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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수, 이재오 모두 '구로공단' 출신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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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김문수, 이재오 모두 '구로공단' 출신 아닙니까"

[도시, 욕망을 벗다③] 고향에 돌아온 교수, 차성수 금천구청장

2010년 6월 지방선거. 돌풍이 일었다.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에서 야권 자치단체장들이 대거 당선이 됐다. 토호들의 독무대 같았던 지방에서도 일부 지역은 주민들이 신선한 인물을 택했다. 그렇게 민선 5기 출범 1년이 지났다. '신선한 바람'이 계속되고 있을까. 지역에서는 적잖은 도전들이 이뤄지고 있지만 자치단체들은 주류 언론의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다. 프레시안이 그들을 만나기 위해 길을 나섰다. '할 말 많은' 그들에게서 새로운 실험의 현황을 들어본다. 프레시안은 일회성 기획에 그치지 않고 지속적으로 지방자치의 이슈를 들여다볼 계획이다.

세 번째 만남은 차성수 서울 금천구청장이다. '할 말'이 이렇게들 많은지 미처 몰랐다. 인터뷰 분량이 회를 거듭할수록 많아지고 있다. 그들이 할 말이 많은 만큼 들어볼 만한 말들도 많다. 금천구는 특히 이야깃거리가 많았다.

다음은 지난달 23일 진행된 인터뷰라 '수해'에 대한 주제는 빠졌습니다. 프레시안은 수해를 입은 금천구민 여러분께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편집자>

▲ 차성수 서울 금천구청장. ⓒ금천구청

#1. 금천을 읽는 두 개의 키워드

금천구는 서울의 서남쪽 끝에 있다. 동북쪽으로는 서울 구로구, 관악구와 붙어 있고, 서남쪽으로는 경기도 광명, 안양, 시흥과 맞닿아 있다. 금천을 이해하기 위한 두 가지 키워드가 있다. 하나는 '시흥.' 이 곳은 원래 경기도 시흥군의 주도였다. 지금도 가장 큰 주거 지역이 시흥동이고, 기본 30~40년은 산 토박이들이 많다고 한다. 1호선 '금천구청 역'도 과거 '시흥 역'이었다.

또 하나의 키워드는 '구로공단.' 지하철 2호선에 '구로디지털단지역'이 있고, 1·7호선에 '가산디지털단지역'이 있다. 원래 이 두 곳 모두 구로공단이었다. 구로공단에는 1,2,3단지가 있었는데, 1단지가 구로구이고, 2,3단지가 금천구이다. 면적과 입주 업체 수로 보면 과거 구로공단의 상단 부분은 금천구에 속해 있다. 지금의 가산동은 1995년 금천구가 구로구에서 분구되면서 가리봉동도 나뉘게 됐고, 금천구 쪽 가리봉동이 가리봉동의 '가'와 독산동의 '산'을 따와 가산동이 됐다. 따라서 금천의 역사는 시흥과 구로공단 두 축으로 이어져 온다. 차성수 구청장도 이 두 가지 축에서 인생이 시작됐다.

"아버지가 군목이어서 전방을 다닐 때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났죠. 여기엔 두 살 때 왔죠. 시흥초등학교를 나왔고, 스물여덟 결혼할 때까지 여기서 살았어요. 아버지가 여기서 목회를 한 40년 했죠. 잘 하셨어요. 금천이 원래 시흥 군청이 있던 곳인데, 일제시대에 지은 학교도 짓고 신사터도 있었죠. 제가 나온 시흥초등학교가 올해가 딱 100년 되는 해입니다. 106년 된 교회도 있구요. 아버지는 가난한 동네에서 목회를 하셨는데, 70년대에는 영등포 산선(도시산업선교회)을 공식적으로 후원했던 몇 안 되는 교회 중 하나입니다."

사회활동이 활발한 아버지를 두었기에 자식도 사회를 보는 눈이 남달랐을 것 같았다.

"이 동네에서 오래 살았고, 후배들도 많이 가르쳤어요.(웃음) 대학 간 뒤에는 노동야학도 하구요. 구로 쪽에서 가장 대표적인 운동권 교회 중 하나에서 야학한 학생들과 후배들이 한 30명 되는데 거의 구속됐었죠. 후배들 다 고생했는데, 그 때 두 사람이 '빵'에 안 갔어요. 한 사람이 저고, 또 한 사람이 노웅희예요. 노웅희는 80년대 전교조 만들어지기 전 Y사건이라고, 민중교사 사건으로 큰 시련을 겪었죠, 그에 비해 저만 탄탄대로 가서 교수도 일찍 되고 해서 마음에 큰 빚이 있죠. 지역과 후배들에게."

나이 서른에 인생이 갈렸다.

"대학 4학년 때 성북경찰서 잡혀가 있는데, 어머니가 오셔서 '군대 가라' 하시더라구요. 1979년에 군대에 갔어요. 제대하고서는 '학술운동'으로 가라고 해서 대학원에 갔죠. 박현채, 정운현 선생 등과 함께 한국사연구소라는 진보적 연구소 초기 활동을 했죠. 제가 노동팀장을 했었죠. 한 2년 활동하다가 어쩌다 교수가 돼버려 부산으로 내려갔습니다."(고려대 사회학과에서 석박사를 마친 그는 동아대 사회학과 교수로 살아왔다: 편집자)

▲ 금천구 관내도. 가산동이 옛 구로공단 지역이다. ⓒ금천구청
그는 최근 구로공단(서울디지털산업단지)을 위해 '지밸리(G-Valley) 녹색산업단지추진위원회'를 결성했다. 민간위원회로 꾸렸고, 위원장은 인명진 목사가 맡았다. '영등포 산선'의 산증인인 인 목사와 인연이 없을 리 없었다.

"70년대 중반부터 알았죠. 제 인생을 전환시킨 분 중 하나입니다. 대학교 1학년 때 인 목사께서 저를 청주의 정진동 목사에게 보냈어요. 빈민 체험 하라고. 한 달 정도 넝마주이를 했어요. 어떻게 보면 평탄하게 살 수 있었는데, 그 체험으로 바닥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었고, 그 때부터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만나게 됐어요. 인 목사가 YH 사건으로 구속됐다가 80년대 초 산선에도 못 돌아가고 온갖 압력을 받을 때 저희 교회에서 청년부를 지도했죠. 젊은 시절 몇 분의 스승이 있는데, 인 목사님도 제 삶에 영향을 미친 스승 중 한 분이죠."

80년대 이후 인 목사와 차 구청장은 다른 길을 걸었다.

"인 목사님과 방향이 조금 달라졌죠. 그렇지만 인 목사님은 한나라당 안에서 나름 중심을 잡아 주고 계시는 분이고, 같이 일을 해볼 만한 분이라고 생각했어요. 그 와중에 디지털단지에 역사박물관을 세우는 문제, 교통 문제, 노동자들 쉼터를 만드는 문제 등을 해결할 수 있고, 특히 1·2·3단지 기업인들이 갈라져 있는데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역량이 있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래서 구로공단에서 활동하고 역사도 알고, 무엇보다 이곳에 애정이 있는 사람이 누굴까 찾다보니 인명진 목사님이 괜찮다고 생각해서 지밸리 녹색산단을 부탁드렸고, 흔쾌히 승낙 해주셨어요."

그렇다면 디지털단지에는 현재 어떤 문제가 있는 걸까?

"구로공단에는 1,2,3단지가 있는데, 1960년대에 박정희 대통령이 서울에 국가산업단지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1단지의 가발, 의류 등 경공업 수출단지가 잘되니까 2,3단지도 만들었죠. 금천구 되기 전에는 다 영등포구였는데 구로동을 중심으로 구로구가 생겼고, 1995년에 금천구가 분구됐죠. 금천은 이 지역에 여기를 흐르는 시내의 이름이랍니다. 그 때 2,3단지가 금천으로 온 겁니다. 여기가 상처가 많은 곳이에요. 1세대 기업인들은 80년대 초까지 잘 나갔죠. 그런데 산업의 중심이 중화학공업으로 넘어가면서 경쟁력이 확 떨어졌고, 2세대 기업인들이 근근이 유지해어요. 황폐화 돼 가던 중에 IMF가 전화위복의 계기가 됐어요. 여기에 아파트형 공장이 들어서도록 허가 됐거든요. 아파트형 공장이 88동이 들어왔어요. 그 때 1단지에 산업단지관리공단이 들어왔는데, 1단지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2,3단지에서 산단공을 불신해 '가산디지털단지'라고 이름을 붙이고 독자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어요. 기업인들이 조직을 따로따로 만들어 갈라져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을 융합시킬 수 있는 힘이 필요했어요. 처음에는 지식경제부 고위직 출신을 영입할까 생각도 했지만, 인 목사님이 적합했죠. 지역의 역사도 잘 알고, 무엇보다 사적인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는 분이니까. 그리고 기업인과 노동자의 입장에서도 거부감이 없고."

▲ 1976년 퍼스트 레이디 시절 구로공단에 방문해 격려하고 있는 박근혜 의원. 박 의원은 물론 박정희 대통령도 수시로 구로공단을 방문할 정도로 구로공단은 1970대 국가 경제 성장의 주요 축이었다. ⓒ연합뉴스

차 구청장은 구로공단의 역사 복원에도 역점을 두고 있었다.

"한 때 운동을 하다 정치에 뛰어든 많은 이들이 구로공단에서 활동했던 추억을 갖고 있죠. 한나라당 김문수 지사, 이재오 의원. 민주당 한명숙, 이해찬 전 총리 모두 여기서 노동자들과 살면서 활동하거나 지도했던 던 경험이 있거든요. 진보신당 심상정 전 대표는 여기서 중요한 일들을 했던 사람입니다. 이 사람들을 다 모으는 게 목표입니다. 전태일 열사가 워낙 크니까 청계천이 노동운동의 중심이 돼 있지만, 70년대 중반부터 80년대 중반까지는 노동운동의 대부분이 구로공단에 모여 있었거든요. 인명진, 김문수, 심상정, 한명숙 등 모두 벌집이라는 쪽방촌에 살아본 사람들이예요. 3~4평 방에서 4~7명이 살면서 노동자들과 뒹굴며 몸으로 경험했던 사람들이 다시 오면 '이렇게 변했나' 감탄도 하고 그 시절 뭐 했는지 얘기도 하고 그래요. 그 역사를 복원시키고 싶은 생각을 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 의미를 후대에 물려줘야죠. 성공회대와도 그런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지밸리 녹색산단에는 현실적인 교통 문제, 화합 문제 등을 푸는 것 외에도 이런 의미가 담겨 있어요."

서울은 지난 10여 년 동안 뉴타운이다 재개발이다 해서 도시의 흔적 지우기에 여념이 없다. 추억마저 사라지고 있다. 지역이 갖는 역사적 특수성을 되살리려는 시도는 남달라 보인다.

"공장은 거의 다 바뀌었는데 아직 '벌집'이라고 불리는 쪽방촌들은 남아 있어요. 단독주택 한 채에 50가구가 살아요. 지하에 고시원처럼 문이 죽 늘어서 열 몇 세대. 일층에 열 몇 세대. 2층은 주인이 살거나 또 열 몇 집 씩 세를 놓기도 하고. 지금은 그 자리를 중국 동포들이 차지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게 고시원으로 개발되고 있거든요. 생활사를 보존해야 합니다. 상해에 가면 임시정부 건물을 보게 되는데 당시의 낡은 건물 그대로 입니다. 멋진 기념관을 새로 짓는다고 역사가 보존되는 건 아니거든요. 생생한 삶이 묻어 있는 흔적을 보존해야죠."

그런데 구청장이 직접 추진하지 않고 민간위원회를 만든 이유는 뭘까?

"우리 사업으로 꿰차는 순간 구청장이 뭐를 하려 한다는 생각에 정치라는 색안경을 끼고 보기 시작해요. 그래서 우리는 지원만 하는 겁니다. 디지털단지는 업종 자체는 미래적인데, 교통이나 문화적 환경 등은 엉망진창이에요. 역사 복원과 함께 녹색교통 체계나 IT 기술을 활용한 문화 프로젝트 등을 더해, 디지털단지를 과거와 현재, 미래를 총괄할 수 있는 지역으로 꾸렸으면 좋겠습니다."

#2. 분리된 도시

디지털단지는 하나의 특화된 산업단지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고 한다. IT 붐 초기 성공해 살아남은 소프트웨어 기업들은 강남을 지키고 있고, 방송통신 관련 IT 업종은 상암동으로 가고 있다. 그 외 전자·전기 쪽 IT 기업들과 애니메이션 관련 IT기업이 가산디지털단지로 모이고 있다. 인근 인천 남동공단, 안산·시흥의 시화·반월공단 등의 공장자동화 등 IT 기술 지원 업무의 중심지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장 동맥이 막혀 있다. 금천은 '길의 도시'다. 경부선 철도는 물론, 서해안고속도로-서부간선도로, 남부순환로, 시흥대로에 안양천까지 얽혀 있어 도시를 격자로 토막 내고 있다.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서울에 진입하면 가장 먼저 오른쪽에 눈에 띄는 유리 건물이 금천구청 청사다.

▲ '길의 도시' 금천. ⓒ금천구청
"가산에 일본, 미국의 자동차 부품 업체부터 우주선 만드는 업체까지 들어와 있어요. 엘지전자의 모바일 연구소도 여기 들어와 있어요. 엘지 모바일만 6개 빌딩에 7000명이고, 협력업체까지 합하면 9000명이예요. 솔직히 지방에서는 인력을 못 구한다고 해요. 수원만 해도 사람들이 안 가려고 한답니다. 그래서 기업들이 이쪽에 많이 오고, 나름 고급 인력이 모이는데 이들이 금천구에 살지를 않아요. 다 일산, 강남 가서 살아요. 일은 금천구에서 하지만 금천구민의 아이덴티티가 없어요. 반대로 금천구 사람들은 또 디지털단지를 남의 동네 취급하고. 서로 삶을 나누지 않죠. 이러한 분절만 극복하면 서울의 성장동력을 이끌 수 있는 유일한 지역이에요."

불만이 터져나왔다.

"서울이 모두 강남권으로 모아지고 있어요. 경부고속도로는 물론이고 광역철도망도 수서에서 출발하죠. 출구와 입구를 모두 강남으로 모으고 있는데, 강남에 도움이 될까요? 제가 금천구청장이라서가 아니라 결국 강남이 고비용 구조가 될 수밖에 없어요. 과거에는 서남권이 서울과 지방을 잇는 중심축이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철도나 도로 때문에 다 막혀 있어요. 공간이 분리돼 있어서 개발이 안돼요. 정치적인 얘기를 하자면, 강남 사람들이 서울시장이 돼서 그럽니다. 야당이든 여당이든. 이쪽에 와 본 사람들이 없어요. 여기에 삶을 담가본 사람이 없죠. 그러니 이쪽의 고통을 모르죠."

한 때 금천은 길 덕분에 서울의 입구이자 지방 사람들이 돈을 벌기 위해 몰리는 곳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은 그 길이 최대 걸림돌이 되고 있다. 길은 이중적인 공간이다.

"길의 중심에 있다는 건 스쳐 지나가는 곳이냐, 발전의 중심이 되는 곳이냐 두 갈래의 가능성 모두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산은 발전의 중심이 될 가능성이 될 조건이 충분하다고 봐요. 문제는 직장과 주거가 근접된 삶의 공간을 만드는 겁니다. 그래야 금천이 업그레이드 됩니다."

차 구청장은 길을 활용하기 위한 세 가지 길을 제시했다.

"첫째, 고학력 고임금 노동자들이 '이 정도 주거조건이면 괜찮다'는 주거 공간을 확보해야 합니다. 둘째, 가장 골치 아픈 건 교육입니다. 교육을 한 단계 높이지 않으면 주거 조건이 좋아도 안 옵니다. 셋째, 기존 구민들의 복지 안전망을 구축해야 해요. 그래야 디지털단지와 주민들이 융합이 됩니다. 그 때 비로소 길이 방해가 아닌 사람이 모이고, 또 외부로 뻗어나가는 통로가 되는 거죠."

결국 분리된 가산디지털단지와 금천구 주거지역의 융합 문제가 가장 큰 고민인 셈이다.

"제가 구청장이 되고서 놀란 것 중에 하나가, 구청 공무원이 1000명인데, 디지털단지 가서 입주자들 만나는 직원이 과장도 아니고 팀장 딱 한 명이더군요. 그것도 1년에 한두 번 가서 밥 먹는 게 다 더라고요. 그나마 자주 가는 직원은 건축·도로 허가 관련 업무가 다예요. 금천구민들에게 디지털단지는 '남의 동네'였던 거죠. 이렇게 분절돼 있고 신뢰할 수 없으면 같이 못 가거든요. 전 2주에 한 번씩 가서 아파트형 공장 한 동씩 면담을 합니다. 제가 뭘 해결해줄까 묻습니다. 구청장이 전부 다 해줄 수 없다는 걸 입주자들도 압니다. 그래도 구청장이 자기들의 목소리를 들어준다는 노력에 신뢰가 생기는 거죠. 신뢰가 생기고, 역량을 키워주고 지역과 결합시켜주는 게 구청장의 역할이겠죠."

#.3 토박이와 텃세

서울의 많은 구청장들이 전임 구청장 시절 추진되다 지지부진한 뉴타운·재개발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금천구는 어떨까.

"서울의 아파트 거주율이 60% 정도 됩니다. 그런데 금천이 28%입니다. 아파트가 거의 없고 대부분 단독주택이죠. 그나마 10년 전에 7000세대 대규모 단지가 들어와 이 정도 비율이 되는 겁니다. 주민들이 가장 괴로워하는 게 주차 문제예요. 주거환경이 열악한 곳이 많아요. 서울 시내 다른 지역은 아파트만 짓지 말고 단독주택 택지를 서울시의 휴먼타운 사업 등과 연계해 유지할 필요는 있어요. 그런데 금천은 너무 낡아 리모델링할 만한 여건이 안 돼요. 어느 정도 아파트가 더 들어와 주거 환경을 개선할 필요는 있어요."

ⓒ금천구청
그럼에도 불구하고 골칫거리는 남아 있었다.

"군부대가 있던 터가 개발되고 있는데, 전임 구청장 시절에 LH공사에서 빚이 많아 시행을 못 하겠다고 시행을 미루다가, 선거 임박해서 전임 구청장과 MOU를 바꿨는데 세입자 문제를 구청이 계획하고 시행하라는 조항을 넣은 거예요. 선거가 임박했으니 전임 구청장은 울며 겨자 먹기로 해줬겠죠. 그런데 시행사가 해야 할 일을 구청이 해결해주는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구청이 임대아파트 입주권을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밖에 재개발 지역이 몇 군데 있는데 다들 조합 구성 단계이거나 추진위 설립 정도의 단계예요. 부동산 가격이 하락하면서 속도가 더뎌졌어요.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위해서는 4~5년 걸릴 것 같아요. 그래서 시간적 여유는 있어요."

더 큰 문제는 지역 주민들간의 융화 문제인 것 같았다. 금천은 시흥 시절부터의 토박이 비율이 상당히 높은 지역이면서도 전셋값이 싸 신혼부부 등 젊은 세대의 유입도 적잖은 곳이다.

"주민들을 만나면 딱 이럽니다. '너 이 동네 몇 년 살았어? 나 30년 살았는데.' 지역 정체성이 강한 곳이에요. 나도 초등학교 동창들 매달 반창회 하는데, 30명 씩 모여요. 서울에 어디 이런 동네가 있습니까?(웃음)"

차 구청장은 부천시를 예로 들었다. 시민운동의 전통이 강하고, 원혜영 전 시장(현 국회의원) 등 시정도 좋은 방향의 큰 흐름을 탄 것이 있어 누가 시장이 되도 크게 벗어나지 않고, 시정을 하기에 좋은 환경이라는 것이다. 그에 비해 금천에서 지역 풀뿌리 운동은 활발하지 않아 보였다. 구로공단의 노동운동 전통도 구로구 쪽에만 남아 있다고 한다.

"선거운동 하다 보니, 이 지역에만 산악회가 400~500개, 친목회도 수백 개더라고요. 이런 토박이 정서가 독산동은 덜한데, 시흥동 쪽이 강해요. 그래서 정서적으로 좀 폐쇄적이죠. 그래서 산지 5년 된 사람들은 어디 가서 명함도 못 꺼내요. 성공회대 교수들도 활동을 하는데 토박이 정서에 부딪혀서 잘 못 움직이죠. 그래서 바깥에서 온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으면서 지역 공동체 운동, 풀뿌리 운동을 하려 해도 직접적 갈등은 없지만 확산력이 없어요. 여기가 그래도 노동운동의 전통이 있는 곳임에도 민주노동당의 세가 의외로 강하지 않습니다. 토박이들의 보수성이 작동하는 게 있어요."

#.4 복지전달체계부터 확립해야

민선 5기의 최대 화두인 '복지.' 차 구청장은 할 말이 많았다. 가장 큰 고민은 '복지전달체계'였다.

"금천구 예산이 2400억인데, 1000억이 복지에 투입돼요. 그런데 1000억 대부분이 중앙정부에서 저희를 거쳐 가는 겁니다. 지역 특화된 복지를 할 수가 없어요. 동네 마다 특성이 달라서 복지의 수요가 달라요. 노원구는 아파트 거주율이 90%입니다. 금천과 전혀 다른 동네입니다. 복지 대처 방법이 다를 수밖에 없고, 지역 특수성에 맞게 쓸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럴 예산이 없어요. 서울 시내 다른 구청장들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거의 중앙정부 복지의 매칭으로 들어가요. 게다가 가뜩이나 1000억을 쓰는데 복지에 더 쓰자고 할 수도 없습니다. 복지 외 부서 공무원들은 뭐가 됩니까. 그리고 모든 자치단체가 복지를 제대로 할 인력이 필요한데 전문 이력이 확보가 안 돼 있어요. 저희 구청이 직원이 1000명인데, 복지 전담 인력이 50명이었습니다. 여기에 기능직 확 줄이고 늘려서 간신히 60명 만들었어요. 정부가 2014년까지 복지직 공무원을 7000명 늘린다는데, 계산해보니까 금천구에 30명옵니다. 그러면 2014년에도 금천에는 복지 전담 인력이 100명이 안 돼는 겁니다."

ⓒ금천구청
'도시, 욕망을 벗다' 기획 1편은 김성환 노원구청장이었다. 김 구청장은 동마다 기존 공무원을 복지직으로 전환시켜 3명의 복지 전담 인력을 배치한 것을 소개했었다.

"노원구는 민간 복지 기관이 6곳 있어요, 민간 복지관이 거점이 되니까 복지 인력을 동으로 배치해 아파트를 중심으로 관리를 하죠. 그런데 우리는 전부 단독주택입니다. 관리하기 쉽지 않아요. 복지전달체계를 1년 째 연구하고 있는데, 내년부터 금천구만의 복지전달체계가 가동될 겁니다. 저희는 통장들을 집중적으로 복지 인력으로 육성하고 있어요. 단독주택 밀집 지역을 제일 잘 파악하고 있는 분들이 통장들입니다. 이렇게 지역에 맞는 복지전달체계를 구축할 수 있는 권한과 예산의 자율성이 있어야 하는데, 기존의 짜여진 틀로만 가니까 힘들고 어렵죠. 국가가 해야 할 미니멈의 복지는 있어요. 기초생활수급자, 무상급식 등 지역의 특색이 별로 개입되지 않는 보편적이고 국가적인 복지들은 국가가 전담하고 그 외 지역의 특수성이 필요한 복지는 우리에게 맡기면 되잖아요. 그런데 무상급식 같은 걸 지역에 매칭을 시킵니까. 아파트 거주형 지역, 단독주택 거주형, 농촌, 도농복합도시 등 지역마다 다 다른 건데요."

그는 "복지의 틀을 만드는 게 시급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24시간 어린이집 2개를 6개 늘렸다고 보도자료 내서 자랑하고 그런 거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전체 체계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런 환경이 안 되니 단체장들이 파편화된 성과를 중심으로 내놓을 수밖에 없어요. 복지도 부서별로 나눠져 있어서 통합 관리가 안 돼요. 보건소에서 건강관리 체크하고 운동처방 해주는데, 노인 복지가 부서별로 나뉘어 있어서 통합적으로 보고 되지 않아요. 건강보험공단이 갖고 있는 건강 자료도 우리한테 안 넘어와요.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파악하느냐는 겁니다. 개개인의 요구는 복합적이고 중층적인데, 하나 풀어주면 또 하나 풀어줘야 하고. 요구는 끊임없이 나오고, 만족도는 낮아지죠. 한꺼번에 관리가 돼야죠. 칸막이 행정을 유지해서는 한 개인의 복잡한 문제를 해결해줄 수 없고, 아무리 많은 예산을 투입해도 주민들이 원하는 복지 만족도를 낼 수가 없어요. 사회적 기업을 육성해 일자리를 만들어 주고, 청소년의 교육 복지를 통해 능력을 키워 주는 기회와 공간을 만드는 일들이 유기적으로 연결이 돼 한 사회가 공동체 중심, 수요자 중심으로 가야 하는데, 지금은 굉장히 어려워요."

최일선에서 복지를 담당하는 구청장으로서 최근의 '복지 포퓰리즘' 논쟁도 못마땅했다.

"추상적 수준에서 논쟁하고 있는데, 단체장들의 고민은 포퓰리즘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1000억이 주어졌을 때 한정된 자원으로 어떻게 하면 효율성을 높여 복지 수요를 충족시키느냐이죠. 일자리 문제도 노동부 따로, 다른 부처 따로 합니다. 사회적기업도 있고 마을기업도 있는데, 둘 다 정신도 같고 방법도 같고 수요자들 입장에서는 다 똑같은 겁니다. 그런데 위에서는 따로 내려오니까 담당 부서가 달라지고 두 개가 별개로 작동을 해요. 복지 재정을 선진국 수준으로 늘리는 건 필요하다고 봐요. 문제는 총액만 갖고 따지는 게 아니라, 현장에서 다양한 복지전달체계를 시험해보고, 효과를 높여야만 선진국들의 실패를 건너뛰고 발전할 수 있을 겁니다."

#5. 교수와 정치, 그리고 부산

차 구청장의 열띤 '복지론'을 들은 뒤 화제를 개인과 정치로 돌렸다. 그는 1편의 김성환 노원구청장, 2편의 김만수 부천시장과 마찬가지로 노무현 정부 청와대 출신이지만, 이력은 좀 다르다. 그들이 구의원, 시의원 등을 하면서 지역에서 잔뼈가 굵었던 인물이라면 그는 반 평생을 교수로 지내왔다. 그의 전공인 '사회학'이 구정에 도움이 되고 있을까?

"크게 도움이 되는 것 같지는 않아요. 저는 원래 교수 출신들이 (단체장이 돼서) 잘 할 수 있다고 확신하지는 않아요. 학자는 학자의 역할이 있죠. 거리를 두고 비판해주고 방향을 잡아주는 게 필요하다고 봅니다. 저는 오히려 90년대 초반부터 참여한 부산 경실련, 참여자치연대 등의 활동에서 배운 게 훨씬 많죠. 전체적인 틀을 청와대에 들어가면서 배웠고요. 구청장 하면서 느낀건데, 김성환, 김영배 구청장, 김만수 시장은 나이도 어린데 참 잘 해요. 김성환, 김만수는 다 구의원하고 시의원했던 사람들이고 김영배도 성북구청장 비서실장을 오래 했잖아요. 지역에서 사람들을 계속 만났고, 지역 문제 해결의 노하우에 대한 확신이 있는 거예요. 저는 여기가 고향이라 더 애정을 갖고, 오래 떠나 있었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 만나고 주변의 얘기를 더 많이 들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단체장은 지역에서 오래 활동해 서류 없어도 지역 문제들을 꿰차고 있는 사람들이 더 잘 할 수 있는 것 같긴 해요.(웃음)"

그런데 학자적 본능은 숨길 수 없는 모양이다. 그는 청와대에서의 경험과 구청에서의 경험을 비교한 책을 한 권 기술할 생각이라고 했다. 부산과 서울의 차이점도 물어봤다.

"어떤 면에서 부산은 편합니다. 선명한 지역주의가 작동하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진보적인 색깔은 잘 드러내지 않고, 민주당 민주노동당 뿐만 아니라 한나라당도 조언해주고 경계에 서 있으면 됩니다. 부산지역 방송을 진행하면서도 색깔을 드러내기 힘들었죠. 그러다 탄핵이 터지고 나서 색깔을 드러냈는데, 차라리 편하더라고요. 그래도 우리 편이 30~40%는 있는 거니까. 그래서 부산은 좌절도 있지만 도전의 명분이 명확합니다. 그런데 서울은 선명하지 않아요. 활동하기에 정치 지형이 아주 복잡합니다. 또 다른 차이는 전문가 환경이죠. 서울은 정말 전문가들이 많습니다. 구청장이 전문가가 아니어도 주변에 도움 받을 수 있는 전문가들이 많아요."

대답은 '공직자론'으로 이어졌다.

"구청장은 상식과 원칙을 갖고 공과 사를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이면 된다고 봐요. 청와대에 있든 구청에 있든 전문가들의 견해 중 국민과 구민의 입장에 서서 선택하면 되는 거죠. 단체장 하면서 이런 생각을 많이 하는데, 자기의 사적 이해관계와 공적 쟁점을 구분해서 혼재하는 순간 정치가 무너집니다. 그걸 구분할 줄 알아야 하고, 인간에 대한 예의 및 상식과 원칙을 가진 사람이 정치 리더로 커야 한다는 생각을 점점 많이 하게 됩니다."

그럼 그는 언제 정치에 뛰어들 생각을 했을까. "부산에서는 경계에 서서 줄타기를 하느라 노무현 전 대통령을 한 번도 보지 못 했다"는 그는 사실 2002년 대선 당시 '천정배 캠프'라는 노무현 후보의 비공식 캠프에서 활동했었다고 한다.

"부산에서 TV토론 진행할 땐데, 노 후보의 지지율이 4월부터 떨어지기 시작해서 10%대까지 가는 겁니다. 사실 그 때 안식년을 쓰려고 했는데, 노무현이라는 사람이 대통령 되는 게 대한민국 미래를 위해 좋겠다고 생각해 학교에는 안식년 쓴다 하고 몰래 서울에 와서 천정배 캠프에 들어갔습니다. 6개월 동안 죽자고 일했죠. 부산에서는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웃음) 그러다 다시 부산으로 돌아가 방송을 하는데, 탄핵이 터졌죠. 그래서 내 정치색을 공개적으로 커밍아웃하고 총선 지원 활동을 했죠."

차 구청장은 부산에서 총선 출마를 준비하기도 했으나 출마하지 못 했다고 한다.

"2007년 말에 출마 준비하고 있는데 친노 핵심 중 한 명이 제 지역구에서 무소속 출마를 선언했어요. 청와대에서 저한테 출마 하지 말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포기했죠. 출마한다고 했다가 접었으니 정치는 다시 못 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봉하를 잘 관리하는게 대통령 모셨던 사람으로서 마지막 역할이라 생각했는데, 대통령이 돌아가셨죠. 그리고 지방선거를 앞두고 민주당이 인물난에 허덕일 때 누군가가 고향에 한 번 나가보라고 해서 올라와 출마하게 됐습니다. 그 때 제 후원금의 2/3가 부산 분들이 낸 겁니다. 아직도 부산 분들에게는 마음의 빚이 있어요. 여기서 잘 해야 부산 분들한테 덜 미안한 것 같아요."

ⓒ금천구청

그는 부산에서 동아대 교수로 재직하며 박형준 청와대 사회특보와 공동육아를 할 정도로 친분이 두터운 관계였다.

"박 특보가 정치는 저보다 선배죠. 노 대통령도 무척 아쉬워했던 거 같은데, 박 특보가 한나라당 공천을 받아 출마하면서 별로 만날 일이 없었어요. 2007년 12월 참여정부 인계위원회 만들 때 아무도 안 하려고 했는데 제가 시민사회수석도 했고 나이도 많다는 이유로 인계위원이 됐죠.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박 특보가 이명박 정부 인수위 간사인가가 돼서 몇 년 만에 그 자리에서 만난 겁니다."

청와대 수석 '선배'로서 박 특보에게 조언을 부탁했다.

"저보다 정치 선배고 워낙 전략가여서 잘 할 거라 믿습니다. 다만 대통령이 가장 신뢰하는 참모라니 이 대통령이 방향을 잘 못 잡는 일이 있으면 마지막으로 잘 마무리하고 나오라고 얘기하고 싶어요."

차 구청장은 출마 당시 <프레시안>과의 인터뷰에서 "광역단체장 역량은 안 되는 것 같고 구청장 2번 하고 싶다"고 했다.

"구민들이 한 번 더 허용하면 재선하고 싶어요. 3선까지 구청장은 8년이 체력적으로 한계인 것 같습니다. 4년 하고서 다시는 못 하겠다고 하면 구민들이 비전을 보겠어요? 8년 보고 일을 합니다."

그에게 마지막 말을 부탁했다.

"국회의원이 하기 힘든 일 구청장이 하고, 구청장이 할 수 없는 일 국회의원이 해서 대한민국을 똑바른 길로 가게 해야죠. 어떤 길이 선진국의 길인지 정의로운 국가의 길인지 공정한 사회의 길인지 생각이 조금씩 다르겠지만, 역할분담을 통해 대한민국의 미래를 같이 책임지는 일이 필요합니다. 정말 폭넓은 연대가 절실하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길 바라지 않는 사람들이라면 서로의 차이를 품어 주면서 큰 틀에서 큰 방향에서 함께 가는 노력이 필요하고, 혹시 제가 그 일을 위해 도움이 된다면 열심히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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