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시민사회에서는 건강보험의 보장성을 높이기 위한 전략이 무엇인가를 놓고 논의가 한창이다. "건강보험료를 1만1000원 인상하면 건강보험 보장성을 90퍼센트까지 높일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는가 하면, 다른 한 쪽에서는 "'국민부담 의료비 상한제'를 도입하여 질병과 의료비로 인해 가계가 파탄나는 상황을 종식시키자"고 제안하고 있다.
물론, 현재 건강보험의 상태에서 '보험료를 1인당 1만1000원씩 인상하면 건강보험 보장수준이 90퍼센트로 올라갈 수 있는가'에 대한 주장은 다소간 현실적 가능성에 관한 비판을 받고 있다. 여기에는 건강보험 지출구조가 개혁되어 낭비적 요인이 제거되어야 하고, 인상된 건강보험료가 전액 건강보험 보장성 개선에 사용되어야 하며, 신의료기술의 증가나 인구고령화, 만성질환자의 증가 등으로 인한 건강보험 재정 지출의 자연증가도 없어야 한다는 등 수많은 전제가 깔려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현재 건강보험이 안고 있는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화한 것이라는 비판과 함께 자칫 시민사회의 무책임성으로 비추어질 것을 염려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이런 판단에 입각하여 전국적으로 80여개의 시민단체, 보건의료단체, 노동단체와 정당이 참여하고 있는 "의료민영화 저지와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를 위한 범국민운동본부"에서는 '1만 1천원 보험료 인상'이라는 표현이 가진 문제를 인정하고 건강보험 보장성을 개선해야 할 목표를 "국민부담 의료비 상한제"로 두고 운동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특히 이를 위하여 국민과 의료공급자, 정부와 보험자 모두가 참여하는 대규모적인 사회적 합의를 추진할 것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시민사회 내부의 논의 상황은 외부에서 볼 때 다소 갈등과 이견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만 본다면 정작 중요한 것을 못보고 지나치는 것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이미 시민사회는 '건강보험 대개혁'을 위한 불을 붙여가고 있다는 것이며, 2012년 총선과 대선을 겨냥하고 있다는 점이다.
건강보험 수입과 지출 구조 모두 대수술이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시민사회 내부의 논쟁이 어떻게 진행되는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시민사회 내부의 논의는 표현상 강조점의 차이일 뿐 내용과 방법론상에서 차이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시민사회에서의 논의는 상당히 넓은 범위에서 공통된 인식과 방법을 전제로 하고 있다.
특히 접근방법에 있어서 무엇보다 먼저 건강보험 수입구조와 지출구조 양자에 대한 대개혁을 이루어야 한다는데 이견이 없다. 수입구조 개혁을 통해 건강보험 재정을 확충하고, 이를 효과적으로 사용해야만 건강보험 보장성을 개선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제도의 지속가능성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건강보험 수입구조의 개혁은 노인인구가 사용하는 건강보험 지출이 이미 30퍼센트를 넘어서서 빠르게 50퍼센트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상황에서 무척이나 간절한 과제다. 건강보험 재정에 대한 정부부담을 높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의료공급자나 시민단체 가릴 것 없이 터져 나오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또한 노동시장의 변화로 인해 건강보험 사각지대가 점점 넓어지고 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할 문제다. 건강보험료 체납으로 인해 건강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사각지대에 놓인 인구는 전체 인구의 10퍼센트에 육박하고 있으며, '고용 없는 성장'이 지속되는 한 이런 사각지대는 계속해서 넓어질 것으로 전망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문제는 건강보험 재정에서 조세의 역할이 커져야 함을 의미한다. 정부의 일반회계이든, 아니면 건강보험 사각지대 해소를 위한 목적세를 도입해야 한다. 그래야만 '보험료를 안냈다고 해서 혜택을 끊어버리는 보험방식'의 문제를 해결하고 실업과 비정규직 노동으로 인해 어려운 상황에 놓인 국민들도 건강보험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건강보험료가 건강보험 재정의 가장 중심이 되는 것임은 당분간 변함없는 사실이 될 것 같다. 현재 건강보험 수입의 87퍼센트가 국민이 직접 납부한 보험료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비율이 다소 낮아지더라도 상당한 기간 동안은 '보험료'가 보험재정의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건강보험료에 있어서도 개혁이 필요한 지점은 물론 있다. 경제적 능력에 따라 건강보험료를 보다 공평하게 부담하는 방식으로 개선해야 할 과제가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건강보험은 현재 '임금소득'에서 금융소득을 비롯한 '모든 소득'에 대하여 부과하도록 하며, '소득'을 가진 사람이 '건강보험 피부양자' 기준을 악용하여 무임승차하는 사례가 없도록 해야 한다. 또한 사실상 부자에게 보험료를 감면해주는 제도인 '보험료 상한제'를 폐지하고, 저소득층 보험료를 낮추어 주어야 한다.
건강보험 지출 구조를 개혁하기 위한 과제 역시 한두개가 아니다. 현재와 같은 구조는 의료공급자가 건강보험 재정에 대해 전혀 의식하지 않아도 되며, 오로지 자신의 수익 극대화를 위해 애쓰기만 하면 된다. 이러다보니 건강보험 지출이 매년 13퍼센트씩 늘어나는데 한몫하고 있는 현실이다. 그런데도 의료계가 스스로 건강보험 재정의 효율적 사용에 기여하기 위하여 낭비적 요인을 줄일 수 있도록 참여하는 효과적인 제도는 거의 없다. 이러다보니 건강보험 재정을 늘려봤자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비난만 듣고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총액예산제와 입원서비스에 대한 포괄수가제 확대, 그리고 주치의제와 같은 제도를 도입하여 의료서비스의 질을 유지, 개선하면서도 건강보험 재정 지출의 증가율을 낮추어 제도의 효율성을 높여야 한다.
'의료비 폭탄'을 맞을 것인가? 건강보험의 대개혁을 이룰 것인가?
이처럼 건강보험의 개혁과제는 산적해 있다. 하지만 문제는 이런 과제를 천천히 풀어가도 괜찮은 그런 일상적인 시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지금 이대로 간다면, 건강보험 재정은 작년(2009년) 30조 원에서 2014년 50조 원이 되고, 지금부터 10년뒤인 2020년에는 100조 원에 육박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야말로 '의료비 폭탄'이다. '건강보험 제도의 지속가능성이 문제가 된다'고 얌전하게 말하기엔 문제가 너무나도 심각한 수준이다.
결국 건강보험이 안고 있는 문제는 이제 시간을 다투는 문제로 보아야 한다. 지금 당장의 문제가 아니라고 눈감아 버릴 수 있는 그런 문제가 아닌 것이다.
이런 점에서 '건강보험 대개혁'의 과제는 '무상의료를 추진하려는 좌파의 시도' 쯤으로 간단히 여겨져서는 안된다. '무상급식'에 이은 '무상의료'의 대공세로 보는 것도 문제의 본질과는 거리가 멀다.
건강보험 재정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며 제도의 존재를 위협하고 있는데 아직도 의료비 때문에 자살하거나 집안이 파탄나 빈곤층으로 추락하는 상황이 공존하고 있는 현실의 문제를 풀어내야 한다. 이것이 시민사회가 던지고 있는 '건강보험 대개혁'의 핵심인 것이다.
'의료비 폭탄'을 맞을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건강보험 대개혁을 성공시킬 것인가? 이것이 우리 코앞에 닥친 현실적 문제인 것이다.
▲ 간병인의 도움을 받고 있는 환자. 평범한 사람이 큰 병에 걸리면, 가계 파탄을 감수해야 한다. 이런 상황을 바꿔내려면, 건강보험의 보장성을 대폭 높이는 개혁이 필수적이다. ⓒ프레시안 |
건강보험 대개혁 논의, 이렇게 시작하자
정부와 정치권, 건강보험공단과 의료공급자는 이제 시민사회의 이와 같은 제안에 귀 기울여야 한다. 여기에 '좌파' 딱지를 붙이고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면, 매우 어리석고 무책임한 행동으로 평가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팔짱끼고 지켜보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다들 관심을 보이면서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누구도 나서지 않는 상황에서 막막한 상황이다. 이에 대해 자칫 이러다가 우리 사회가 지금의 기회를 놓치는 것이 아닌지 우려가 되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논의를 다음과 같이 시작하자고 제안해 본다.
1) 정부와 정치권, 건강보험공단과 의료공급자 등 광범위한 사회적 차원에서 건강보장 제도의 궁극적 목표에 대해 '먼저' 합의하자. '건강보험 대개혁'의 목표를 어떤 질병에 걸려도 국민이 부담하는 의료비가 연간 100만 원을 넘지 않는 것으로 하자. 질병과 의료비로 인해 가계가 파탄나고 빈곤층으로 추락하는 것을 막는 것을 목표로 합의하자.
2) 이를 추진하기 위해 건강보험 재정을 빠른 시일내에 크게 늘려야 한다는데 합의하자. 단, 건강보험 재정을 확충하기 위하여 건강보험료 인상 뿐만 아니라 정부부담의 확대나 목적세의 도입 등 여러 방안에 대해 열어두고 검토하여 합의를 만들자.
3) 건강보험 재정 지출의 낭비적 요인을 제거하고 효율적인 재정활용을 위한 제도적 방안을 마련하자. 또한 이와 연관하여 의료기관과 의료인에 대한 적절한 수준의 수입을 사회적 차원에서 보장하는 방안을 만들고 합의하자.
4) 이상의 논의를 책임있게 추진하기 위하여 국회 산하에 기구를 설치하자. 이 기구에는 정부와 의료공급자, 보험자, 시민사회, 노동계 등이 폭넓게 참여하여 실질적인 사회적 합의를 만들자.
지금의 상황은 흔히 말하는대로 '위기인 동시에 기회'이다. '의료비 폭탄' 앞에 서 있는 위기인 동시에 '건강보험 대개혁'의 화두를 시민사회가 먼저 꺼내들고 제기하고 있어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수도 있는 기회이다. 여기에 국민들은 의료비가 민간의료보험 필요없이 건강보험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해결될 수 있는 제도를 지지하는 여론도 확산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정부와 의료공급자, 정치인은 시민사회가 만들어 놓은 지금의 상황과 여건을 사회적으로 받아 안기 위한 자세를 보여야 한다. 보다 전향적인 자세로 화답해야 할 차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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