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9월 7일
(略) 15일 이래 경성에 모여든 전국 각지의 각층 각계 유지 3백여명은 7일 오후 세시부터 광화문통 전 동아일보사 강당에 집합하고 3천만의 총의를 한데 모을 국민대회를 소집할 준비회를 개최하였다.
이날 준비회는 金俊淵으로부터 국민대회에 관한 취지를 설명하는 개회사가 있었고 의장에 대구로부터 올라온 徐相日을 추대하였다. 宋鎭禹로부터 준비회 개회에 이르기까지의 경과보고가 있고 곧 결의 사항으로 들어가
1) 在外 大韓民國臨時政府 지지에 관한 건을 상정하여 전원 총기립으로 찬동의 결의를 표명하고
2) 연합국에 대한 감사표시에 관한 건을 상정 협의한 결과 宋鎭禹 張澤相 尹致暎 金昌淑 崔潤東 白象圭 6씨를 선출하여 일임하기로 되었다.
3) 당면의 제문제에 관한 건과 국민대회 소집에 대한 준비는 전국 각지 각층을 총망라한 백명의 집행위원을 선출하여 일임하기로 하였다. 이로써 3천만 민중의 총의와 총역량을 집결할 국민대회소집과 연합국에 대한 감사표시는 착착 진행될 것으로 기대된다.
委員長 : 宋鎭禹
副委員長 : 徐相日 元世勳
常任委員(無順) : 金性洙 金俊淵 金炳魯 金智煥 金東元 金秉奎 金勝文 李仁 白寬洙 張澤相 尹致暎 安東源 林正燁 姜炳順 韓南洙 宋必滿 朱基鎔 高羲東 梁源模 白南敎 李順鐸 金良瑕 李慶熙 崔允東 徐相國 高在旭 高光表 曹正煥 姜仁澤 張德秀 張龍瑞 姜樂遠 金時中 趙軫九 閔重植 李熙晟 林炳哲 吳基水 李容漢 李昇泰 梁會英 陳奉燮 沈川 金東煥 郭福山 蔡廷根 羅承圭 金晋燮 金□根 李允植 金三奎 (<매일신보> 1945년 09월 08일)
(☞바로 보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송진우(1890~1945년)가 표면에 나섰다. 회의 장소도 동아일보 사옥이었다. 송진우는 김성수(1891~1955년)의 사람이었고 동아일보의 사람이었다. 1907년 김성수와 처음 만나고 함께 일본 유학을 떠났다. 메이지 대학교 졸업 후 1916년 귀국하자 바로 김성수의 중앙학교 일을 도와 학감과 교장을 맡았고, 1921년부터 동아일보를 사장, 고문, 주필 등의 직함으로 이끌었다. 1940년 폐간 후에도 동아일보사 청산위원회와 그 뒤를 이은 동본사를 대표하고 있다가 해방을 맞았다.
1944년 7월경 안재홍이 해방을 대비한 움직임을 권할 때 송진우가 거절한 이야기를 지난 8월 17일에 적었다. 그 때 송진우의 말을 다시 한 번 옮겨놓는다.
방금 미국은 전 세계를 영도하고 있다. 소련은 미국의 요청에 응하여 이미 코민테른의 해체조차 단행하였다. 소련은 미국에 잘 협력할 것이다. 한편 중경의 임시정부는 이미 연합 열강의 정식 승인을 얻었고, 그 배하 10만의 독립군을 옹유하였으며, 미국으로부터 10억 불의 차관이 성립되어 이미 1억 불의 전도금을 받고 있는 터인즉, 일제가 붕괴되는 때에 10만 군을 거느리고 10억 불의 거금을 들고 조선에 돌아와 친일거두 몇 무리만 처단하고, 그로써 행호시령(行號施令)하기만 하면 조선인은 원래 출입우세를 잘 하니까 만사는 큰 문제없이 해결될 것이다.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서중석 지음, 역사비평사 펴냄) 204쪽에서 재인용)
송진우는 미국의 실력과 중경 임시정부(임정)의 역량을 과장해서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선인은 원래 출입우세를 잘하니까" 외부의 막강한 힘이 들어오면 그 힘에 따라 사태가 낙착될 것이니 안에서 미리 애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출입우세"란 말을 사전에서 확인하지 못했지만, 어감으로 봐서 별로 좋은 말 같지 않다.
송진우는 해방 직후에도 건준 참여를 거부했다. 서중석은 송진우가 여운형과 안재홍의 좌우 합작 운동에 동조할 수 없었던 이유 몇 가지를 짚어보았다. (위 책 203~207쪽)
(1) 송진우 세력은 일제 말기에 민족 해방 운동에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앞에 나설 경우 반민족 행위자로 공격받을 위험이 있었다.
(2) 일제 시기에 동아일보가 자치 운동-민족 개량주의의 본산으로 지목되어 사회주의자들에게 혹독한 공격을 받은 것은 감정적 차원을 넘어선 체제적 성격의 대립이었다.
(3) 송진우는 협동 전선 운동에 부정적 시각을 갖고 있었다.
(4) 송진우는 미국과 임정의 위력을 과신하고 있었다.
(5) 기업, 학교, 언론 등 자파 세력 근거가 있으므로 독자적 진로를 찾을 자신이 있었다.
(6) 자존심이 강하고 뱃심이 있고 인간관계에 편협한 송진우의 개인적 성격.
이 모두가 어느 정도 타당성 있는 요인이었겠지만, (4)와 관련해서는 좀 더 생각할 점이 있는 것 같다. (4)의 근거는 위에 옮겨놓은 안재홍과의 대화 내용인데, 해방 시점에서는 송진우가 보다 정확한 정보에 접하고 있었을 것이다. 임정이 미국의 어마어마한 지원을 받거나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있지 않다는 사실 정도는 분명히 알았을 것이다.
미국의 위력에 대한 믿음은 결코 "과신"이라 할 수 없다. 그리고 송진우는 남한에 미군이 진주하리라는 사실을 꽤 일찍부터 알고 있었을 것 같다. 서중석은 미군의 남한 진주가 8월 말에 알려졌다고 보았지만(위 책 208~210쪽), 확신할 일이 아닌 것 같다. 이 정보는 8월 10일 밤에 생산되어 14일까지는 일본 정부에 확보되어 있었다. 유통경로가 확인되지 않았다고 해서 이런 중요한 정보가 두 주일 동안 한국에 전혀 전파되지 않았다고 볼 수는 없는 일이다. 총독부가 '자기 편'에게만 알려주고 있었으리라는 것이 합리적인 추측이다.
해방 후 송진우의 행보는 해방 전 자치 운동-민족 개량주의의 연장선 위에서 봐야 할 것이다. 자치 운동-민족 개량주의가 '반민족주의'처럼 인식되지만, 민족의 발전을 표방했다는 점에서는 넓은 의미의 민족주의에 포함될 수 있다. 굳이 민족주의와의 관계를 따지자면 자본주의적 가치를 앞세운다는 점에서 '탈민족주의' 성향 정도를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민족 개량주의 비판을 위해서는 민족주의보다 사회경제적 기준이 더 적절할 것 같다. 민족 개량주의는 토지와 자본의 과도한 집중 등 식민 통치의 구조적 문제를 저항 없이 받아들이는 입장이다. 식민지 체제에서 상대적 특권을 얻은 계층의 이익에 집착함으로써 계급 모순을 더욱 심화시킨다는 점이 민족 모순을 호도한다는 것보다 더 본질적인 민족 개량주의의 문제점이다.
식민지 시대에 민족 개량주의와 사회주의가 정면충돌한 것은 계급 모순에 대한 상반된 입장 때문이며, 서중석의 (2) 지적대로 체제적 성격의 대립이었다. 식민지 시대에는 민족 모순 아래 계급 모순이 자라나고 있었고, 해방은 민족 모순의 해결이면서 계급 모순 해결을 위한 기회였다.
좌우를 막론하고 중도파는 민족 모순 해결의 성과를 확고히 하기 위해 계급 모순에 관해서는 '가진 자'와 '없는 자' 양측이 양보하며 서서히 풀어갈 것을 주장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계급 모순 문제에 상황이 휘말려 해방의 당연한 소득으로 여겨졌던 민족 문제까지 오히려 악화되고 말았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꿈꾸는 투철한 공산주의자는 민족주의에 가치를 두지 않고 분단을 꺼려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익을 표방하던 해방 당시의 '가진 자'들 대부분은 민족이 갈라지고 식민지 시대의 악질 경찰이 사회를 다시 주름잡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는 기득권의 상당 부분을 양보할 용의가 있었으리라고 나는 믿는다.
분단은 좌익보다 우익의 실패였다. 그래서 해방 공간에서의 민족의 실패를 살펴봄에 있어서 나는 우익의 관점을 앞세워 보려고 한다. (☞바로 가기 : 필자의 블로그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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