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9월 8일
그저께 소개한 한민당 성명서를 작성한 사람이 장덕수(1894~1947년)로 보인다고 한다.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서중석 지음, 역사비평사 펴냄), 197쪽)
선동적이고 악의적인 정치 논설에 익숙해진 지금 사람의 눈에도 정말 대단한 물건이다. 사실의 조작과 왜곡에서 야비한 표현에 이르기까지 황색 언론의 전범으로 삼을 만한 이런 문서는 1945년 9월 당시의 공식 문서로는 이례적인 것이었다. 한민당의 노선이 어떠한 것이냐에 앞서 출범 당시 이런 표현을 공공연하게 구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한민당의 성격을 더 분명하게 드러내준다.
작성자를 장덕수로 보는 근거를 찾아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수긍이 간다. 처음 이 성명서를 보고, 이런 '독극물'이 당시에도 생산되고 있었는가, 깜짝 놀라면서 속으로 "설마 송진우가?" 하는 생각이 스쳐갔다. 송진우 비판을 꽤 접해 왔지만, 그에게서 이런 막가파 글은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장덕수라면 그럴싸하다. <친일파 99인-2>(돌베개 펴냄) 215~222쪽에 수록된 서중석의 "장덕수, 근대화 지상주의에 매몰된 재사"에는 '재사'로서 그의 면모가 여실히 그려져 있다. 여기서 '재사'의 조건은 재주가 많은 점 외에 도덕성이 약하다는 점도 포함할 것이다.
이 성명서의 공격 초점에 놓인 여운형과의 인연을 생각해도 착잡한 생각을 금할 수 없다. 1918년 상해에서 25세의 장덕수는 33세의 여운형을 따라 신한청년단 결성에 참여했다. 이듬해 초 장덕수는 국내에 잠입했다가 체포되었는데, 몇 달 후 여운형이 일본을 방문할 때 통역으로 장덕수를 지명해서 석방시키고 비서로 일본 여행에 대동했다.
이 여행을 통해 여운형은 특급 명사로서 명망을 세웠고, 장덕수도 자유로운 활동의 근거를 확보했다. 그러나 장덕수는 이 시점에서 여운형과 갈라졌다. 1920년에 장덕수는 동아일보 창간에 주필로 합류해서 동아일보의 민족 개량주의를 주도했고, 1923~36년의 미국 체류 이후에는 극단적 친일 활동에 나섰다. 식민지 시대 말기의 친일 활동에서 장덕수의 웅변은 이광수의 글과 함께 쌍벽을 이뤘다.
한민당의 핵심 간부 장덕수가 여운형의 비서 출신이라는 사실도 여운형이 얼마나 거물이었는지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다. 여운형의 대한민국임시정부(임정) 경시가 건국준비위원회(건준)의 행로에 하나의 중요한 변수였는데, 여기에도 여운형의 경력에서 유래하는 문제가 있었다.
여운형은 1914년부터 남경 금릉대학에 유학하고 있다가 1918년 상해에서 신한청년단을 만들어 김규식을 파리 강화회의에 파견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던 중 3·1운동을 맞았다. 따라서 임시정부 수립에도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는데, 그는 '정부' 명칭이 실제에 맞지 않으니 '정당'을 결성하자고 주장했다. 이 주장이 통하지 않았고, 또 황실 우대 등 시의에 어긋나는 노선을 초기의 임정이 택하자 그는 임정과 거리를 두고 지냈다.
나는 1919년 상해의 독립운동가들이 '정부'의 이름을 세운 것이 꼭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그러나 '정당' 형태를 취하자는 여운형의 주장에 더 타당성이 컸고, 실제 임정의 행로에서 드러난 문제들도 이에 기인한 것이 많았다고 생각한다. 명분과 실제가 맞지 않는 문제 때문에 기회주의자들이 끼어들 여지를 만들어준 것이다.
절반 채워진 잔을 놓고 "절반이나 있네." 할 수도 있고 "절반밖에 없네." 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해방 당시의 임정은 절반 채워진 잔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임시정부'라는 명분에 실제가 따라오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그러나 한편 26년간 명분이나마 지켜온 것은 훌륭한 자산이었다. 그런데 여운형에게는 아쉬운 면이 더 크게 느껴졌던 것 같다.
여운형이 임정을 부정하거나 무시한 것은 결코 아니다. 문자 그대로 경시한 것이다. 임정의 역량만으로 상황을 감당하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건준을 키우려 애쓴 것이다. 그리고 '건국동맹'을 내세운 것이다.
서중석 등 내가 깊이 신뢰하는 연구자들도 대개 건국동맹의 실체를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것 같다. (서중석, 앞 책 106~112쪽) 그러나 회의적으로 생각할 점이 많다고 나는 본다. 무엇보다, 국내 근거가 거의 없던 임정의 약점을 안성맞춤으로 보완할 수 있는 국내의 대중운동이라는 점에서, 건국의 발판으로 삼기 위해 만들어낼 동기가 있었던 존재다.
해방을 1년 앞둔 1944년 8월에 건국동맹이 결성되었다고 관계자들은 증언한다. 가입자 수가 7만 명 설도 있고 1만 명 설도 있다. 1944년 10월에는 강령도 작성되었다고 한다. 외곽 단체로 농민동맹도 거느리고 있었고, 해외 연락 활동도 했다고 한다.
전쟁 말기 상황에서 대중적 독립운동이 얼마나 가능했을까? 내가 보기에는 여운형이 관여했던 모든 움직임이 해방 후에 '건국동맹'이란 이름으로 묶어진 것이지, 그 모든 활동이 당시에 '건국동맹'의 이름을 내걸고 행해진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안재홍의 참여 여부가 단적인 예다. 이만규 등 건국동맹 관계자들은 안재홍도 참여했다고 한결같이 증언했다. 그러나 본인은 이것을 부인했다. 이것이 일반적인 양상 아니었을까?
해방 직전에 여운형과 관계를 가졌던 사람들의 대부분은 '건국동맹'의 존재를 모르고 있다가 해방 후에 그 관계를 '건국동맹'이라고 부를 때 부정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건국동맹을 띄우는 여운형의 동기가 민족을 위한 선의라 믿기도 했을 것이고, 또 그에 관여된 것이 자신의 경력에 도움이 된다고 믿은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안재홍처럼 고지식하게 "건국동맹이요? 저는 모르는 건데요?" 하는 사람은 드물었을 것이다.
건국동맹의 이름과 강령은 여운형 주위의 아주 좁은 범위 내에서만 논의되고 있었을 것이다. 해방 후 여운형의 가장 중요한 협력자로 나선 안재홍은 해방 전에도 여운형과 마음을 털어놓고 지내는 사이였다. 여운형의 측근들도 모두 안재홍을 '동지'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안재홍은 '건국동맹'이란 이름을 들은 적이 없다는 것이다.
나는 여운형의 선의를 믿는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 중에는 그의 선의를 믿지 않거나, 속으로는 믿으면서도 일부러 무시하려 드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의 선의를 믿은 사람들도 그가 건국동맹의 실체를 과장 내지 조작했다는 의심은 품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나 역시 아무리 여운형의 선의를 믿어도, 그나마 뚜렷한 실체가 있는 임정에 힘을 실어주는 대신 다른 힘을 만들어내려 한 여운형의 시도에는 불확실한 상황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든 허물이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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