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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를 뺏기면, 삶도 뺏긴다"

[두물머리, 꼭 그래야 합니까 ·⑩] "국가는 우리의 삶을 '대신' 살아줄 수 없습니다"

마지막 4대강 사업 지역인 팔당 두물머리에 6일 예고됐던 행정대집행은 결국 잠정 보류 됐다. 하지만 언제든 다시 행정대집행은 진행될 수 있다. 정부는 유기농지로 사용돼 온 두물머리에 자전거도로와 공원을 만든다며 이곳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농민들에게 나가줄 것을 요구했다. 이미 다섯 차례 계고장을 보냈다. 몇 차례 충돌도 빚어졌다.

하지만 이미 30년 넘게 이곳에서 농사를 지어온 농민 입장에선 정부의 일방적인 요구가 답답하기만 하다. 생활 터전을 이루고 살던 곳에서 하루아침에 나가라고만 하는 정부의 방침을 받아들이긴 어렵다.

몇 차례 정부와 대화도 요구했고, 절충안도 제시했지만 정부는 묵묵부답이다. 되레 무단으로 토지 점유했다며 벌금을 부과하고 있다. 견디다 못한 11가구 농가 중 7가구가 대체부지와 저리 융자를 받고 떠났다. 나머지 4가구만이 이곳에서 농사를 짓게 해달라며 정부에 요구하고 있다.

물론 이들만 싸우고 있는 건 아니다. 이들 싸움에 오랫동안 지지와 연대를 보내온 천주교 신부들과 생협 조합원들, 시민이 함께 이곳을 지키고 있다. 일반 시민은 이곳에 직접 자신들의 텃밭을 가꾸고 있다. 불복종 운동이다.

이런 이들이 30일부터 두물머리에 유기농 텐트촌을 시작했다. (바로가기 ☞ :두물머리 유기농지 보존작전(두유작전)) 행정대집행 예정일이었던 6일을 넘겨서도 텐트촌을 운영하고 있다. 매일 새벽 6시마다 유기농 행진을 진행하고 밤 8시에는 유기농 토크쇼를 고정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편집자>


행정대집행법은 오랫동안 개발사업 현장에서 문제가 되어 왔다. 당연하게도 꾸준히 개정 요구가 있었고 2009년에는 국가인권위도 개정을 권고한 바 있다. 그러나 이 A4 한 장짜리 법조문은 1954년 제정된 이래 약간의 단어 수정을 제외하고는 한 번도 개정되지 않고 사람들의 삶터와 일터를 파괴해왔다.

그런데 최근 재개발 현장에서는 행정대집행이 그리 자주 이루어지지 않는다. 명도소송을 통해 재개발조합이 직접(물론 용역업체를 통해) 퇴거와 철거를 집행한다. 행정대집행법 본연의 목적이라 할 수 있는 위법한 건축물에 대한 철거 역시 최근에는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손해배상소송 등에 휘말리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형사고발을 하거나 이행강제금을 부과하는 식으로 강제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오히려 우리가 기억하는 행정대집행은 미군기지를 이전 확장하기 위해 2006년 이루어졌던 대추리에서의 행정대집행, 해군기지를 짓겠다며 2011년 강정마을을 짓밟은 행정대집행 등 대형 국책사업과 관련된 것이다. 과거 개발 현장에서의 행정대집행이 그랬듯 여기에는 언제나 무장한 권력이 등장한다. 국가의 이름으로 무장한 군대나 경찰, 법인(기업)의 이름으로 무장한 용역업체가 그것이다. 행정대집행 현장은 언제나 물리적 충돌을 통해 잔인함을 드러냈고 그것은 행정대집행의 폭력성을 현시했다. 그러나 물리적 폭력의 배후에 버티고 있는 행정대집행의 폭력성이야말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다.

▲ 두물머리 ⓒ프레시안(허환주)

흥미로운 법령해석 사례가 있다. 어떤 사람이 건축 허가를 받지 않은 채 자신이 살던 낡은 집을 헐고 새로운 집을 지었다. 그러나 같은 자리에 지었고 건축물의 기능이나 안전, 미관 등을 향상시키려는 건축법의 목적에 비추어볼 때 공익에 피해를 줬다고 볼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무허가 건축물이라는 사실만으로 행정대집행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해석이 있었다. 그런데 비슷한 질의에 대한 다른 답변이 있었다. 건축허가를 받은 후에 할 수 있는 행위를 허가 받지 않고 했으니 "그 자체가 법질서를 문란하게 한 것으로 공익 피해가 발생"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행정청은 이것을 시정해야 하고 집을 새로 지은 사람은 이에 순응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건축물의 개축이 건축법에 저촉되지 않고 단지 허가 절차만 소홀히 한 것이라면 건축허가를 추인할 수도 있다고 밝혔지만 이 해석은 행정대집행이 집행하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행정대집행은 말 그대로 누군가 해야 할 어떤 행위를 행정청이 '대신' 한다는 뜻이다. 행정청이라도 대신 하지 않으면 '심히 공익을 해할 것'이 우려될 경우, 행정청이 무언가 '대신'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사실 행정청은 언제나 무언가 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행정대집행법을 통해 행정이 대신할 수 있는 행위는 법에 의해 직접 명령되었거나 행정청이 법에 의거해 명령한 것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 행정이 무언가를 대신할 수 있는 권한의 근거는 그 행위를 명령한 법이다.

행정대집행법은 그 권한을 사용하는 절차를 다루는 법일 뿐이며 행정대집행을 통해 지키고자 하는 것은 법의 힘 그 자체다. 미군기지를 확장 이전하도록, 해군기지를 짓도록 명령하는 국가‧법의 힘이야말로 행정대집행이 집행하고자 하는 바의 실체다. 정부는 두물머리에서의 농사가 수질을 오염시킨다는 둥 하는 근거 없는 악담을 퍼부으며 행정대집행의 정당성을 설파하지만 국가가 행정대집행을 하는 것은 두물머리의 농민들이 국가의 명령을 거부하고 법의 권위에 도전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비롯된다.

두물머리에서 행정대집행이 가능한 것은 그 땅의 소유권이 국가에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원래 국유지든 문제투성이인 강제수용 절차를 거쳐 취득한 땅이든 그것에 대한 소유권이 집행의 권한을 보증해준다. 그런데 두물머리 농민인 최요왕 씨는 이런 제안을 한다.

"기본적으로 공공성을 가지고 있어서 개인의 재산권 행사는 없고 오로지 농사만 할 수 있는 농지가 필요하다. 소유권은 없고 경작권만 있는 형태 말이다. (…) 그래서 농지로 쓰이고 있던 기존의 국가소유(절대 정부 소유가 아닌)의 땅, 즉 하천부지가 중요했다."

이 말은 두물머리의 싸움이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국가가 법이 경계를 정한 소유권을 등에 업고 어떤 명령을 하느냐와 무관하게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은,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이다. 우리는 소유권이 삶의 근원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장소에 대한 싸움이다.

▲ 두물머리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농민들. ⓒ프레시안(허환주)

"장소를 빼앗긴다는 것은 삶을 빼앗기는 것"

신자유주의의 대표적인 경향 중 하나는 공간의 개발이다. 공간을 사유화하고 상품화함으로써 이윤을 창출하려는 시도는 전 세계 곳곳에서 저항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한국에서도 우리는 충분히 보아 왔다. 용산참사에서 응결되어 폭발한 재개발의 폭력이나 서울역에서 노숙인들을 강제퇴거 시킨 조치 등이 그렇다.

공간을 개발하지 않더라도 장소를 통제하는 것은 사람들의 권리를 빼앗는 유력한 수단이 된다. 국가‧법은 수많은 통치 제도들의 조합을 통해 우리가 갈 수 있는 장소와 방식을 제한해왔다. 직장폐쇄를 통해 쫓겨나고 극악한 폭력에 노출되는 노동자들을 보라. 어디에서나 장소를 빼앗기고 내쫓기는 사람들이 있다. 사람은 공중부양한 채로 살 수 없다. 이것은 아주 단순한 사실이다. 우리의 몸은 장소를 필요로 한다. 장소는 사람의 물질성으로부터 시작되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구체성이기도 하다. 장소를 빼앗긴다는 것은 삶을 빼앗기는 것이다.

두물머리의 유기농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많이들 얘기한다. 그러나 나는 그/녀들이 유기농을 하고 있지 않았더라도, 설령 그 곳에서 돼지를 키우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녀들의 장소를 국가‧법이 함부로 빼앗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미 상처 하나 없고 그림 같이 생긴 과일과 야채들에 호감을 느끼도록 학습된 우리들이 유기농의 수고로움과 고단함을 강요할 수는 없을 듯하다. 다만 고마워해야 할 뿐.

내가 두물머리에서 유기농업을 이어온 농민들을 지지하는 것은 유기농 자체의 가치 이전에 그/녀들에게 유기농은 그/녀들의 삶‧관계 자체이기 때문이다. 유기농은 그/녀들이 십 수 년 넘게 쌓아온 경험의 이름이자 전수되어야 할 이야기이자 타인과 관계를 맺는 계기이자 일구어온 삶이다. 나는 두물머리의 농민들이 유기농의 가치를 구구절절 설명해야 하는 것이 슬프다. 왜 누군가 자신이 살아가는 것의 의미를 사회에 호소해야 하는가.

모든 사람의 사적 삶은 언제나, 이미 공적이다. 두물머리 농민들의 유기농은 그/녀들이 이룩한 한 세계의 이름이다. 그리고 그 안에는 소위 찬성파 주민들의 공격적 현수막에 등장하는 '외지인'들도 있고 이따금씩 방문하는 지지자들도 있다. 그 세계 안에서 우리는 모두 당사자다. 두물머리 농민들의 저항은 유기농에 대한 권리 이전에 인간으로서의 평범한 권리를 지키기 위한 싸움이다. 그리고 그만큼에서 우리는 모두 당사자가 된다.

"국가는 결코 우리를 '대신' 살 수 없다"

사람은 어떤 장소를 통해 세계를 만들어간다. 그 세계는 누군가를 배제하거나 누군가에 의해 독점되는 세계가 아니라 끊임없이 관계가 만들어지는 세계다. 그렇게 살아가면서 부딪치게 되는 외부적 요건들에 대해 스스로의 주도권을 지키려는 힘이 인간의 존엄을 세우는 토대다. 그리고 그것이 인권이다. 국가‧법은 사람들을 농민이거나 시민으로 구분해 하나의 정체성과 하나의 장소만을 강요하고 무장하거나 무장하지 않은 권력을 통해 물리적 제재를 가한다. 그러나 우리가 만들어내는 세계는 그리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행정은 무언가 '대신' 집행할 수 있을지 몰라도 국가‧법은 결코 우리를 '대신' 살 수 없다. 그래서 두물머리는 행정대집행을 앞두고 전야제를 열고 불안과 긴장 속에서도 웃음과 생명의 힘을 피워낸다. 두물머리 다녀오는 길, 유난히 '양수'역의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한 생명을 길러내는 양수처럼 두물머리가 무언가 키워내고 있다면 그것은 삶의 연결들일 것이다. 우리의 몸은 언제나 땅을 읽어왔고 써왔다. 두물머리라는 장소에서 그 몸들이 만나고 있다. 행정대집행 따위로 그 세계를 파괴하려는 어리석은 시도를 지금이라도 그만두길 충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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