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이미 30년 넘게 이곳에서 농사를 지어온 농민 입장에선 정부의 일방적인 요구가 답답하기만 하다. 생활 터전을 이루고 살던 곳에서 하루아침에 나가라고만 하는 정부의 방침을 받아들이긴 어렵다.
몇 차례 정부와 대화도 요구했고, 절충안도 제시했지만 정부는 묵묵부답이다. 되레 무단으로 토지 점유했다며 벌금을 부과하고 있다. 견디다 못한 11가구 농가 중 7가구가 대체부지와 저리 융자를 받고 떠났다. 나머지 4가구만이 이곳에서 농사를 짓게 해달라며 정부에 요구하고 있다.
물론 이들만 싸우고 있는 건 아니다. 이들 싸움에 오랫동안 지지와 연대를 보내온 천주교 신부들과 생협 조합원들, 시민이 함께 이곳을 지키고 있다. 일반 시민은 이곳에 직접 자신들의 텃밭을 가꾸고 있다. 불복종 운동이다.
이런 이들이 30일부터 두물머리에 유기농 텐트촌을 시작한다. 두물머리 행정대집행 하루 전인 8월 5일에는 전야제를 열고 행정대집행이 진행되는 6일 새벽 6시에는 두물머리에서 유기농지 행정대집행 저지를 위한 행동에 돌입한다. 이후 오후 2시에는 두물머리 신양수대교 11번 교각 밑에서 '4대강 회복과 두물머리 보존을 위한 전국 집중 생명평화미사'를 진행한다. (바로가기 ☞ : 두물머리 유기농지 보존작전(두유작전))
이 과정 속에서 종교인, 학자, 일반 시민, 활동가 등이 <프레시안>에 글을 보내왔다. 왜 두물머리에 유기농지가 필요한지, 일방적인 4대강 사업의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릴레이 기고글이다. <프레시안>은 30일부터 연속해서 이들의 글을 순차적으로 싣는다. <편집자>
1
"국공유지를 불법 점유한 유기농민 4명과 두물머리를 '최후의 보루'로 삼은 일부 좌파단체 앞에서 국가 공권력이 무기력하게 멈춰 서 있다."
지난 6월 23일 <동아일보>(인터넷판)에 실린 '한강1공구 양평 두물지구'의 상황을 묘사한 기사의 한 대목이다. '한강1공구 양평 두물지구'라는 표현만큼이나 참 을씨년스러운 문장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무얼 하라는 것일까. 농민 넷뿐인데 그냥 밀어버리지 왜 그렇게 무기력하게 있냐고? 아마도 철거민들이 용산 남일당 망루에 올라가 우리 말 좀 들어달라고, 우리를 이런 식으로 내쫓아서는 안 된다고 말했을 때, 저 높은 분도 그렇게 말했을지 모르겠다. 법을 어기고 공권력 조롱하는 거 아니냐고. 왜 그렇게 공권력이 무기력하냐고. 그래서 그들은 결국 법을 구현했고 우리는 시신들을 안아야 했다.
따지고 보면 법(lex)도 일종의 언어(lexicon)이다. 그러나 그것은 '대화어'라기보다는 '명령어'다. 언어의 본질은 소통에 있지만 '법'을 맨 앞에 내세운다는 것은 언어의 중단, 즉 더 이상 대화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이야기를 나누지 않고 말을 독점하는 것, 듣기 없이 말하기만 하는 것. 이 정부는 출범 때부터 '법치'를 귀 따갑게 떠들었는데 아마도 처음부터 '불통'을 자임했던 게 아닌가 싶다. 그러나 생각해 볼 일이다. 언어가 언어 즉 소통이기를 중단하고, 정부와 공권력이 사람들을 추방하며 공동성의 중단을 내비칠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말이다.
▲ 두물머리. ⓒ프레시안(허환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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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물머리에서 철거명령을 거부한 채 농사를 짓고 있는 농부들이 지금 '불법경작자'인 것은 맞다. 하지만 어떤 점에서 이들은 불법을 저질렀다기보다 불법을 당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들의 농사는 합법이었다. 이들은 당국이 부여해준 '토지 점용권'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정부가 문제의 '4대강 개발'을 명목으로 이 '점용권'을 간단히 취소해버렸다. 농부들이 아무 짓도 하지 않은 채 '불법자'가 된 사연이다. 이처럼 범법자가 된 사연은 참 간단하지만, 이들이 거기서 합법적으로 농사를 지어온 역사는 그리 간단치가 않다.
두물머리 농지는 팔당댐을 만들면서 국가에 토지를 강제수용당한 농부들이 댐 건설 이후 새로 생겨난 토지를 가꾸면서 정부와 힘겹게 싸워서 얻어낸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합법적 경작권을 얻어냈다. 그리고 거기서 이 나라 근대 농업 역사상 처음으로 유기농업을 집단적으로 시도했다. 지금의 네 농부가 이어받은 것은 그 농부들의 권리이고, 그 농부들의 농사이자, 그 농부들의 싸움이다. 이것은 이제 4년이 된 정권이 자전거 도로로 간단히 덮어버릴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미국에서 '월가점거시위'를 목격하고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두물머리를 찾은 적이 있다. 그때 밭에 꽂혀 있는 푯말에서 인상적인 문구를 보았다. '불법경작단.' 전체 11가구 중 지난 해 7가구가 정부의 회유와 압박을 이기지 못해 떠났을 때, 두물머리 농부들을 지지하는 시민들이 '불법경작자'를 자임하며 그 땅에 상추를 심고 고추를 심고 토마토를 심은 것이다. "그들이 농부들을 불법경작으로 고발한다면, 우리 모두가 무수하고도 무고한 '피고'가 되자." 지난 4월에 '두물머리밭전위원회'가 출범했을 때 시민들이 선언한 문장이다.
이 무도하다 못해 불쌍하기까지 한 지금의 정부는 그 상추와 고추, 토마토를 심는 '불법적 행동'이 얼마나 무서운 의미를 갖는지 이해를 못하는 것 같다. '하천점용권'에 대한 법원 소송이 엎치락뒤치락 하는 가운데 대법원의 판결을 앞둔 상황에서 행정대집행을 지금 꼭 해야 하느냐는 물음에 당국자 중 한 사람은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농민들이 하천점용 소송에서 승소한다면 그때 가서 별도로 손해보상 소송을 내면 될 것이다." <경향신문>
'우리는 지금 철거할 거고, 너희가 법원에서 승소하면 그때 보상받으면 될 거 아니냐'는 식의 답변을 천연덕스럽게 내뱉을 수 있다는 게 정말 놀랍다.
3
두물머리에서 기꺼이 '불법경작자'를 자임하며 상추를 심고 고추를 심고 토마토를 심는 사람들을 보았을 때, 나는 작년 11월 17일 뉴욕에서 보았던 한 시위 장면이 생각났다. 뉴욕시 당국이 월가 점거 운동의 상징적 장소인 '리버티스퀘어(주코티공원)'를 기습 철거했을 때 이틀 뒤 수만 명의 뉴욕시민들이 맨해튼 거리로 뛰쳐나왔다. 평소 리버티스퀘어를 점거하고 있던 사람들은 수백 명에 불과했고, 정부는 이들 소수의 점거자들이 전체 시민들의 안전하고 쾌적한 공원 이용을 방해하고 있다고 주장했었다. 그러나 정작 시민들은 정부의 철거에 분노를 터뜨리며 도심으로 쏟아져 나왔다. 그날 밤 경찰이 설치한 대형전광판에는 도로에 내려선 사람을 연행하겠다는 문구가 번쩍였고 무장경관들은 수갑을 내비치며 시민들을 위협하고 있었다. 그때 예닐곱의 시민들이 천천히, 경찰에게 보라는 듯 도로에 내려섰다. 한 시민이 도로에 내려서면 그는 인도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나면 또다른 시민이 뛰어와 그 손을 잡고 도로에 내려서고 다시 인도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렇게 해서 그날 수백 명의 시민이 연행되었다.
시민 불복종이었다. 언뜻 보면 그들은 도로교통법을 위반한 '불법보행자들'에 불과하다. 하지만 시민불복종은 개별 법조항을 넘어서 더 근본적인 것에 대한 항의 행동이다. 앞서의 <동아일보> 기자는 '무력한 공권력'이라고 했지만, '공권력', '법의 힘'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가라는 물음을 우리는 던져 볼 필요가 있다. 법전에 써 있는 문장들은 그 '힘'을 어디서 가져오는 것일까. 그것은 그 법들을 떠받치고 있는 그 '무언가'로부터 나온다. 그 '무언가'를, 철학자 조르지오 아감벤은 '권위(auctoritas, authority)'라고 했다. 법에 '힘'을 줌으로써 법을 법(실정법)으로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그 법을 떠받치는 '권위'이다.
고대 로마에서는 원로원이 그런 힘을 가졌다. 원로원은 나라가 위험에 처할 때 '법을 중단시키는' 힘을 합법적으로 소유했다. 아감벤에 따르면 이렇게 비상사태에 처했을 때, 법의 효력을 멈추면서까지도 행사될 수 있는 이 권위가 평상시 '법의 힘'을 가능케 하는 근간이다. '권위'를 가진 사람을 로마에서는 '아욱토르(auctor)'라고 했는데, 이들은 딴 데서 힘을 빌어 오는 자들이 아니라, 스스로 힘을 창출할 수 있는 자들을 뜻했다(이 말들의 어원인 '아우게오(augeo)'는 '증가시킨다'는 뜻이다). 그들이 바로 최고권력자, 즉 주권자였다. 로마에서는 원로원이나, 그 이름이 각별한 아우구스투스 황제 같은 이들이 그랬다. 이 권위로부터 그 힘을 빌어 오지 못하면 법은 효력을 잃어버리고 정무관은 그 직위를 박탈당했다.
근대 사회는 시민들을 주권자로 내세우는 체제이자 시민들의 복종에 의존하는 체제이다. 그러므로 법에 대한 시민 불복종은 표면상으로는 개별적인 법조항 하나를 어기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법의 근간이 되는 권위에 대한 인정의 철회를 의미하는 것이다. 물론 법의 권위에 대한 인정을 철회해도 공권력이 행사하는 물리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권위를 박탈함으로써 공권력이 갖는 외견상의 힘은 그대로 있다. 경찰봉과 방패의 힘도 그대로이고 공사용 굴착기의 힘도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사라지는 것은 공권력이 가진 '공적 성격'이다. 그런데 그것이 사라진다면 우리는 공권력과 사적폭력을 구별할 수 없게 된다. 앞서의 뉴욕 시민들은 리버티스퀘어의 철거를 단행한 뉴욕시 당국의 행동에서 공적 성격을 박탈한 것이다. 경찰에 끌려가지만 그 철거를 공무집행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을 불복종을 통해 선언한 것이다. 그런데 공적 성격이 부인된 공권력이란 조폭 등 사적 패거리들이 휘두르는 폭력과 다르지 않다.
4
몇 주 전에 밀양에 갔을 때 주민들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송전탑 설치를 강행하는 한전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정부를 향해 한 노인은 내게 말했다. '이 정부가 제 나라 국민을 침략하고 있다'고. 용산의 철거민들도, 쌍용자동차의 노동자들도, 강정의 사람들도 마찬가지 심정일 것이고, 그들의 고통을 깊이 공감하는 많은 시민들 또한 그럴 것이다. 한 나라의 많은 시민들이 그런 감정을 느끼고 있을 때에도 정부가 '법'과 '공권력'에 대한 복종만을 요구한다면, 사람들은 정부에 부여된 '공공성'을 박탈하게 될 것이다. 즉 법에 힘을 주는 권위에 대한 인정을 철회할 것이다. 그 순간 정부는 형식상으로만 정부이고 실제로는 더 이상 정부가 아니게 된다. 시민들에게는 정부가 정부라기보다 제 집단의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일개 패거리로 비치는 것이다.
두물머리에서 나는 이것을 느낀다. 농부는 농부로 남기 위해 법을 어기는데 공동체와 생태라는 공공의 가치를 구현하는 것처럼 보이고, 정부는 법을 지키기 위해 공권력을 행사하는데도 건설업자들의 사적 이해에 복무하는 것 같은 느낌말이다. 지난 40년 간 합법적 점용권을 갖고 친환경 농사를 고민한 사람들에게 그 '점용권'을 간단히 빼앗아 범법자로 만들고, 그런 권리가 마구 허용될 수 없는 것임에도 마치 여기를 허용하면 전국적으로 난리가 날 것처럼 떠들어대는 것(그런 난리가 났을 거면 지난 40년간 이미 무수히 났을 것이다). 게다가 이곳 농부들만이 아니라 여러 시민들이 함께 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이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음에도, 자전거 도로와 잔디공원을 반드시 이곳에 깔아야 한다고, 그것도 조금의 우회조차 할 수 없다고 고집하는 것. 35억이라는 예산을 지금 당장 쓰지 않으면 이 나라에서 사라지는 듯 법석을 떠는 것(이 공사에 쓰지 않으면 국고로 들어가 다른 곳에서 시민들을 위해 쓰일 수도 있고, 최소한 예산을 아끼는 일이라도 될 터인데 말이다). 내 눈에는 이 모든 것들이 올해 임기가 끝나는 특정인과 이 사업에 관여하는 특수한 이해당사자들을 위한 것으로만 보인다.
정말 안타깝게도 이 정부는 법을 집행하면서 법의 근간을 허물고 공권력을 휘두르면서 그 공공성을 잃어가고 있다. 점차 많은 시민들이 그 권위를 부인해 가는데, 정작 정부와 법의 토대가 무너져 가는데, 그 위에서 칼춤을 추고 삽질을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두물머리의 네 농부는 비록 '합법적 점용권'을 잃고 '불법경작자'가 되었지만 여전히 농부로 남을 수 있다. 그러나 법의 이름으로 힘만을 과시하는 정부가 있다면 그 정부는 더는 정부로 남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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