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활동에서든 논쟁이 제기되는 건 좋은 일이다. 토론과정에서 서로의 논리가 다듬어지고 그만큼 요구의 현실성도 커질 것이다. 내가 판단하기에 '건강보험 하나로'를 둘러싸고 실제 논의가 필요한 논점은 다음 두 가지, '건강보험 재정확충 방안의 진보성'과 '보험료 인상의 실제 효과'에 관한 것이다.
보험료 지렛대 방식은 무상의료의 구체적 경로 제시
첫 번째 논점으로 '건강보험 재정확충방안'을 살펴보자. 왜 국고지원 확대를 요구하지 않고 보험료 인상을 통해 재원을 마련하느냐는 비판이 있다. 여기에는 국고지원이 세금을 재원으로 하고 정부를 직접 상대한다는 점에서 진보적이라는 전제가, 그리고 보험료 인상은 진보운동이 택하지 말아야 할 양보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나 역시 국고지원 확대가 갖는 진보성에 동의한다. 동시에 '건강보험 하나로'가 지닌 재정확충방안 역시 국고지원 못지않게 진보적이라고 생각한다. 국고지원 확대와 보험료 지렛대방식은 선악 이분법이 적용되는 상충 방안이 아니라 모두 진보운동이 선택할 수 있는 카드인 것이다.
건강보험에서 보험료는 소득에 따라 정율로 낸다. 직접세 구조를 지니고 있다. 여기에 직장가입자 보험료만큼 사용자 몫이 더해진다. 가입자의 정율 직접세와 사용자의 책임 몫이 더해지기에 일반 가입자의 입장에서 건강보험은 전체적으로 누진적 성격의 재정으로도 볼 수 있다. 조세수입의 절반 가까이를 간접세로 충당하는 국고보다 결코 못난 재정이 아니다.
게다가 보험료 지렛대방식은 보험료 수입만 확대하는 것이 아니라 국고지원액을 늘리는 이중의 효과를 담고 있다. 현행 국민건강보험법은 전체 보험료 수입액의 20퍼센트에 해당하는 금액을 국고로 지원하라고 명하고 있다. '건강보험 하나로' 사업이 실현되면 보험료 총액이 늘어나므로 이와 연동되어 국고지원액도 현행 5조 원에서 7조 원대로 늘어난다. 사실상 국고지원을 확대하는 방안이다.
무엇보다도, 보험료 지렛대 방식이 가지는 강점은 국민들에게 건강보험 제도 내부에서 보장성 확대를 달성하는 구체적인 경로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무상의료가 멀리 있는 것으로 생각했던, 국고지원의 장벽을 어떻게 허물지 난감해 하던 시민들에게 스스로 개척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한다. 풀뿌리운동에 있어서 이는 정말 중요한 요소다.
비판자들은 보험료 인상이 시민들을 뒤로 물러나게 할 것이라고 예상하지만, 오히려 난 보험료 인상이 대중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잠재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건강보험 하나로' 이야기를 들으면서 눈을 반짝이는 주위 분들을 통해 얻은 경험적 판단이다.
사회복지세 쓰임은 예산사업에 집중해야
일부 비판자들은 국고지원 확대를 위해 사회복지세를 신설하자고 한다. 나는 사회복지세 도입에 적극 찬성한다. 하지만 사회복지세와 건강보험 재정을 연계하는 순간 병원비 해결을 위한 해결고리가 외부에 놓이게 된다. 건강보험 보장성 의제가 보건의료제도 밖으로 분산되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
사회복지세의 쓰임새에 대해서도 신중한 논의가 필요하다. 오래전부터 세입과 세출을 연계하는 사회복지세 신설을 제기해 온 당사자로서 난 사회복지세의 쓰임새가 정부예산 사업에 집중되었으면 좋겠다. 보육, 주거, 기초생활 등의 복지는 국고 외에 다른 재정방안을 가지고 있지 않다. 진보운동이 사회복지세 신설 운동을 벌인다면, 사회복지세는 이 부문의 재정확충방안으로 명확하게 정리되었으면 한다.
건강보험이라는 자체 재정방안을 가지고 있는 보건의료운동까지 사회복지세를 언급하는 것은 지혜롭지 않다. 보건의료운동이 자신이 속한 부문을 넘어 국가재정에 대한 종합적 시야를 가졌으면 한다.
국고지원 확대 vs 보험료 인상 방식, 어느 것이 국가와 기업을 더 압박할까?
한편 정부를 상대로 하는 국고지원 요구와 비교해 보험료 지렛대 방식은 대정부 정치활동의 의미를 퇴색시킨다는 지적이 있다. 정부와 직접 상대하는 것이 진보성의 주요한 기준 중 하나인데, '건강보험 하나로'는 정부와 정면 대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과연 정부는 국고지원 확대 요구와 '건강보험 하나로' 방식 중 어느 것에 더 압박을 느낄까? 난 정부가 '건강보험 하나로'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할 것이라고 본다. 스스로 보험료를 더 내겠다고 덤비는 국민들이 더 두렵지 않겠는가? '건강보험 하나로'가 병원비 해결 전선에 국가를 실제 끌어낼 수 있기에 더 정치적이고 진보적일 수 있다.
한편, 내가 국고지원에 비해 보험료 지렛대론이 지니는 단점으로 인정하는 것은 저소득 계층에게 추가 보험료가 부가된다는 점이다. '건강보험 하나로'에 따른 보험료 인상액은 평균 1만 1000원, 계층별로 3000원에서 수십만 원에 달한다. '건강보험 하나로'가 보완책으로 하위 15퍼센트 계층에 대해 보험료 감면 및 대출제도를 마련했지만, 그래도 차상위계층에겐 월 5000원 이상 보험료 인상이 적용된다.
이 분들은 보장성 확대에 따른 본인부담금과 민간의료보험료 절감 효과를 강조하며 설득할 예정이다. 사실 저소득 계층 상당수가 민간의료보험에 가입해 있는 것이 우리나라 현실이다. 이 분들은 병원비 공포가 큰 계층이기에 무리를 해서라도 민간의료보험에 들고 있다. '건강보험 하나로'가 성사되면 누구보다 가계비를 실질적으로 절감하게 되는 분들이다.
재정방안 논점에 대한 나의 결론은 이렇다. 보험료 지렛대 방식은 재정구조의 진보성에서도 국고보다 뒤처지지 않는다. 병원비 해결 전선에 정부를 불러오는 압박도 만들어낼 수 있다. 무엇보다도 건강보험 보장성 확대를 위한 제도내부의 실현 경로를 구체적으로 제시하기에 풀뿌리 에너지가 꿈틀거릴 수 있다.
사실 여러번 이 주제로 비판자들과 토론을 벌였으나 서로 평행선을 달렸고, 사람마다 가치, 경험이 달라 앞으로도 이견을 좁히기가 쉽지 않을 듯 하다. 안타깝지만 어찌할 수 없다. 여전히 보험료 지렛대 방식이 진보적 방안일 수 없다고 확신한다면 계속 반대하시라. 만일 '건강보험 하나로' 방식도 진보적이라고 생각되면 대중적 검증을 받도록 실천을 허용해 주시라. 결국은 풀뿌리 서민들이 판결을 내릴 것이다.
▲ '건강보험 하나로'는 병원비를 해결하는 보건의료운동이면서, 진보의 권위를 만들기 위한 정치운동이기도 하다. ⓒ뉴시스 |
이미 의사들은 충분히 과잉진료하고 있다!
두 번째로 다루려는 논점은 '건강보험료 인상의 실제 효과'이다. 주위 분들이 가장 자주 묻는 질문이다. 1만 1000원이 그대로 의사들의 호주머니로 새버리면 어찌하냐고?
만약 현재 병원비 지급이 모두 건강보험 재정으로만 충당되고 있다면, 게다가 이 건강보험 재정이 부족해 의사들이 마음껏 진료하지 못하고 있다면 비판자들의 지적이 맞다. 건강보험이 병원비를 제대로 보상해 주지 않아 진료를 억제하고 있었는데, '건강보험 하나로' 덕택으로 건강보험의 지불능력이 개선되었으니 의사들은 이제 못다한 낭비진료를 적극적으로 벌일 것이다. 1만1000원이 허무하게 새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을 보자. 지금까지 우리 모두 의사들의 과잉진료 실태를 통탄해 오지 않았는가! 지금 의사들은 건강보험 재정 규모에 개의치 않고 마음껏 진료하고 있지 않은가! 어떻게 된 일인가?
건강보험 재정 규모가 진료량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 변수일까?
지금 의사들은 환자들이 어떻게 병원비를 조달하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다. 병원비를 지불하는 지갑은 건강보험만이 아니다. 의사들이 병원비를 청구하면 환자들은 건강보험 급여를 제외한 금액을 민간의료보험이나 본인부담금을 통해 지불하고 있다. 입원 환자들에게 보험회사 제출용 진단서를 작성하는 일이 주치의의 일상 업무가 될 정도이다. 전체 가구의 80퍼센트 이상이 하나 이상 민간의료보험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나라 보건의료체제에서 건강보험의 재정 규모는 의사들의 진료량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변수가 아니다. 건강보험 재정이 작든 크든, 환자들이 병원비 총액을 건강보험, 본인부담금, 민간의료보험 등 세 개 지갑을 동원하여 납부하는 한, 의사들은 마음껏 진료할 수 있다. 지금 그렇다. 행위별 수가제를 활용하여 충분히 과잉진료하고 있다.
'건강보험 하나로', 병원비 계산하는 세 가지 지갑 몫을 바꾸자는 것
이러한 상황에서 '건강보험 하나로'는 우선 병원비를 계산하는 세 개 지갑의 부담 몫을 바꾸자고 제안한다. 가능한 건강보험 몫을 늘리고 환자 본인부담금을 최소화하고자 한다. 민간의료보험조차 필요 없게 말이다. 논리적 수준에서만 보면, 지갑별 부담이 달라질 뿐 병원비 총액에선 변화가 없다.
물론 현실은 변화무쌍하다. '건강보험 하나로'로 인해 병원비 총액이 증가할 잠재성은 존재한다. 환자의 본인부담금 감소가 의사, 환자 양 주체에게 진료량을 늘리는 동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하지만 이미 과잉진료가 충분히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추가 낭비진료의 범위는 그리 크지 않을 것으로 판단한다. 세 개 지갑의 지불 몫을 바꾸어 병원비 불안에서 벗어나는 목표를 단념해야할 수준의 '추가 진료'는 아닐 것이다.
한편 '건강보험 하나로'로 인해 발생하는 총진료비 절감 효과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현재 의사들이 진료비 청구를 위해 국민건강보험공단(과 국민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보내는 자료는 급여 진료에 한정된다. 비급여 병원비 내역에 대해서 아무런 심사평가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비급여 진료가 통제의 사각지대에서 과잉진료의 온상이 되는 이유이다.
'건강보험 하나로'가 성사되면 비급여 진료가 급여로 전환되기에 의사들은 병원비를 심사평가받기 위해 모든 진료내역서를 공단에 제출해야 한다. 나는 이 과정에서 지금까지 남발되었던 과잉진료 일부가 절감될 수 있다고 기대한다. 우리가 심사평가 기능을 대폭 강화한다면 급여 진료 영역에서도 절감분을 만들어낼 수 있다. 사실상 모든 병원비를 지불하는 위치에 서게 된 건강보험은 당연히 심사평가 기능을 강화할 것이 분명하다.
1만1000원, 거의 보장성 확대로 사용될 것
지금으로선 의사·환자의 추가진료 동인와 심사평가체계 강화를 통한 진료비 절감분 중 어느 것이 클지 예단하기 어렵다. 양자 모두 진료비 심사평가체계를 얼마나 강화하느냐에 따라 효과가 달라질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일단 '건강보험 하나로'가 전체 진료비 총액에 미치는 효과는 중립적이라고 가정한다.
혹 누수량이 절감분보다 더 많으면 어찌하겠느냐고? 속은 상하지만, 그래도 '모든 병원비를 국민건강보험 하나로' 해결하는 성과를 생각하면 감내할만한 기회비용이라고 판단한다.
다시 강조하지만, '건강보험 하나로'가 여기서 멈추자는 건 결코 아니다. 병행과제로서, 행위별 수가제도를 포괄수가제로 전환하고, 긍극적으론 총액계약제 방식으로 나아가도록 힘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이를 위해 풀뿌리 에너지를 만드는 것이다.
'건강보험 하나로'는 진보의 혁신운동이다
지금까지 비판자들과 실제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두가지 논점을 살펴보았다. 이 글이 비판자들에게 얼마나 설득력을 지닐지 모르겠으나, 가능한 명확하게 나의 논리와 경험적 판단 등을 밝혔다.
어찌보면, '건강보험 하나로'는 지금까지 진보운동이 해왔던 활동 기준에서 '일탈'일 수 있다. 가입자에게 보험료를 더 내자고 제안하고, 우리에게 익숙한 사회운동단체의 연대체가 아니라 개인 풀뿌리망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어떤 토론회에선 찬반 양 측 모두 '건강보험 하나로'를 두고 우리나라 사회운동에 있어서 패러다임의 변화라고 칭하기도 했다.
그렇다. 패러다임을 바꾸자. 이 운동이 만약 '일탈'이라면 앞에 '혁신적'이란 형용사를 꼭 붙이고 싶다. 내가 이 운동에서 바라는 목표 중 하나가 '관성'을 넘어서는 진보운동의 '혁신'이기 때문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시 대중교통체계 개편으로 정치적 권위를 획득했듯이, 이 혁신을 통해 진보운동도 모델 사례를 만들자는 것이다. 나에게 '건강보험 하나로'는 병원비를 해결하는 보건의료운동이면서, 진보의 권위를 만들기 위한 정치운동이기도 하다.
오는 7월 17일 '건강보험 하나로' 시민회의가 출범한다. 1000명의 발기인들과 시민들이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출범 잔치를 벌일 것이다. 함께 가지 않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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