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내야 할 돈을 줄여 달라"라고 요구하는 운동은 쉽다. 그런데 '건강보험 하나로'의 요구는 반대다. 얼핏 이해하기 힘든 이런 모습 뒤에 있는 것은 절박함이다. 현행 국민건강보험 제도가 부딪힌 위기에서 비롯된 절박함 말이다.
국민건강보험, 독재가 낳고 민주가 키웠다
이걸 이해하려면, 현행 국민건강보험 제도가 만들어지기까지의 역사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건강보험(의료보험) 제도는 박정희 정권이 처음 도입했다. 우파 정권이 복지 확대 정책을 취한 사례다. 이후 꾸준히 개선돼 온 이 제도는, 1987년 민주화를 거치며 변곡점을 맞는다. 그 결과, 노태우 정부 시절인 1989년 '전 국민 의료보험'이 도입됐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국가들 중에서 전 국민에게 의료보험을 제공한 첫 사례다. 새로운 변곡점 역시 '정치적 민주화'와 맞물려 있다. 사상 첫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뤄낸 김대중 정부는 2000년 7월 오랜 숙제였던 의료보험 통합 작업을 마무리했다. 모든 국민이 공평한 혜택을 누리는 국민건강보험 제도가 완성된 것이다.
이후 7년 동안 국민건강보험 제도는 꾸준히 확대됐다. 노무현 정부 말기인 지난 2007년, 건강보험 보장성은 64.6퍼센트를 기록했다. 건강보험이 적용되는 급여 부문 의료비 가운데 64.6퍼센트를 건강보험 공단이 지급하고, 나머지 35.4퍼센트를 환자가 낸다는 뜻이다. 보장성 수준이 90퍼센트에 가까운 다른 OECD 국가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다. 또 국민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비급여 부문'이 광범위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환자의 부담을 실질적으로 줄이기는 아직 무리다. 그러나 복지의 불모지대라는 평가를 받는 한국 현실에선 상당한 성취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사회복지 영역과 비교하면, 의료 분야는 공공성이 상대적으로 높은 편이다.
올해로 33주년, 위기가 눈 앞에
하지만, 여기까지였다. 이명박 정부 출범은 보건의료 분야에서도 변화의 계기였다. 계속 오르기만 하던 건강보험 보장성이 아래로 꺾였다. 지금은 62퍼센트대다. 고작 2퍼센트 줄어든 게 그리 대수냐 싶기도 하다. 그렇지 않다.
한번 아래로 꺾인 그래프를 다시 꺾어 올리기란 쉽지 않다. 급격한 인구 고령화, 만성질환자 증가, 약값 상승 등을 고려하면, 보장성 수준이 50퍼센트대로 떨어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이렇게 되면, 삼성생명 등 민간보험사가 건강보험공단의 자리를 메울 가능성이 크다. 1977년 이후 꾸준히 개선돼 온 건강보험 제도가 한순간에 무너진다는 게다.
이런 위기감이 '건강보험 하나로'가 만들어진 배경이다. 보건의료와는 동떨어진 분야의 지식인과 활동가들까지 대거 이 모임에 참가한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기획재정부, 삼성…국민건강보험이 못마땅한 그들
그러나 '건강보험 하나로'가 풀어야 할 숙제 역시 만만치 않다. 우선 보수 진영, 그리고 상당수 의사들의 반발을 뛰어넘어야 한다. 건강보험 제도는 박정희 정권이 만들어낸 것이지만, 정작 '박정희 부활'을 꿈꾸는 이들은 이 제도에 적대적이다.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비급여 부문에서 높은 소득을 거두는 의사들 역시 현행 건강보험 제도를 못마땅해 한다. 그러니 건강보험을 확대·강화하자는 '건강보험 하나로'에 대한 시각 역시 고울 리가 없다.
기획재정부는 더 강력한 반대 세력이다. 건강보험 재정은 '5:5:2'(봉급생활자의 경우, 본인이 건강보험료로 5000원을 내면 회사가 5000원을 내고 정부가 2000원을 낸다는 뜻) 방식으로 마련된다. '건강보험 하나로'의 주장대로 직장인이 내는 보험료를 높이게 되면, 정부가 내야 할 몫 역시 같은 비율로 늘어난다. 그런데 현 정부는 4대 강 사업 등으로 재정을 대폭 지출한 상태다. 여기에 '부자 감세' 정책이 겹치면서, 재정 적자 폭이 커졌다. 그리고 이런 적자 폭은 계속 커질 전망이다. 기획재정부 입장에선, 정부가 건강보험 재정 지원을 늘려야 한다는 '건강보험 하나로'의 주장이 반가울 리 없다. 오히려 영리병원을 도입해서 기존 건강보험마저 규모를 줄이겠다는 게 기획재정부의 속내다.
삼성 등 재벌 역시 반대 세력이다. 1997년 외환위기, 2000년 벤처 거품 붕괴 등을 거치며 한국 경제는 급격히 활기를 잃었다. 그래서 새로운 투자처를 찾기가 쉽지 않다. 이른바 신성장 동력 또는 수종사업이 보이지 않는다는 한탄이다. 이들에게 손쉬운 선택은 공공 서비스 부문에 민간이 투자할 길을 여는 것이다. 이런 선택이 수출 증대 또는 국민 경제 전체의 규모를 키우는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은 낮다. 하지만 안전한 수익이 보장된다는 점이 자본을 굴리는 재벌에게는 매력이다. 민간의료보험, 영리병원 등 의료 관련 서비스 부문은 특히 그렇다. 인구 고령화, 환경오염 등으로 인해 향후 의료 수요가 폭증하리라는 점이 이유다. 이들에게 국민건강보험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치워야할 걸림돌이다. 그러니 국민건강보험을 오히려 강화하자는 '건강보험 하나로'가 곱게 보일 리 없다. 재정 적자로 골머리를 썩이는 기획재정부와 재벌은 이 대목에서 이해관계가 겹친다.
이처럼 정부와 재벌, 보수 진영과 의료계 주류는 저마다의 이유로 '건강보험 하나로'에 적대적이다. 이런 정서는 '건강보험 하나로' 준비위원회 발족 하루 전에 맞춰 나온 <조선일보> 기사에 잘 반영돼 있다. 지난달 8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꿈같은 복지' 내미는 진보 진영" 기사를 보면, '건강보험 하나로'의 주장에 '포퓰리즘'이라는 딱지가 붙어있다.
'건강보험 하나로'의 주장이 논리적으로 견고하기만 하다면, 이런 반발은 오히려 약이 될 수 있다. 대중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 '건강보험 하나로'는 보건의료 분야의 민감한 쟁점을 건드린다. 그래서 논란도 많지만, 성공했을 때 생겨날 변화의 폭 역시 크다. ⓒ뉴시스 |
그러나 진짜 어려운 숙제는 따로 있다. 진보 진영 안에서 나오는 비판이 그것이다. 우석균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실장이 지난달 <프레시안>에 기고한 "왜 월급쟁이만 1년에 30만 원씩 더 내야 하는가?"라는 글이 이런 입장이다.
비판의 표적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5:5:2'(봉급생활자의 경우, 본인이 건강보험료로 5000원을 내면 회사가 5000원을 내고 정부가 2000원을 낸다는 뜻)로 고정돼 있는 건강보험료 부담 비율이다. 봉급생활자가 내는 몫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정부의 몫을 높이자는 주장이 먼저 나와야 한다는 게 비판자들의 입장이다. 이런 주장이 빠진 채 진행되는 '건강보험 하나로' 활동은 봉급생활자에게 호소력을 갖기 힘들다는 것이다.
게다가 현 정부는 규정 상 내도록 돼 있는 '2'의 몫도 제대로 내지 않고 있다.(우석균 실장의 분석에 따르면, 정부는 지난해 4조8000억 원을 냈는데 이는 '2'의 몫인 5조2000억 원에서 4000억 원이 부족한 금액이다.) 또 정부는 4대강 사업 등에 막대한 재정을 쏟고 있다. 봉급생활자가 보험료를 더 내겠다고 하기 전에 엉뚱하게 낭비되는 정부 재정을 건강보험 재정 지원에 쓰도록 요구하는 게 우선이라는 비판도 함께 나왔다.
이런 비판에 대한 반박은 지난 12일과 13일 <프레시안>에 실린 오건호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정책협력위원의 글에 잘 담겨 있다. 오 위원은 이 문제를 '건강보험 재정확충 방안의 진보성'에 관한 문제제기로 받아들였다. 요컨대 '건강보험 하나로'의 주장이 '기득권층 및 그들에게 치우친 정부'와 '사회적 약자' 사이에서 어느 쪽에게 더 유리한 것이냐 라는 문제제기로 이해한 것이다. 기득권층과 정부에게 불리한 게 아니다, 또는 유리하다(진보적이지 않다)라는 게 비판자들의 주장이라면, 그렇지 않다(진보적이다)는 게 오 위원의 입장이다.
여기서 중요한 개념이 누진성이다. 정부 지원은 결국 국고에서 돈이 나온다는 뜻인데, 국고는 국민이 낸 세금으로 메워진다. 그런데 세금 가운데 절반 가까이가 간접세다. 그리고 간접세는 누진성이 없다. 기득권층이라고 해서 더 내고, 사회적 약자라고 해서 덜 내는 세금이 아니라는 뜻이다. 반면, 건강보험료는 직접세 개념에 가깝다. 수입이 많은 사람은 더 내고, 적은 사람은 덜 낸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건강보험 하나로'의 주장이 비판자들의 주장보다 더 진보적일 수 있다. 이게 오 위원의 입장이다.
그리고 오 위원은 정부가 국고지원 확대 요구보다 '건강보험 하나로' 방식에 더 압박을 느낄 것이라고 주장했다. 국고지원 확대 요구에 대해서는 "세금 더 낼 의향이 있느냐"며 정부가 맞받아칠 수 있지만, 국민이 스스로 돈을 더 내겠다면서 공공성 확대를 요구하는 것에 대해서는 정부가 할 말이 없다는 설명이다.
문제는 과잉진료, 대책은?
비판자들이 겨냥하는 다른 표적은 의사들의 과잉진료다. 국민이 건강보험료를 더 내고, 기업과 정부가 내는 몫도 같은 비율로 늘어나고, 그래서 건강보험 재정이 확대됐을 때, 그 결과가 반드시 보장성 확대로 이어지겠느냐는 질문과 맞물린 쟁점이다. 비판자들은 과잉진료가 통제되지 않는다면, 늘어난 재정 가운데 상당 부분이 병원의 매출로 옮겨갈 수 있다고 본다. 이렇게 되면, 건강보험 재정 확대에 비례해서 보장성이 증가하지 않을 수 있다.
따라서 비판자들은 의사와 제약회사 사이에서 오가는 리베이트에 대한 처벌 강화 및 약제비 인하, 과잉진료를 조장하는 행위별 수가제 폐지 등이 더 급한 과제라고 주장한다. 이런 과제가 먼저 해결되지 않으면, '건강보험 하나로'의 취지도 살아날 수 없다는 게다.
'건강보험 하나로'를 지지하는 이들 역시 의사들의 과잉진료를 막아야 한다는 점에서는 의견이 같다. 따라서 행위별 수가제 폐지를 주장한다. 그렇다면, 어디서 쟁점이 생기는 걸까.
오건호 위원은 의료비 지출 총액을 줄이는데 '건강보험 하나로' 방식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고 말한다. '건강보험 하나로'는 건강보험 재정을 늘려서 비급여 부문을 급여 부문으로 전환하자고 주장한다. 이렇게 되면, 과잉진료의 온상인 비급여 부문이 줄어든다.
급여 부문에 대해서는 의사가 진료내역서를 건강보험관리공단에 제출해야 한다. '건강보험 하나로'가 성공한다면, 사실상 모든 진료비를 지불하는 입장에 서는 건강보험관리공단은 낭비적 지출을 줄여야 한다는 압박을 받게 된다. 재정이 한정돼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심사평가 기능을 강화하게 되고, 급여 부문에서도 과잉 진료가 줄어든다. 이게 오 위원의 논리다.
열쇠는 국민의 관심
일각에서는 건강보험 재정이 확대되면 의사들의 보험수가 인상 요구도 더 거세질 것이라는 말도 나온다. 그러나 이런 요구에는 한계가 있다는 점은 의료계가 이미 알고 있다. 과거 의료계 주류는 이명박 정부에 거는 기대가 대단했다. 보험수가가 대폭 오르리라고 본 것이다. 그러나 현 정부 출범 뒤에도 보험수가 인상 폭은 의료계 주류의 기대에 한참 못 미쳤다. 적어도 선거로 구성된 정부라면, 일방적으로 의료계의 편을 들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따라서 '건강보험 하나로'가 성공할 경우, 그 결과로 생겨날 건강보험 재정 증가분은 보장성 확대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건강보험 하나로'가 성공한다는 것은, 건강보험 재정에 대한 국민의 관심이 매우 뜨겁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국민이 자발적으로 돈을 더 내겠다고 할 정도니 말이다. 이렇게 뜨거운 관심이 쏠린 돈을 병원 금고에 쓸어 넣을 만큼 '간이 큰' 정부는 존재하기 어렵다.
'건강보험 하나로'를 둘러싼 논란을 정리하는 열쇠는, 결국 국민이 쥐고 있다. 국민 다수가 "보장성만 강화된다면 돈 더 내도 좋다"는 입장에 동의한다면, 아무리 정교한 비판도 힘을 잃는다. 특히 천 원짜리 한 장이 아쉬운 비정규직과 영세 자영업자가 동의한다면, 진보 진영 내부의 논쟁은 한순간에 정리된다. 반대로 이런 동의를 얻어내지 못한다면, '건강보험 하나로'의 주장은 그저 탁상공론으로 끝나게 된다.
병원 안 가는 사람은 없다…"문제는 정치"
이는 '건강보험 하나로'의 성패가 결국 '정치'에 달려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운동에 참가하는 이들 역시 이 점을 잘 알고 있다. 오건호 위원은 "'건강보험 하나로'는 병원비를 해결하는 보건의료운동이면서, 진보의 권위를 만들기 위한 정치운동이기도 하다"라고 밝혔다. 보건의료를 둘러싼 정치운동이 갖는 잠재력은 무궁무진하다.
모든 국민이 학교에 다니는 자식을 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무상급식은 한국 정치의 판을 뒤흔들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여러 번 병원 신세를 진다. 병원 치료비 영역에서 진보적 대안이 나온다면, 그리고 이런 대안을 실현하는 데 드는 비용을 기꺼이 지불하겠다는 이들이 곳곳에서 나타난다면, 그 때 생겨날 변화는 무상급식과 비교할 수도 없다. 성공하기만 하면, 판이 뒤집히는, 묵직한 운동이 첫 발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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