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4일 경기 화성 아리셀 공장에서 23명이 화재로 목숨을 잃었다. 그날 세상을 떠난 이들은 누군가의 가족이며 이웃이며 친구였다. 그들의 삶이 단순한 숫자로 기억되는 일을 넘기 위해, 참사 2주기에서 3주기 사이 희생자 한 명 한 명의 삶을 기록한 부고를 전하려 한다.
고 엄정정 씨의 이름은 '고요할 정(静)' 두 개를 겹쳐 쓴다. 중국에선 '깨끗하고 평안하다'는 뜻이다. 1999년 9월 28일, 중국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서 이순희 씨 부부의 첫째 딸로 태어났다. 유년기는 주로 수도 베이징이 있는 허베이성에서 할아버지 가족과 함께 살았다. 더 넓은 세상을 보게 하고 싶었던 부모의 마음이었다.
어머니는 정정 씨가 세 살일 때 한국으로 왔다. 중국에서 했던 장사, 식당이 계속 잘되지 않았다. 정정 씨는 여름·겨울 방학 때마다 한국 부모님 집을 들러 두어 달씩 같이 살았다. 그래도 떨어져 산 세월이 십수 년이니, 어머니는 아직도 "사랑을 더 많이 주지 못해서 원통하다"며 자주 운다고 지난 8일 말했다.
이 씨가 기억하는 정정 씨는 그림과 꾸미기를 좋아하는 아이였다. 정정 씨는 학교에서도 틈 날 때마다 그림을 그렸고 잘 그렸다. "학교 다닐 때 (행사 등) 벽보는 정정이가 다 그렸다"고 이 씨가 말했다. 추후 한국에 정착한 정정 씨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도 그림 공부였다. 당장 돈이 부족해 시작하진 못했지만, 정정 씨는 만화를 그리는 교육을 받고 싶어 했고 틈틈이 그린 만화를 엄마에게 보여줬다.
"놀러 다닐 줄을 몰랐던" 이 씨 부부가 처음 한국 여행을 해본 것도 정정 씨 덕분이다. 십 대의 정정 씨는 방학 때마다 한국에 와선 '남산타워에 가자', '63빌딩엘 가자', '한강도 가보자'라고 엄마를 졸랐다. 이 씨 부부는 십 년을 넘게 한국에 살면서도, 생계를 꾸린다고 국내 여행을 한 번도 안 가본 터였다. 이 씨는 "정정이 덕분에 많이 다니고, 사진도 많이 찍었다"고 말했다.
"혼자 있기 싫어" 처음 투정 부린 십 대의 정정
그러던 어느 날, 고등학생이 된 정정 씨는 엄마 앞에서 '혼자 있기 싫다. 가족들이랑 함께 살고 싶다'며 엉엉 울었다. '중국에 다시 안 가겠다'고도 말했다. 처음이었다. 이 씨는 "그래, 여기 오라" 하면서 주변 고등학교를 알아봤다. 지역 외국인 학교는 교육비가 1년에 2000만 원 넘게 들었다. 주변 공업고교, 인문계고교 등도 알아봤지만, 자신이 없었다. 당시 식당을 운영한 이 씨는 손님들의 걱정 어린 조언을 들었다. 적응을 못 해서 우울증에 걸린 아이, 언어 때문에 왕따를 당한 아이 등의 사례가 적지 않았다. 정정 씨는 중국으로 돌아갔다.
그 길로 정정 씨의 본격적인 한글 공부가 시작됐다. 정정 씨는 혼자 책을 사서 독학했다. 이 씨는 종종 정정 씨에게 위챗(메신저)으로 "니 이거 무슨 의민가 아니?"라며 단어 퀴즈도 냈다. 정정 씨는 신나 하며 곧잘 답했다.
2017년 열여덟의 정정 씨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시의 연변대학 사범학원에 입학했다. 초등학교 선생님이 될 수 있는 길이었다. 그러나 적성에 맞지 않았다. 정정 씨의 마음속엔 항상 그림이 자리 잡고 있었다. 2022년, 대학 수료만 마쳐놓고 정정 씨는 한국에 들어왔다. '이제 가족과 같이 살고 싶다'며 한국에 정착하겠다고 밝혔다. 이 씨는 "졸업증을 따고 오라"며 단호하게 설득해 그를 돌려보냈다.
그렇게 2024년 3월, 정정 씨는 대학교 졸업장과 교사 자격증을 따내고 한국에 입국했다. 정착 생활이 시작됐다. 그는 '실습해 보니 아이들 가르치는 건 적성에 안 맞더라'고 부모님께 고백했다. 손재주가 좋은 정정 씨는 한국에서 틈틈이 수공예품을 만들어 팔았다. 아이돌 연예인 카드도 만들어 팬들에게 팔았다. 집 책장엔 정정 씨가 남겨놓은 비즈나 리본 등 공예 도구들이 남아 있다. 정정 씨가 팔지 못한 머리핀도 함께 놓여 있다.
정정 씨가 '아리셀'에 입사한 건 입국한 지 한 달 반 가량됐을 무렵인 4월 말이다. 중국에서 입이 마르게 "내 걱정하지 말라"고 했던 딸이, 한국에서도 "나도 보탬이 될게"라며 일을 시작했다. 정정 씨는 절약이 몸에 배여 있었다. 부모로선 철이 너무 빨리 든 딸이었다. 대학교 때도 꾸준히 아르바이트를 병행했고, "패딩 점퍼 하나를 사도, 10년 넘게 입고도 불평 한 번 없었던 딸"이었다.
아리셀에서 일한 지 두 달이 됐을 무렵, 정정 씨는 참사로 사망했다. 향년 24세. 정정 씨의 유해는 온전치 못했다. 팔꿈치와 무릎 아래가 유실됐다. 참사 2년이 지났지만, 정부, 지자체 어디도 온전한 유해 수습을 위해 나서지 않았다. 이 씨는 "속이 시꺼멓게 애가 타고 있다"고 말했다.
'햇반' 유류품, 미어지는 유족 가슴
참사 후, 이 씨가 떨리는 손으로 쥔 유류품 쇼핑백엔 '햇반'이 있었다. 정정 씨의 점심이었다. 돼지고기를 잘 못 먹는 정정 씨는 '함바집' 식사가 입에 맞지 않았다. 같이 일한 고 이미란 씨의 반찬이 더 맛있었다. 이미란 씨가 도시락을 싸 오면, 정정 씨는 햇반만 사들고 가 같이 점심을 먹었다. 이 씨는 그런 정정 씨에게 카드를 주며 "얻어먹지만 말고, 과자라도 사 가라"고 했다.
36세의 고 이미란 씨도 참사로 사망했다. 참사 현장에서 만난 그의 유족은 정정 씨를 기억했다. 그는 이 씨에게 '그 통통하고 덩치 큰, 되게 어린 애 기억난다'며 미란 씨가 '걔가 좋아하는 게 꽈리고추 반찬인데, 내래 그거 해다 줘야 한다며, 일요일(참사 전날)에 장 봐와서 앉아서 그거 만들고 있었다'고 말했다. 얘기를 나눈 두 유족은 함께 울었다.
"뭐 먹어요?" "배고파." "오늘은 치킨마요 덮밥 시킬게." 정정 씨는 매일 퇴근 후 통근버스에 타자마자 이 씨에게 '저녁 식사 문자'를 보내곤 했다. 늘 정정 씨가 먼저 보낸 대화로 채워지던 카카오톡 대화방이었지만, 참사 당일에는 알림이 울리지 않았다. 대신 그 대화방엔 그날 오후 이 씨가 보낸 다급한 확인 문자만 남아 있다. "딸 다니는 데도 화성이야? (사고 난 곳이) 배터리 공장이라는데? 넌 뭐 만든다 했지?"
이 씨 가족이 지금 살고 있는 집도 딸 정정 씨가 계약한 곳이다. 원래 네 식구는 경기 시흥시 정왕동 한 투룸 빌라에 모여 살았다. 정정 씨는 한국에 올 때마다 여동생과 같은 방을 썼다. 그러다 정정 씨가 한국 정착 계획을 밝힌 후, 부부는 함께 건설 일을 나갔다. '방 3개짜리' 집을 사기 위해서였다.
부부는 한 조가 돼 천장 시공을 했고, 주말도 없이 주 7일을 바짝 일했다. 남들이 하루에 한 집을 작업할 때, 둘은 두 집씩 해치웠다. 광명, 대전, 일산, 청주, 강릉, 일이 있으면 전국을 다녔다. 수입이 좋을 땐 한 사람당 한 달 1000만 원도 벌었다. 그렇게 1년 반 가량 일을 해 돈을 모았다. 아리셀 참사가 일어난 그날도 부부가 안양에서 한창 일하고 있을 때였다.
딸 위한 집 사놓고… 이사 준비 중 참사
'새집 사자'고 노래를 불렀던 정정 씨는 동생과 함께 지금 집을 보러 다녔고, 그해 5월에 가계약도 직접 했다. 이후 8월 16일을 이사하기 좋은 길일로 받아 놓고, 이사 준비를 시작했다. 그 사이 정정 씨가 사망했다. 이 씨 부부가 아리셀 참사 현장과 화성시 모두누림센터(유족 지원 공간)을 오가며 투쟁하는 사이, 정정 씨가 중국에서 부쳤던 방 인테리어 소품, 공예 재료 소포가 하나둘씩 도착했다. 이 씨는 이를 끌어안고 울기도 했다. 물건은 차마 버리지 못하고 수납장에 모아 놨다. 여동생이 언니의 물건을 대신 쓰며 보관하고 있다.
이사 오기 전에 살던 빌라에선 "정정아, 오늘 우리 집 오라" 하는 소리가 주말마다 종종 들렸다. 이 씨의 친구들이 많이 모여 살았던 빌라였다. 그럼 정정 씨는 이웃집을 찾아가 네일아트를 해줬다. 손재주가 좋았던 정정 씨는 "손톱에 별나게 그림을 잘 그렸다"고 했다. 정정 씨는 이 씨와 여동생의 손톱에도 틈만 나면 네일아트를 해줬다.
정정 씨가 처음으로 준비한 직업은 피부미용사였다. 이 씨는 "실기는 누구보다 잘했는데, 한국어가 부족해 필기는 한 5번 떨어졌을 거다"라고 말했다. 정정 씨는 방학 때 한국에 와서 피부미용 학원에 다녔고, 틈틈이 한국어를 공부하며 시험을 준비했다. 그렇게 끝내 피부미용사 자격을 따냈다. 정정 씨는 어머니 사촌이 가평에서 하는 피부미용 가게에서 1년 정도 일을 배울 계획도 세웠다.
유족은 정정 씨 장례를 2024년 9월 25일에 치렀다. 참사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사과가 이뤄지지 않아 장례를 미룬 유족이 많았고, 이 씨 가족도 그랬다. 그럼에도 이 씨 가족은 9월 28일 딸의 생일 전엔 장례를 치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곤 생일 이틀 뒤 30일, 천도재를 올려 딸을 하늘로 보냈다. 장지는 화성 함백산 추모 공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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