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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은 대통령이어야 하는데…

[기자의 눈] 한국정치사 '권력투쟁'의 기억 속에서

지난 2일 측근참모들과의 회동에서 "현 상황은 권력투쟁"이라고 규정했던 노무현 대통령이 6일 당정청 청와대 오찬 자리에서도 "권력투쟁"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자리에서 대통령은 논의를 주도하며 '합의문'까지 직접 작성해 낭독했다고 한다.

여당과 야당 사이, 또는 청와대와 야당 사이도 아니고 청와대와 여당 사이에 '합의문'이 도출된 것도 독특한 현상이지만 대통령이 당청관계를 권력투쟁으로 규정한 것도 초유의 사태다. 여하튼, 대통령의 그 규정을 받아들인다면 최근 여당과 청와대 사이의 '투쟁'은 일견 청와대의 완승으로 일단락됐다는 데에 이론의 여지가 별로 없어 보이긴 한다.

사실 낯설지만은 않은 '권력투쟁'의 기억

대통령이 정확히 어떤 의미로 '권력투쟁'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는지는 알 수없는 노릇이지만 흔히들 정치는 곧 권력투쟁의 장이라고들 한다. 권력의 획득, 분배, 행사라는 일련의 과정을 정치라고 한다면 그 가운데 나타나는 다양한 갈등구조가 곧 권력투쟁일 수 있을 터이다.

권력투쟁은 일반적으로 체제와 반체제 간의 대립, 체제 내 권력집단(여)과 비권력집단(야)의 대립, 권력집단 내부에서 권력자의 지위나 주도권을 둘러싼 대립으로 다시 나뉠 수 있다. 따라서 대통령이 언급한 권력투쟁은 권력집단 내부에서 권력자의 지위나 주도권을 둘러싼 대립을 뜻하는 것으로 상정해도 큰 무리는 없어 보인다.

또한 최고권력자인 대통령의 지위를 끌어내리기 위한 시도는 지난 2004년의 탄핵이 유일했기 때문에 현 상황은 권력집단 내의 주도권을 둘러싼 대립으로 한정 지을 수 있다.

이렇게 좁게 규정해보면 한국정치사에서 권력투쟁이 낯선 것만은 아니다. 1공화국에서는 이승만의 초기 집권 기반이었던 지주층, 이후 지지기반이던 족청계 등은 권력투쟁에서 실패해 차례로 거세됐다. 그리고 이승만에게 거세된 한민당의 뿌리를 이어 받은 2공화국 민주당의 신구파 간 투쟁은 타 정당의 그것에 못지않았다.

5.16 쿠테타 이후에는 장도영계, 비육사계열, 육사 5기가 차례로 권력투쟁에서 패배했고 제3공화국에서는 김성곤 등 이른바 4인방과 김형욱, 이후락 등이 여권 내 권력투쟁에서 승자로 떠올랐다가 곧 몰락했다.

유례없이 폭압적이었던 4, 5공화국에서는 권력투쟁 양상이 수면 위로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6공 들어 3당 합당 이후 YS의 대권후보 '쟁취'과정은 권력투쟁의 백미라 할만하다. YS, DJ 정부 들어서는 9룡, 7룡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권력투쟁은 일상화 됐다.

지금의 권력투쟁은 한국정치사 초유의 사태

60년 남짓한 한국현대정치사의 이 권력투쟁들을 살펴보면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여권 내 권력투쟁의 목표는 최고권력자의 신임, 나아가 차기권력에 대한 접근에 다름 아니었다는 것. 권력투쟁 내에서 나타난 다양한 양상들은 전부 그 목표를 향해 수렴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승자는 차기 권력에 한발 더 다가갔고 패자는 비주류로 내밀리거나 영원히 제거당했다. 물론 영원한 2인자로 불리는 JP의 경우처럼 권력투쟁의 패배자가 부활한 경우도 없지는 않다.

그런 점에서 볼 때 현 여권의 권력투쟁 양상은 대단히 독특하다. 김병준 부총리의 거취에서 촉발된 최근의 양상을 살펴보면 이번 권력투쟁은 여당과 청와대의 대립구도였다. 여당의 목표는 지지율 제고를 통한 차기권력 창출이었고 청와대의 목표는 권력유지를 통한 레임덕 방지였다.

이 정부가 시도하고 있는 당-청 분리라는 기묘한 실험 자체가 애당초 당-청 갈등을 유발할 소지를 안고 있었고, 나아가 이번에 부각된 이른바 권력투쟁이라는 것 자체가 노 대통령의 적극적 상황규정이라기보다는 "당이 내게 권력투쟁 하듯 대한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다분히 수동적인 입장에서 촉발된 측면이 없지 않지만, 대통령이 스스로를 자신이 만든 여당과의 권력투쟁의 한 축으로 설정하는 한국정치사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권력투쟁의 장에서 탁월한 역량 발휘한 노 대통령

하여튼 6일 당정청 회동을 통해 정리된 현 권력투쟁의 승자는 대통령임에 분명하다. 노 대통령은 당정청 수뇌부들에게 행정부 수장으로의 독점적 인사권을 재확인시켰다.

또한 여당의 잠재적 대권주자들을 앞에 앉혀놓고 "퇴임 후에도 당과 함께 하겠다" "배를 지키면 좋은 선장이 올 수도 있다"고 언급하는 가운데 자신이 사실상 '여당의 최대주주'라는 사실도 각인시켰다. 이를 통해 범여권은 '당정분리' '당청분리'는 애당초 허울에 불과했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이번 권력투쟁 진행 과정에서 노 대통령이 보여준 역량은 그야말로 탁월했다. 우리사회의 진보, 보수 모두가 김병준 부총리 사퇴 의견으로 대동단결하고 여당도 공세를 강화하는 불리한 국면에서 노 대통령은 절대로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 참모들조차 "대통령은 말씀이 없으시다" "우리가 뭐라고 말할 계제가 아니다"고 말을 아꼈다. 최소한 6일의 오찬회동 전까지는 그랬다.

김 부총리, 사실상 청와대를 향한 공세는 모두 김 부총리 자신이 감당해야 했고 간헐적으로 여권 일부에서 볼멘 반응이 나올 뿐이었다. 그리고 일부 언론을 통해 "대통령의 중대 결심이 임박했다"는 보도가 나왔을 뿐이다. 물론 청와대는 이를 부인했지만.

그러나 아무도 '공식적으로는' 말하지 않은 문재인 카드가 회자되고 여당과 김근태 의장이 '오버'를 한 그 지점에서 반격은 시작됐다. 비서실장, 인사수석, 노사모 대표, 친노직계 의원들이 차례로 나섰고 "사실은 김병준 부총리가 사의를 표명하기 전부터 대통령이 여당에 대노했다"는 측근의 증언이 뒤늦게 언론을 탔다.

그리고 당정청 회동을 통해 상황은 '완전 뒤집기'로 종결됐다. "YS, DJ가 정치 9단이라고 하지만 노 대통령이야 말로 정치 10단이다"는 어느 측근의 말이 실감나는 장면이었다.

그런데 역사상 최초로 대통령이 여권 내 권력투쟁의 전면에 나서서 같은 식구인 여당의 무릎를 꿇리고 승리를 거두는 가운데 얻은 것은 과연 무엇일까?

여권 내의 갈등 양상이 대통령 말대로 권력투쟁의 측면을 포함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스스로가 권력투쟁의 당사자의 자리로 내려와 화려한 정치전술을 펼치고 제3자들이 '대통령이 승리를 거뒀다'고 판정해주는 상황이 무슨 의미를 갖느냐는 것이다. "역시 우리 대통령은 승부사다"고 여당 안팎에서 박수를 보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대통령 때려서 잘 된 사람 없다"…과연 그럴까?

대통령은 6일 당정청 회동에서 이렇게 강조했다. "임기 끝까지 책임지고 나가겠다." 대단히 정략적인 판단을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 정권이 식물정권으로 국정의 혼란을 가져오길 바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대통령의 말에는 일리가 있다.

하지만 대통령은 곧 바로 "(과거 여당에서) 대통령 때려서 잘 된 사람 없다"며 "밖에서 선장이 탈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이 말 역시 과히 틀린 말은 아니다. 여당 안에서 대통령을 때리지 않은 노태우, 노무현 두 노 후보는 대권을 잡았고, 차별화를 시도한 두 사람 김영삼, 이회창 가운데서는 한 명만 대권을 잡았다.

하지만 두 노 대통령의 집권 후 전임자와의 차별화는 야당의 그것을 무색케 할 정도였다. 이유야 어떻든 전두환은 백담사로 갔고 DJ 정부의 대북송금은 특검을 통해 그 전모가 드러났고 전임자의 측근들은 거의 다 옥살이를 했다.

그리고 YS의 경우 "호랑이 잡으러 호랑이 굴에 들어갔다"고 노골적으로 자신을 차별화 시켜 대권 획득에 성공했고 이회창 후보의 경우도 결과적으로 대권은 잡지 못했지만 IMF 국난을 초래하고 아들에게 국정을 농단케 한 YS와 차별화를 하지 않았다면 아마 후보 자리를 차지하기도, 그 정도 지지율을 얻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차별화라는 관점에서만 보자면, 최근 정치사에서 여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4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었던 셈이고, 그 차별화의 원인을 전임자가 제공했다는 점에서도 공통적이다.

대통령은 대통령이어야 하는데

노 대통령이 국정을 끝까지 책임지기를 원하고 대권후보군이 자기를 때리지 않기를 원한다면 답은 간단하다. 대통령의 국정지지도가 높으면 된다.

대통령의 국정이 국민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는다면 여당이, 혹은 여당 내의 대권 후보자들이 아무리 대통령을 때리고 싶어도 아무도 대통령을 때리지 못할 것이다. 심지어 야당조차 "계승할 것은 계승하고 부족한 점을 우리가 채운다"고 몸을 사릴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노 대통령은 지지도에 연연하지 않는 모습을 견지해 왔다. 4.15 총선 이후 어떤 선거에서도 여당이 승리를 거두지 못했지만 당정분리라는 명제를 내세워 의연한 모습을 보였고 오히려 '일희일비 하지 않고 역사 속에서 평가를 받을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이 와중에 어떤 참모는 "대통령은 21세기, 국민들은 19세기라서 못 따르는 것"이라는 해석을 내놓기도 했다. '내 무덤에 침을 뱉으라'를 방불케 하는 장면이었다.

단기적 인기에 연연해서는 안 된다는 대통령의 소신에는 일리가 있다. 그렇게 가면 된다. 그런 기조로 잘했든 못했든 남은 기간 동안 국정의 마무리에 열과 성을 다하면 된다.

그러나 지금 국민들이 보고 있는 대통령의 모습은 이 정권이 막 시작하던 무렵 '검사와의 대화'의 한 장면을 연상시킨다. 평검사를 향해 눈을 부라리며 "지금 막 나가자는 거냐"고 하던 바로 그 장면 말이다. 어쩌면 바로 그 순간에 지금과 같은 임기말 권력투쟁의 한 축으로 자신의 위상을 떨구는 대통령의 모습은 이미 예비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대통령은 과연 어떤 자리인지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나아가 현 정부의 남은 1년 반 기간 동안 현직 대통령이 또 다시 얼마나 많은 '대통령 답지 않은' 행태를 보일지 생각하면 머리가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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