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9월 10일
국립도서관에서는 그 동안 海印寺와 開城 등지에 소개시켰던 서적을 다시 가져다가 정리하는 한편 현재의 장서를 가지고 일반에게 공개 중인데 매일 4·5백 명의 열람자가 쇄도하고 있다.
그런데 8·15 이후에 서적 열람 경향은 정세의 변동을 따라 재미스러운 추이를 보여주고 있는 터인데 9월 10일 현재까지의 독서 경향은 의연히 문학 부문이 제일이고 그 중에도 영어회화와 露語 등 어학 방면의 서적 대출이 많은 것은 38도를 중심으로 남북으로 진주한 미소군의 영향의 하나로 추측된다.
다음 부문은 理學, 의학, 철학, 종교, 산업, 예술 등으로 나누어 건실한 독서 경향을 보여주고 있는데 개개의 서적으로 보면 河上肇의 <資本論入門>, 崔鉉培의 <우리말본>, <헤겔의 변증법>, <국가사회주의원리> 등이 독서자의 압도적인 환영을 받아 우리가 당면한 정치상 문화상 문제가 그대로 독서계에 반영되고 있다. (<중앙신문>, 1945년 12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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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재는 12월 15일이지만 취재는 9월 10일로 되어 있는 기사다. (<중앙신문>은 김형수, 황대벽, 이상호 등이 <조선상공신문>의 사옥과 시설을 넘겨받아 1945년 11월 1일 창간한 신문으로, 김용환의 만화와 박종화의 소설을 연재하는 등 큰 영향력을 확보했다. 이듬해 5월 이후 좌익계라는 이유로 우익 청년들의 습격을 몇 차례 받았고, 9월 6일 간부진이 미국 군정에 구속당하면서 정간 처분을 받았다. 1947년 봄에서 여름 사이에 폐간되었다.)
"국립도서관"이라 한 것은 소공동에 있던 조선총독부 도서관이 이름을 바꾼 것인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국립중앙도서관" 조에는 1945년 9월에 바뀐 것이라 하였고, 국립중앙도서관 홈페이지 "연혁"에는 1945년 10월 15일로 되어 있다. 어느 쪽이든 취재 당시에는 '조선총독부 도서관'이었을 텐데, 게재 시점의 명칭으로 바꾼 듯하다. '국립중앙도서관'으로 이름을 바꾼 것은 1963년의 일이다.
지속적 통계를 제시한 기사가 아니라서 매일 4~500명의 열람자라는 것이 해방 전에 비해 얼마나 늘어난 것인지, 대출 경향의 변화가 얼마나 큰 것인지, 정확한 이해는 할 수 없지만, 취재자가 강한 인상을 받았다는 사실은 알아볼 수 있다.
해방을 계기로 독서열이 크게 늘어났으리라는 것은 대개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억압에서 벗어나 자율적으로 미래를 열어나갈 수 있다는 전망 앞에서 지식과 정보를 얻으려는 노력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저절로 일어나는 추세였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 방향이다. 그 후 대한민국에서는 금서가 되었을 만한 책들이 "압도적인 환영"을 받았다고 했다. 작성자의 사상 성향이 반영된 표현일 수도 있지만, 당시의 일반 독자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만한 사실이었을 것 같다.
안재홍이 건국준비위원회(건준)에 대한 입장을 밝히는 성명을 다시 냈다. 8월 31일에 부위원장 직을 사퇴했고, 9월 4일에 재신임을 받았지만 사퇴의 뜻을 굽히지 않고 있던 상황에서 9월 8일에 한국민주당(한민당) 발기인 명의의 건준 비난 성명이 나오자 자신의 입장을 더 분명히 밝힐 필요를 느낀 것이다.
聲明書
朝鮮建國準備委員會와 余의 處地
朝鮮建國準備委員會는 8月 15日로써 발족하였다. 탄압과 혼란과의 교착하는 도중에서 강고한 독립적인 목적 의식으로 그 사명의 완수에 매진하여 온 것은 부인할 바 못된다. 余는 최초부터 이 신조에서 행동하였다. 현하 조선의 정치적 단계에서 余의 신봉하는 정견은 각계각층의 士女들이 초계급적 또는 초당파적인 처지를 견지하면서 하루 바삐 우리 3천만 민족대중에게 부과된 일민족 국가 건설의 대업을 완수하기에 총의 총력을 집결하는데 있는 것이니 모든 것을 이 목표에서 출발 발전 귀결시켜야 할 것이다.
즉 建準은 정강을 가진 정당도 아니요 그 운영자 자신들 때문에의 조각 본부도 아니요 따라서 다년간 해외에서 해방운동에 진췌하여 오던 혁명 전사들의 지도적 집결체인 해외 정권과 대립되는 存在도 아닌 것이다. 또 그 일시 당면한 임무로써 국내 질서의 자주적 유지와 대중생활의 확보와 및 신국가 건설의 기술적인 주비로서 각 방면의 전문적인 대책과 연구와 자료 자재의 보관 관리에 관한 공작 등등이다. 즉 사상 기술 방면에 걸치어 엄숙과감한 실천을 요하는 것이다. 余는 이 굳은 일념에서 총총 20일간 노력해 왔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余의 의도와는 배치되는 결과로 됨에서 余는 단연히 引責 免退 부위원장의 자리를 떠났다.
一. 초계급적 초당파적 견지에서 각계세력을 총하는 목표로 余로서의 최선을 다 하였다. 余로써의 만족할 성과는 아직 불가능에 가까운 사태이라 余의 인퇴는 당연하다.
一. 전술 기술적인 제 방면에 있어서도 余로서는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만치 조사 연구 입안 기획 등 제점에서 아직 다분의 미비가 있다. 余의 인퇴는 당연하다.
一. 해외정권은 그 지역 및 사상체계에 있어 아직 歸一되지 아니하였고 그 혁명전사로써의 功烈에는 각각 일률적인 존경과 우의를 가질 바이지만 余는 重慶 臨時政府에 최대한 임무를 허용하는 것이 당면필수의 정책이라고 믿는다. 重慶臨時政府를 전적으로 승인하느냐? 만일 이의 개조를 要하느냐? 는 今後의 사실문제로 밀어두고 重慶臨時政府를 기준으로 하루 바삐 신국가 건설정권으로 하여 급속히 국내질서를 확립하고서 통일민족국가 건설도정에서 些毫의 碍滯 없도록 함을 要함은 多言을 要치 않는 바이니 이 긴급당면한 정치적 요청에서 이를 지지하여야 할 것이요 현실 당면한 국제정국에의 具眼者로써 누구나 일치할 바이다. 모든 華美한 이론도 실천에서 국민대중에게 선악을 미치는 한 그는 지대한 과오인 것이다. 이 점에 관하여 余의 처지는 建準에서 전면적으로는 허여되지 않는다. 余는 인퇴를 요한다.
상술 제점에서 첫째 인책의 의미로 둘째 主見相異로 인한 모순의 소각을 위하여 建準副委員長의 任을 떠났고 사정에 의하여는 전면적 인퇴까지도 用意하고 있다. 余는 建準을 떠날 때 있어 그곳 동지제씨에게 석별의 정이 깊고 특히 외경하는 呂運亨氏에게는 정에서 不忍할 수 있고 呂運亨 또한 公人으로써 競하신 바 있을 줄 확신한다.
追記
余는 建準을 사실상 퇴각한지 이미 4日 以來의 일이다. 例의 朝鮮國民黨은 이미 합동위원을 뽑고 外地 各系統과 합동준비중이므로 그 위원장의 責을 해제하였고 일절 政治干與를 끊었다는 余는 방금 각방면과 아주 무관계한 야인에 돌아갔다. 世間無根한 풍설과 오보에 현혹 없도록 늦으나마 一言한 것이다.
9月 10日 安在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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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지지해 달라는 주장을 담은 성명서가 아니다. "세간의 무근한 풍설과 오보"를 막기 위한 해명이다. 안재홍(1891~1965년)은 식민지 시대에 기독교계, 교육계, 언론계에서 활동했고, 상해 임시정부 관련으로 3년간(1919~22년) 옥고를 치르는가 하면 신간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고 민족개량주의에 입각한 것으로 알려진 물산장려운동에도 관여했다. 40대 중반 이후에는 민족주의 역사학에 노력을 쏟았고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2년간(1942~44년) 옥고를 치렀다. 넓은 의미의 민족주의 운동 모든 분야에서 활동했던 사람이다.
8월 16일에 송건호가 그린 안재홍의 "걸인 같은 모습"을 소개했는데, 무슨 뛰어난 일을 할 '능력'에 대한 기대감보다 민족주의를 벗어나는 짓을 어떤 것도 할 리가 없는 '지조'에 대한 신뢰감을 주는 인물로서 당시 사람들의 안재홍에 대한 인식을 알아볼 수 있다. 건준을 이끄는 입장에서도 건준이 기능적 임무만을 맡음으로써 중경 임시정부의 정치적 권위와 대립하지 않고 보완관계를 맺기 바란 것은 힘보다 신뢰를 중히 여기는 그의 개인적 태도가 연장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연전부터 나는 보수주의자를 자처하고 있는데, 보수주의의 스승으로서 안재홍에 대한 관심이 갈수록 깊어진다. 나는 보수주의자의 첫 번째 조건이 '지나친 욕심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주어진 사회경제적 조건에 대한 만족이 안분자족(安分自足)의 겸손이 아니라 지속 불가능한 특권구조에 대한 집착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것은 보수의 이념이 아니라 수구의 책략일 뿐이다.
한편, 보다 정의롭고 평등한 사회를 추구하는 진보적 노력도 현실을 무시하는 오만에 빠진다면 '사람 사는 세상'의 기반조건을 악화시키는 부작용을 가져올 수 있다. 안재홍과 같은 중도 노선이 입지를 잃은 것이 1945년 이후 비극적 역사 전개의 출발점이라고 나는 본다. 극좌와 극우의 '적대적 공생'은 당시의 대다수 사람도 원치 않았고 지금의 대다수 사람도 슬프게 여기는 비극의 씨앗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 파탄의 과정을 더듬어보는 것이 이번 작업의 큰 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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