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5월 20일, '경제 사범' 정몽구 현대기아자동차그룹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경제 범죄를 저질러 법정에 선 정 회장에 대한 파기환송심이 열린 날이었다. 정 회장은 선처를 호소하며 한마디 덧붙였다. "판결과 무관하게, 약속한 1조 원을 사회에 환원하겠다."
정 회장의 혐의는 비자금 조성, 횡령 등이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2000년부터 비자금(1034억 원)을 만들어 그중 696억 원을 불법 정치자금, 노무관리비, 개인 용도 등으로 쓰고 펀드 수익금을 빼돌리는 등 총 900억 원대의 회사 돈을 횡령하고 △부실계열사 유상증자에 현대차 등을 참여시켜 이들 회사에 2100억 원대의 손실을 끼친 것 등이었다.
유전무죄의 전형을 다시 보여준 사건이었다. 정 회장은 2006년 구속기소되지만, 한 달 만에 보석으로 풀려났다. 1심(2007년 2월)에서 징역 3년형이 선고됐으나 법정 구속은 피했다. 그리고 2심(2007년 9월)에서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과 사회봉사명령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정 회장은 다른 재벌 총수들과 마찬가지로 휠체어를 타고 링거까지 꽂은 채 법정에 모습을 드러냈다.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은 재벌 총수를 위한 맞춤 형량으로 불린다. 집행유예를 받으려면 징역 3년 이하가 선고돼야 한다. 그에 맞춰 재판부에서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하면 재벌 총수는 실형을 면할 수 있다. 이건희(삼성, 2008년)·최태원(SK, 2003년) 등 다른 재벌 회장들도 모두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받아 실형을 피했다.
정 회장 사건도 딱 이 수순을 밟고 있었다. 경제 범죄에 대한 따가운 여론을 의식해서인지, 정 회장과 그 아들인 정의선 씨(현 현대자동차 부회장)가 보유한 1조 원 상당의 글로비스 주식을 사회에 헌납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그런데 약간의 '문제'가 생겼다. 2심 재판부가 '회장님'을 지나치게 배려한 탓에, 원치 않게 논란이 커진 것이다. 불씨는 기상천외한 사회봉사명령 내용이었다. 이재홍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가 제시한 사회봉사명령은 △8400억 원의 사회공헌기금을 낼 것, △준법 경영을 주제로 2시간 이상 강연할 것, △국내 일간지와 경제 전문 잡지에 준법 경영에 관해 각 1회 이상 기고할 것이었다.
한마디로 죗값은 돈으로 치르면 되고, 회장님 체면을 손상할 수도 있는 '노역' 형태의 사회봉사는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 부장판사는 "재벌에 집행유예를 선고하는 것에 대해 많은 비판이 있는 것을 잘 알고 있다"며 "비판을 달게 받겠다"고 밝혔다. "재능과 재력이 있는 사람에게 재능과 재력을 발휘하게 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는 소신도 밝혔다.
사방에서 비판이 쏟아졌다. 이듬해 4월, 대법원은 2심 재판부가 선고한 사회봉사명령의 내용이 부적절하다며 파기환송했다. 파기환송심이 열렸고, 이때 정 회장은 "많이 반성했다"고 말했다. 그해 6월, 서울고등법원은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에 사회봉사 300시간을 선고했다. 직접 몸을 써서 사회봉사를 하라는 것으로 바뀌었을 뿐, '재벌 맞춤 형량'은 그대로였다. "사회공헌기금 출연을 대가로 실형을 면제해줬다는 점에서 돈으로 사법정의를 사고판 재판"(참여연대)이라는 등의 비판이 다시 쏟아졌다.
정 회장은 보육시설을 찾아 아이에게 우윳병을 물리는 등의 봉사활동을 했다. 곧바로,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표방한 이명박 대통령이 정 회장을 특별사면했다. 최종 판결이 내려진 지 고작 두 달 후인 2008년 8월의 일이다. 정 회장은 그렇게 '면죄부'를 얻었다.
▲ 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이 2008년 6월 24일 법무부의 사회봉사명령의 일환으로 충북 음성 꽃동네에 있는 영유아 보육시설 '천사의 집'에서 아이에게 우윳병을 물리고 있다. ⓒ뉴시스 |
유전무죄…돈으로 죗값 치른 '회장님', 반성은 없었다
'면죄부'를 얻기 전, 정 회장은 900억 원 상당의 글로비스 주식을 현대차 그룹 내 공익 재단인 해비치사회공헌문화재단(지금의 '현대차 정몽구 재단')에 출연했다. 2011년 8월에는 5000억 원 상당의 글로비스 주식을 '저소득층 자녀의 교육 기회 확대'를 위해 이 재단에 기부하겠다고 밝히며 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그렇게 4년의 시간이 흐르며, 정 회장의 경제 범죄는 세간의 관심에서 점차 잊히고 기부에 대한 찬사만 울려 퍼지는 듯했다. 정 회장은 법을 농락했던 과거를 정말 "반성"한 것일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비정규직 불법 파견 문제에서 이 점은 잘 드러난다. 사내 하청 노동자 불법 파견 문제는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정 회장의 경제 범죄가 드러나기 전부터 논란이 된 사안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비정규직 노동자 중 28명이 2003~2011년에 옥살이를 했을 정도다. 그리고 행정부도, 사법부도 현대차 그룹의 불법 파견 사실을 확인했다.
그런데 불법 파견을 철폐하라는 요구가 빗발쳐도, 귀를 막고 듣지 않던 정 회장과 현대차 그룹은 법원 판결조차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정 회장과 현대차 그룹은 7년간 싸워 대법원에서 '불법 파견' 확정 판결을 받아낸 최병승 씨에 대한 중앙노동위원회의 원직 복직 명령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최 씨에 관한 대법원의 최종 판결이 내려진 후에도, 정 회장과 현대차 그룹은 한동안 사내 하청 불법 파견 해소 방안을 내놓지 않았다. 그렇게 반년을 묵살한 후, 정 회장과 현대차 그룹은 사내 하청 노동자 3000명을 몇 년에 걸쳐 신규 채용 형식으로 정규직화하겠다고 밝혔다.
사측은 언론 인터뷰에서 "사내 하청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획기적 방안"이며 "사회적 책임을 다한다는 차원에서 결단을 내렸다"고 밝혔다. 대통령만큼이나 '비즈니스 프렌들리'한 일부 언론도 정 회장이 '통 큰 결단'을 내렸다고 칭찬했다.
하지만 정 회장과 현대차 그룹이 제시한 방안에는 그동안 불법을 자행하며 비정규직을 착취한 것에 대한 반성도, 법을 존중하겠다는 의지도 담겨 있지 않았다. 불법 파견을 인정하지 않는 것에서 이 점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판결 취지를 받아들인다면, 오랫동안 차별을 강요당해온 사내 하청 노동자들을 모두 정규직으로 한다는 원칙을 분명하게 해야 한다. 그러나 정 회장과 현대차 그룹은 그렇게 하는 대신, 최 씨와 같은 처지인 사내 하청 노동자 중 1900여 명이 제기한 불법 파견 관련 소송 결과가 확정될 때까지 대법원 판결 취지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최병승 씨도 복직시키지 않는 거대 재벌에 맞서 몇 년이 걸릴지 모르는 소송을 계속할 테면 해보라는 태세다. 그럴 용기가 없으면, 회사의 눈에 들어 3000명 안에 들 수 있도록 알아서 잘하라는 식이다. 이런 행태를 두고, 돈의 힘으로 법을 농락하는 유전무죄의 또 다른 형태라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 현대차 정규직 노조가 회사의 신규 채용안을 수용할 뜻을 내비치자 눈물을 흘리는 비정규직 노조 간부. ⓒ프레시안(김윤나영) |
또다시 돈의 힘에 밀리는 법
현대차의 사내 하청 노동자를 모두 정규직으로 전환하려면 2600억 원 정도가 필요하다고 한다. 추정 기관에 따라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2월에 대법원 판결이 난 직후 현대차 관계자가 언론에 밝힌 액수가 그러하다. 결코 작은 돈은 아니지만, 정 회장과 현대차 그룹의 상황을 감안하면 비용이 이번 문제의 핵심인 것 같지는 않다.
현대차 그룹은 지난해 순이익이 8조1049억 원에 이르는 등 최근 몇 년간 사상 최대의 호황을 누렸다. 올해 상반기 순이익도 4조9982억 원에 이른다. 이 덕분에 정몽구 회장과 정의선 부회장은 올해 초 678억 원의 배당금을 받았다.
2600억 원은 현대차 그룹의 지난해 순이익의 4퍼센트 미만이고, 정 회장 부자가 올해 받은 배당금의 4배에도 못 미친다. 정 회장이 저지른 경제 범죄의 규모보다도 작다. 그리고 정 회장이 '저소득층 자녀의 교육 기회 확대'를 위해 쾌척하겠다고 밝힌 5000억 원의 절반 수준이다.
정 회장은 자신이 어마어마한 부를 쌓는 데 밑거름이 된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그 '저소득층'에 해당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것 같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갈라놓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차별해 번 큰돈으로 모양새 좋은 장학 사업을 하는 것이 정당하냐는 항변이 일각에서 나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재벌이 저소득층에게 돈을 쓰겠다는 것 자체를 반대하는 건 아니지만, 차별과 착취에 시달린 비정규직의 원한을 돈에 담아 학생들에게 전달하는 게 정당한지는 따져봐야 한다는 말이다.
치열한 글로벌 경쟁, 그로 인한 생산 라인의 유연성 확보 필요 때문에 사내 하청 노동자를 일정 수준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이번 문제의 핵심은 정 회장과 현대차 그룹이 법의 정신을 존중할 뜻이 있는지 여부다. 정 회장이 "반성했다"는 자신의 말을 스스로 공염불로 만들고 다시 한 번 법을 끝까지 농락할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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