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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시위 보장한다던 경찰은 왜 그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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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평화시위 보장한다던 경찰은 왜 그랬을까?"

[현장] 제주 농민, 농기계 동원해 FTA 반대시위

지루하게 시간만 흘러갔다. 길목마다 전경버스과 트럭, 컨테이너가 지키고 있었다. 장애물이 나타날 때마다 농민들과 경찰 간의 승강이는 반복됐다.

매일 다니는 도로를 막는 경찰을 이해하지 못하는 농민들과 농민들을 '과격 시위대'로 간주하고 있는 경찰 사이의 인식 차는 바다보다도 넓어 보였다.

차량 시위 떠난 제주 농민들…막아선 경찰

지난 주말 제주로 건너온 원정투쟁단 대부분이 떠난 25일. 이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반대 시위의 주역은 감귤, 콩, 마늘을 재배하고, 한우와 돼지를 기르는 제주 농민들이었다.

이날 시위의 주제는 차량시위였다. 적지 않은 부채를 떠안으며 구입했을 트랙터를 앞세운 채 그 뒤로 '한미 FTA 반대'라고 적힌 노란색 깃발을 두 개씩 꽂은 소형 트럭이 따랐다.

차량은 제주도 북단에 있는 제주 시에서 출발해 동서 방향으로 나뉘어 이동한 뒤 한미 FTA 협상장이 있는 중문단지 외곽의 컨벤션센터에 만나는 것이 당초 계획이었다.

기자는 두 방향 중 제주시에서 서쪽 방향으로 이동하는 차량 행렬을 따라가기 위해 이날 오전 10시 제주시 부근에 있는 한림읍에 도착했다.

한림 한국농업경영인연합회(한농연) 사무실 앞에는 농민 20여 명이 바쁜 손을 놀리고 있었다. 평소에 애지중지 했을 각자의 소형 트럭에 깃발을 매달고 있거나 경찰의 길목 봉쇄가 있을 경우를 대비하느라 대책을 논의하고 있었다.

한림읍 농민들을 인솔하기로 한 전국농민회총연합 제주연맹 한림읍 의장인 김창준(40) 씨는 이날 차량 시위를 앞두고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전날 시위에서 목격한 경찰의 과잉진압에 대한 분노가 아직 가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제주 일주도로를 시원스레 내달리는 한미 FTA 반대 시위대의 차량 행렬. ⓒ프레시안

김 씨는 "제주는 큰 목소리 한 번 나지 않을 정도로 평화로운 마을인데, 육지에서 온 경찰들이 어떻게 제주에서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를 수 있나"라며 "오늘은 누가 뭐래도 컨벤션 센터까지 차량 시위를 하고야 말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김 씨는 컨벤션센터는 커녕, 출발 직후부터 경찰들과 대거리를 해야만 했다. 이미 출동한 경찰들은 순찰차 4대를 동원해 시위 차량의 행진을 가로막았다. 차량 시위에 나선 한림 농민들은 "시작도 안 했는데 길을 막는 이유가 뭐냐"며 거세게 항의했다.

한림읍 지구대 소속 경찰들은 평소에는 형님, 누님 하던 농민들이 거세게 몰아붙이자 난감한 표정을 짓고만 있었다.

"아저씨(경찰)들은 대한민국 국민 아니요? FTA 되면 농민들 다 죽는 거 모르요?", "우리가 낸 세금으로 아저씨들 월급 받는 거 아니요? 어제는 방패로 때리더니 오늘은 발걸음도 떼지 말라는 거요?"

항의가 이어졌다. 이 때 기자로 신분을 가장한 경찰 채증반이 현장에 있던 기자들과 농민들에게 발각돼 촬영 테이프를 빼앗기는 수모를 당하는 일도 있었다.

제주 일주국도를 수놓은 'FTA 반대' 깃발과 현수막

한 시간 여 승강이 끝에 결국 시위 차량은 한림읍을 떠날 수 있었다. 트랙터 한 대, 소형 트럭 20여 대가 뒤따랐다. 시위 차량은 제주 일주도로(12번 국도)를 시원스레 내달렸다.

기자가 탄 차창 밖으로 도로변에 무수히 달린 깃발들과 마을 입구마다 걸려 있는 현수막이 눈에 들어왔다. 깃발에는 '한미 FTA 반대', '한미 FTA 협상 중단' 등이라고 적혀 있었다.
▲ 농민들은 차량 시위를 막아선 경찰과 대걸이도 해보고, 트랙터로 미는 듯한 위협도 해봤지만 결국 트랙터를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경찰은 트랙터를 두고 '불법 시위 도구'라고 말했다. ⓒ프레시안

현수막에는 "제2의 IMF, 한미 FTA를 반대한다", "농민 다 죽이는 한미 FTA 협상 중단하라"는 등의 문구와 함께 '○○읍 농민회'라는 글씨가 적혀 있었다.

깃발과 현수막은 지난 5월 각 마을마다 꾸려진 '한미 FTA 저지 비상대책위원회'가 중심이 되어 지난달 달았다고 한다. 비상대책위원회에는 다소 성격과 노선이 다른 전농과 한농연 회원들이 함께 모였다. 한미 FTA 반대를 위해서는 작은 차이와 갈등을 넘어서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기자가 탄 시위 차량을 운전한 농민 이 모(49) 씨는 "지금껏 역대 정부가 농민과 농업을 위해서 한 것이 뭐가 있냐"면서 "이제는 한미 FTA까지 한다고 하니 제주 농민들이 뭉치지 않을 수가 있겠냐"고 말했다.

트랙터 내주고 또다시 출발

컨벤션센터까지 한달음에 내달릴 줄 알았지만 우리 경찰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제주도 서쪽 끝부분에 있는 신도3리 앞 길목에서 경찰은 또다시 봉쇄망을 편 채 시위 차량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씨는 "얼마나 많은 봉쇄망을 거쳐야 하나"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농민들은 차량에서 내렸다. 경찰과의 신경전이 다시 시작됐다. 한 시간 쯤 시간이 흘렀을까, 이번에는 경찰이 트랙터만 놔두면 소형 트럭은 보내주겠다고 제안해 왔다.

'트랙터가 없으면 김이 빠진다'는 의견과 '트랙터를 내주더라도 빨리 컨벤션센터까지 가야 한다'는 의견을 놓고 농민들은 갑론을박을 벌였지만 이내 트랙터를 내주기로 의견을 모았다. 갈 길이 아직 먼 데 신도3리에서부터 발이 묶이면 안 된다는 생각이 앞섰기 때문이다.

농민들은 트랙터를 도로 옆에 놓아둔 채 다시 트럭에 시동을 걸었다. 시간은 벌써 오후 한 시를 지나고 있었다.

제주에서 일어난 각종 개발 사업이 던진 상처

기자는 시위 차량을 바꿔 탔다. 이번에 탄 차량을 운전한 농민은 한우를 키운다는 김충희(43) 씨였다. 그는 제주에서 나고 자랐다가 육지에서 대학을 다닌 뒤 1991년부터 제주로 돌아왔다고 했다. 김 씨는 현재 제주 한농연 이사를 맡고 있었다.

운전을 하면서도 김충희 씨는 10여 년 동안 제주의 변모를 눈으로 지켜보면서 느낀 안타까움을 털어놨다. 어떤 이들은 '발전'이라고 부를 일들이 김 씨에게는 '파괴'로 다가오고 있었다.

"노태우 정권 들어서고 나서부터 제주에 수만 평짜리 고급 골프장이 들어섰어요. 골프장 들어와서 제주 관광산업이 부흥했는지는 몰라도 농민뿐만 아니라 제주 도민들의 생명줄과 같은 지하수가 오염되기 시작했습니다. 도민 전체가 반대를 해도 골프장은 계속 들어섰어요."
▲ 차량 시위에 참여한 트랙터. ⓒ프레시안

"수 해 전에는 탑동(지명) 매립에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졌어요. 자갈 해변을 매립한 자리에 대형 상가가 들어선 유흥거리를 만들자는 것이 제주도의 구상이었습니다. 제주의 자갈 해변은 매우 독특해서 우리나라에서는 쉽게 찾아보기 힘들어요. 그 아까운 곳이 매립돼 버렸죠, 뭐"

김 씨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대정리가 나타났다. 대정리는 현애자 민주노동당 국회의원의 고향이다. 김 씨는 이 마을에서 인물이 많이 났다고 말했다.

전농에도 많은 일꾼을 배출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첫 FTA인 한-칠레 FTA 협상 때나, 중국과 진행됐던 마늘 협상 때 가장 앞서 싸운 곳이라고 김 씨는 소개했다.

시위 차량 행렬의 맨 뒤 쪽에 대정리에 사는 농민들이 몰고 나선 트랙터 3대와 소형 트럭이 따라붙었다. 이제 소형트럭만 줄잡아 60대는 족히 넘어보였다.

지루하고 답답한 경찰과의 대치…"밀어버리고 갈까보다"

오후 3시가 조금 못 되었을 때 중문단지를 알리는 도로 간판이 보였다.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자 전방에 새까맣게 진을 치고 있는 경찰들이 나타났다. 짧지 않을 경찰과 농민들 간의 실랑이를 예고하고 있었다.

농민 대표자들은 경찰에게 길을 열어달라고 했다. 협상장으로 가는 것이 아니니 괜한 걱정을 하지 말라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이번에는 서귀포와 제주시 경찰서장까지 총출동해 농민들을 만류했다. 소형 트럭과 트랙터는 '불법 시위 도구'이기 때문에 길을 터 줄 수 없다고 경찰 책임자들은 말했다.

두 시간 여 동안 실랑이는 지루하게 이어졌다. 농민들은 지쳐갔다. 길 한 편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한 60대 농민은 "어처구니 없다"고 말했다. 하루에도 여러 번 트랙터를 몰고 다니는 길을 막아선 경찰이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고 그는 말했다.
▲ 경찰은 협상장 부근인 중문단지 입구 앞 도로에서 더 이상 길을 내주지 않았다. 그러나 차량 시위 행렬은 협상장으로 갈 계획은 애당초부터 없었다. ⓒ프레시안

이번에는 여성 농민들이 악다구니를 썼다. 한 여성 농민이 트랙터 위에 올라가서 "어제는 자식같은 어린애(경찰)들이 아버지뻘 되는 농민 얼굴을 방패로 내려치더니 오늘은 또 무슨 수작을 하려고 이렇게 버티고 길을 안 내주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농민들의 계속된 항의에도 경찰들은 요지부동이었다. 차량 시위 지도부들도 시간이 오후 5시를 넘어가면서 고민에 빠졌다. 지도부는 컨벤션센터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경찰의 봉쇄망을 피해 멀리 우회할지, 아니면 계속 대치를 이어갈지를 놓고 또다시 끝이 보이지 않는 토론을 이어갔다.

결국 지도부는 "도로를 우회하는 것은 경찰의 부당한 봉쇄에 굴복하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대치를 이어가기로 했다. 농민들은 지도부의 결정에 환호했다. 다시금 긴장 국면이 이어졌다. 시간이 흘러도 경찰의 태도변화가 없자, 농민들은 트랙터를 경찰 봉쇄망의 코 앞에까지 몰고 갔다. 인명 사고가 날 수도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농민들은 "밀어버리고 가자"라고 소리는 쳤지만 경찰을 위협하려는 의도 이상은 아니었다. 농민들이 트랙터로 겁도 주고, 악다구니도 써봤지만 경찰은 꿈쩍도 않고 자리를 지켰다. 어느새 제주에는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오후 5시 쯤 반대편에서 차량 시위대가 나타났다. 제주시에서 동쪽으로 출발했던 차량 시위 행렬이었다. 서쪽으로 출발한 차량 시위대가 중문단지 근처에서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합세하기 위해 달려온 것이었다.

이제 차량 시위대는 1km 남짓 거리를 두고 마주볼 수 있었다. 물론 그 사이에는 경찰들이 봉쇄망을 펴고 있었다. 서로를 멀리서 지켜본 채 차량 시위에 나섰던 농민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경찰과 몸싸움도 하고 노래도 부르고 구호도 외쳤다.

"왜 그들은 평화시위를 막았을까?"

20여 명의 여성농민은 A4 용지에 손으로 휘갈겨 쓴 손자보를 내걸기도 했다. "평화시위 막는 경찰 물러가라", "차량 시위 막는 경찰 명분없다" 등의 문구가 적혀 있었다.
▲ 즉석 손자보를 만들고 '평화시위'를 보장하라고 외치는 여성농민들. ⓒ프레시안

오후 6시가 다 되어서야 경찰들은 길을 열어줬다. 농민들은 컨벤션센터가 아닌 바로 그 자리에서 집회를 갖기로 했다. 길이 열리기를 바라며 애를 태웠던 농민들은 환호하며 박수를 쳤다. 집회는 촛불을 모두 들고 이날 차량 시위를 평가하는 발언을 이어 듣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집회를 마친 농민들은 "경찰은 왜 평화적인 집회는 보장한다고 하면서도 왜 진작에 길을 터주지 않았을까"라는 의문을 품은 채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문경식 전농 의장은 기자에게 "평화적인 시위를 가로막는 경찰이 애처로워 보이는 하루였다"고 넌지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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