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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우 테러리스트로 변신한 광복군, 그 사정은?
[해방일기] 1945년 9월 17일
지난 8월 30일 일본군 각 부대로부터 제대가 되어 돌아온 청장년 장병들이 일치단결하여 귀환장병대라는 이름으로 현재에는 치안 유지에 힘쓰는 한편 장래 국군의 기초를 닦으려고 주야로 맹활동 맹훈련을 하고 있던 중 이번에는 기본 뜻을 가진 단체로 귀환군인동맹과 합류
김기협 역사학자
2010.09.17 09:14:00
'돈-패거리' 정치의 원조는 <동아일보>?
[해방일기] 1945년 9월 16일
우익은 '민족'을, 좌익은 '민주'를 내세우며 맞섰지만, 수화불상용(水火不相容)의 정면 대결은 아니었다. 좌익 중에서도 민족을 무시하고 계급에만 집착하는 골수 공산주의자는 백안시당했다. 우익도 민주주의는 당연히 주장했다.
2010.09.16 07:57:00
미군은 왜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인가?
[해방일기] 1945년 9월 15일
연합군 중의 미군 제24군단은 방금 북위 38도 이남 각지에 진주 중인데 지난 12日과 15日에 총독과 총독부 각 수뇌부를 전부 해임시켰다. 이에 대하여 미군 보도 책임자 헤이워드 중좌는 15日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2010.09.15 10:26:00
'조선 자치'에 칼을 꽂은 박헌영과 좌익들
[해방일기] 1945년 9월 14일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의 선언문을 건국준비위원회(건준)가 발표하는 어정쩡한 모습이다. 건준을 장악한 공산주의자들은 미군 진주를 앞두고 인공 수립을 서둘러 건준을 형해화해 놓았는데, 막상 이 시점에서는 대중이 그래도 실체를 알고 있는 건준을 앞세운 것이다.
2010.09.14 08:14:00
美 총독 하지 "한국, 사흘간 공부했다"
[해방일기] 1945년 9월 13일
하지 중장은 서울에 들어온 이틀 후인 11일 오후 기자회견을 열었다. 군정을 시작하는 사령관의 관점과 입장을 폭넓게 보여준 회견이므로 미국 군정의 성격과 문제점을 상당 부분 여기에서 알아볼 수 있다. 회견 기사를 옮겨 싣고, 몇 가지 음미할 점에 간단한 생각을 붙인다
2010.09.13 08:04:00
해방 후 도서관 대출 1위는…
[해방일기] 1945년 9월 10일
국립도서관에서는 그 동안 海印寺와 開城 등지에 소개시켰던 서적을 다시 가져다가 정리하는 한편 현재의 장서를 가지고 일반에게 공개 중인데 매일 4·5백 명의 열람자가 쇄도하고 있다. 그런데 8·15 이후에 서적 열람 경향은 정세의 변동을 따라 재미스러운 추이를 보여주
2010.09.10 09:15:00
남한 점령군 美 장군 하지의 정체는…
[해방일기] 1945년 9월 9일
미국 육군 24군단이 남한 점령군으로 들어왔다. 미군의 남한 점령을 명시한 일반명령 1호는 9월 2일자로 발령되었지만, 그 내용을 맥아더가 마닐라에서 일본 전권대사 가와베에게 8월 20일 이미 교부해 놓았다. 가와베는 21일 일본에 돌아갔고 22일 일본 내무차관이 조선 총
2010.09.09 09:24:00
여운형은 왜 임시정부와 갈라섰을까?
[해방일기] 1945년 9월 8일
그저께 소개한 한민당 성명서를 작성한 사람이 장덕수(1894~1947년)로 보인다고 한다. 선동적이고 악의적인 정치 논설에 익숙해진 지금 사람의 눈에도 정말 대단한 물건이다. 사실의 조작과 왜곡에서 야비한 표현에 이르기까지 황색 언론의 전범으로 삼을 만한 이런 문서는 1
2010.09.08 09:30:00
자본가들도 해방을 환영했을까?
[해방일기] 1945년 9월 7일
송진우(1890~1945년)가 표면에 나섰다. 회의 장소도 동아일보 사옥이었다. 송진우는 김성수(1891~1955년)의 사람이었고 동아일보의 사람이었다. 1907년 김성수와 처음 만나고 함께 일본 유학을 떠났다. 메이지 대학교 졸업 후 1916년 귀국하자 바로 김성수의 중앙학교 일을
2010.09.07 08:12:00
미군 등장 앞두고 갈라진 해방 조선
[해방일기] 1945년 9월 6일
균열이 드디어 드러나기 시작했다. 좌익은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을 만들고 우익은 한국민주당(한민당)을 만들었다. 이 시점에 균열이 드러난 것은 미군 진주를 앞두고 좌익에서 바쁘게 움직였기 때문이다. 1928년 이후 좌익의 공식 활동이 일제 통치 아래 봉쇄되어 있었기 때
2010.09.06 08:49: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