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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패거리' 정치의 원조는 <동아일보>?

[해방일기] 1945년 9월 16일

1945년 9월 16일

9月 6日 발기회를 거행한 韓國民主黨에서는 16일 오후 3시부터 市內 慶雲洞 천도교대강당에서 당원 1600名 참집하에 결당식을 거행하였다. 국기배례, 애국가 제창, 사회 白南薰으로부터 개회사가 있은 후 金炳魯를 의장에 公薦하고 식을 진행하여 元世勳으로부터 제의한 '우리 海外臨時政府要人諸公과 태평양방면 육군최고지휘관 겸 연합군총사령관 맥아더원수에 대한 감사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가결하고 李仁이 제의한 긴급건의안

1) 조선은 국제 관계상 美·蘇 兩軍에게 남북으로 분단 점령된 바 이것은 불편불행한 일임으로 미국 군 당국에 교섭하여 하루바삐 통일적 행정 상태가 실현되도록 할 것.
2) 현 행정 기관에 임시적이나마 일본인 관리를 殘置시킴은 불안과 침체를 초래하니 공정하고 有爲한 인물을 조선인 중에서 채용할 것.

을 상정하여 만장일치 가결한 다음 金度演으로부터 大韓民主黨과 韓國國民黨이 합동하여 今日에 至한 경과 보고, 趙炳玉으로부터 國內海外의 정세 보고가 있고 선언 강령 정책을 결정한 다음 張德秀의 인도로 당원 전체 총기립 裡에 선서가 있었다. 이어서 의장으로부터 同당기구에 대한 설명이 있고 同당영수로 李承晩 徐載弼 金九 李始榮 文昌範 權東鎭 吳世昌 7氏를 추대할 것을 제의, 가결하고 대의원 300명을 선거 후 내빈 축사가 있고 대한 독립 만세를 3창하여 동4시 45분 폐회하였다.

◊ 綱領

1) 조선 민족의 자주 독립 국가 완성을 기함
2) 민주주의의 정체 수립을 기함
3) 근로대중의 복리 증진을 기함
4) 민족 문화를 앙양하여 세계 문화에 공헌함
5) 국제 헌장을 준수하여 세계 평화의 확립을 기함

◊ 政策

1) 국민기본생활의 확보
2) 호혜평등의 외교 정책 수립
3) 언론 출판 집회 결사 及 신앙의 자유
4) 교육 及 보건의 기회 균등
5) 重工主義의 경제 정책 수립
6) 주요 산업의 국영 又는 통제 관리
7) 토지 제도의 합리적 재편성
8) 국방군의 창설

(<매일신보>, 1945년 9월 17일)


(☞바로 보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민당은 우익 정당이었지만 그 5대 강령 중에 3) "근로대중의 복리 증진을 기함", 8대 정책 중에 4) "교육 及 보건의 기회 균등", 6) "주요 산업의 국영 又는 통제 관리", 7) "토지 제도의 합리적 재편성" 등 진보적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이 정도는 당시의 우익 인사들도 사회의 당연한 진로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유산 계층에 더 유리한 노선을 속으로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양식 있는' 인물로 행세하려면 속셈을 드러낼 수 없었을 것이다.

우익은 '민족'을, 좌익은 '민주'를 내세우며 맞섰지만, 수화불상용(水火不相容)의 정면 대결은 아니었다. 좌익 중에서도 민족을 무시하고 계급에만 집착하는 골수 공산주의자는 백안시당했다. 우익도 민주주의는 당연히 주장했다. 좌익이 정치적 민주주의에 그치지 않고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도 중시하는 경향이 있었다는 정도의 차이였다.

안재홍의 9월 4일 성명서에 "정당 결성 문제에 있어서도 이상으로서는 전 민족 단일당에 있겠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민족주의 진영은 반드시 대동단결하여 그 방면의 총 역량을 집결하는 것이 절대 필요한 것"이라 한 대목이 있다. 다당제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어색하게 들릴 수 있는 말이지만, 당시로서는 상식적인 관점이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당이 국가를 영도하는 것이 일반적 원리였고, 독립의 길을 앞서서 걸어가는 것으로 한국 지식인들이 보아 온 인도의 국민회의도 중요한 사례였다.

이 시점에서 안재홍이 "민족주의 진영"이라 한 것은 누구를 배제한 뜻인가? 국제공산주의를 신봉하는 '극좌'와 친일파의 딱지를 뗄 수 없는 '극우'일 것이다. 극좌는 민족의 가치를 경시하고, 극우는 민족 사업에 참여할 자격이 없었다. 일본 지배로부터 벗어나는 시점에서 민족주의는 거의 모든 한국인의 합의를 모을 수 있는 깃발이었다. 이 깃발을 가급적 넓게 펼쳐 민족의 주류를 형성하면 극좌와 극우를 고립시켜 분쟁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것이 당시 민족주의자들의 일반적 생각이었다.

안재홍은 이어 "한동안 小黨分立은 필연한 현세이나 하루 바삐 집중 통일함을 요하는 터이오 통일도정에서 상호의 지장이 안 되도록 각각 선입적인 주견은 가지지 말아야 할 것"이라 했다. 분파 의식을 가급적 억제하고 대동단결의 길을 찾아가자는 것이다. 뜻이 같은 사람들이 당장 다 모일 수 없는 상황이니 손발이 맞는 범위에서 조그만 무리를 만들고, 그 무리들끼리 손발을 맞춰 더 큰 무리를 이뤄나가자는 현실적 제안이다.

안재홍이 국민당을 만들고 있을 때 한쪽에서는 한민당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한민당에는 안재홍과 지향을 같이 하는 민족주의자들도 많이 참여했다. 따로 정당 만들고 있던 사람들도 한민당에 많이 합류했다. 왜 안재홍은 여기에서 빠졌을까?

당시 한민당에 대한 안재홍의 언급은 확인한 것이 없다. 더 조사해 보겠지만 아마 없을 것 같다. 그는 다른 당파에 대한 비판을 극력 조심한 사람이니까. 9월 10일 건준 결별 성명서에도 그의 절제된 표현 방식이 잘 나타나 있다.

참여하지 않은 것, 그것이 바로 한민당에 대한 안재홍의 의사 표현이었다. 그는 친일파에 대해 가급적 포용적 자세를 취할 것을 시종일관 주장했다. 그러나 무조건 포용일 수는 없었다. 민족주의에 순응하면서 친일 행위를 반성하는 것이 포용의 조건이었다. 친일을 통해 쌓아놓은 자금력과 영향력을 휘두르며 주도권을 쥐겠다고 달려드는 것은 민족주의 진영에 포용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한민당은 결당도 안 된 상태에서 발기인 명의로 9월 8일 건준-인공 비난 성명을 냈다. 건준의 책임자로 있던 입장에서 차마 동조할 수 없는 일이었겠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걸음마는커녕 눈도 못 뜬 갓난아기가 욕질부터 하고 나선다는 사실에 있었다. 그것은 자금력과 조직력을 가진 세력이 결성 단계의 한민당을 움직이고 있었다는 뜻이다.

9월 8일 성명서에 대해 발기인 중에서 항의가 있었고 그에 대한 추진자 측의 사과가 있었다고 한다. 이 단계의 한민당은 폭넓은 스펙트럼을 포용하고 있었다. 서중석은 <한국현대민족운동사연구>(역사비평사 펴냄, 265쪽)에 이렇게 썼다.

지금까지의 연구에서는 대부분이 한민당을 부정적인 세력으로만 보고 있지만, 한민당에 대해서도 객관적으로 고찰해볼 필요가 있다. 한민당은 해방 직후의 사회 상황을 반영해서 여러 세력이 다양하게 참여하였다. 한민당에는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도 참여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체로 볼 때 한민당은 8·15 이전의 민족개량주의를 계승하였으며, 일제 시기에 지주·부르주아지로 상층 계급에 속했던 일종의 지배 엘리트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이 때문에 한민당의 등장은 식민지적 경제·사회 구조의 재편이라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려웠고, 식민지적 경제·사회 구조의 잔존을 피부로 느끼게 하였다.


9월 8일 성명서는 결성 단계의 한민당에 조직력을 가진 주류가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자금력과 정보력도 가진 세력이었다. 여기에 참여한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은 이념의 힘을 가지고 현실의 힘을 설복해 새 국가 건설의 길에 참여시키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동아일보계를 주축으로 하는 한민당 주류는 정치공학에 의존하며 정치철학을 물리쳤다. 그렇게 해서 현실 정치는 조직과 돈에 의해 결정된다는 대한민국 정치의 원리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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