법구금 해 간첩으로 조작했다. 유죄 선고. 2012년 재심 무죄.

허철중 사건(1984년). 재일한국인 2세를 21일 불법구금 해 고문으로 조작했다. 허철중은 한국어가 서툴러 통역도 없이 재판을 받았다. 변호인은 "고문 이야기를 법정에서 하지 말라"고 했다. 서성은 징역 8년을 선고했다. 2012년 재심 무죄.

그리고 1986~1987년 광주고법 부장판사 시절 항소심 재판장을 맡은 정삼근 사건, 김양기 사건, 강희철 사건도 모두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됐다.

원고지 1.6매짜리 무기징역 판결문

1987년 강희철 사건 항소심 판결문이 문제다. 무기징역 항소기각 이유를 원고지 1.6매에 담았다. 내용도 바로 전의 김양기 사건 판결문과 몇 글자만 달랐다. 판결문을 복사해 단어 몇 개만 바꾼 수준이었다.

전 대법관 박우동은 이 판결문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사형 다음의 중형을 선고한 판결에 그렇게 아무 감정도 고뇌의 흔적도 느낄 수 없는 것은 처음 보았다. 그 재판장이라는 사람이 원망스러웠다."

다른 판사의 판결에 대해 언급을 극도로 자제하는 법원문화에서 이 발언은 극히 이례적인 것이었다.

1985년 김근태, 고문을 알고도 중형을 선고했다

서성의 반헌법 행위 가운데 가장 상징적인 것은 1985년 김근태(1947~2011) 사건 재판이다. 민청련 의장 김근태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이근안(1941~2016)에게 23일간 전기고문을 당한 뒤 기소됐다. 서울형사지법 합의11부 재판장 서성은 이 사건을 맡았다.

김근태는 법정에서 고문사실을 상세히 폭로했다. 서성은 뜻밖에도 이 진술을 제지하지 않았다. 김근태는 경기고 4년 후배인 서성이 부드럽게 재판을 진행하자 기대를 품었다고 회고했다.

"은근히 믿고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1986년 3월 6일 선고공판에서 서성은 김근태에게 징역 7년에 자격정지 6년을 선고했다.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이라는 진술을 외면하고, 안기부가 제출한 사상검열감정서를 증거로 채택했다. 특히 영국의 경제학자 모리스 돕의 책을 "국가를 이롭게 할 목적으로 소지"했다고 판시했다. 경제학과 출신 김근태가 소지한 경제학 교재가 간첩의 증거가 됐다. 재판은 2014년 재심에서 무죄가 확정됐다.

대법관이 됐다, '보신주의자'의 성공스토리

서성은 1997년 대법관에 임명됐다. 비슷한 시기에 정치판사로 지탄받던 박영무(1943~), 이철환, 정상학, 가재환(1940~2025) 등은 대법관이 되지 못했는데 서성만 됐다. 참여연대는 대법관 후보자 인준에 반대하는 성명을 냈지만 임명을 막지 못했다.

대법관 재직 중 그는 일부 의미 있는 판결도 내렸다. 교도소 수갑 채우기 불법판결, 영장실질심사제도 지지발언. 그러나 간첩조작사건 피해자들에 대해 한 번도 사과하지 않았다. 2003년 대법관 퇴임강연에서는 후배법관에게 이렇게 말했다.

"법관은 항상 용기를 가지고 정의의 편에 서야 합니다."

그 말은 후배가 아닌 과거의 자신에게 했어야 했다.

영국에서 2026년을 생각한다

영국에서 카를 슈미트는 법학교재에 반드시 나치부역의 역사와 함께 등장한다. 뛰어난 법률가가 독재에 봉사할 때 어떤 결과를 낳는지를 가르치기 위해서다.

서성은 제1회 사법시험 수석합격자였다. 그 지적능력으로 그는 조작된 사건의 허점을 충분히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보지 않았다. 안기부의 평가대로 그는 '보신주의자'였다. 자신의 이미지를 관리하면서 독재에 협력했다.

2024년 12월 3일 윤석열(1960~)의 비상계엄 선포를 영국에서 생중계로 보며 나는 서성을 떠올렸다. 가장 뛰어난 사람들이 권력에 봉사할 때, 그 피해가 가장 크다는 것을. 원고지 1.6매짜리 무기징역 판결문이 그것을 말해준다.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그리고 그 법정의 방청석에는 우리가 앉아 있다.

▲서성 전 대법관. ⓒ반헌법행위자열전

참고문헌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 2026, 『반헌법행위자열전 1-4』, 사회평론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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