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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런던 올림픽의 진짜 주인공, 이상백
[해방일기] 1948년 6월 14일
1896년 창설된 올림픽대회는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국제 행사의 하나가 되었다. 창설 초기에는 참가 주체가 개인이었는데 1908년 런던 대회부터 국가별 참가가 제도화되었다. 엄밀히 말하면 '국가'보다 '민족'이 참가 주체였다. 독립 국가를 갖지 못한 민족
김기협 역사학자
2013.06.14 07:20:00
파시스트 조병옥의 맨얼굴
[해방일기] 1948년 6월 12일
미군정 경찰 총수로서 조병옥이 대단히 독선적이고 난폭한 인물이었다는 사실은 그의 언행 도처에서 확인된다. 그 정도를 넘어 그가 반민주적 사고를 가진 인물이었다는 사실도 1946년 4월 7일 일기에 인용했던 아래 발언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우리 경찰 진용은 사회 추천
2013.06.12 09:35:00
미군 독도 폭격…16명 즉사·10명 중상
[해방일기] 1948년 6월 10일
독도 폭격 사건을 보도한 첫 기사는 6월 11일자 <조선일보>의 "국적 불명의 비기(飛機)가 투탄(投彈) 기총소사, 독도서 어선 파괴 16명이 즉사"였다. 6월 8일 오전 11시 반경 국적 불명의 비행기가 독도에 폭탄을 투하하고 기총소사를 가해 어선 20여 척이 파괴되고 어
2013.06.10 07:27:00
미국과 일본, 누가 더 악질인가?
[해방일기] 1948년 6월 7일
현역 복무 기간이 짧아진 요즘은 군대 풍속도 많이 바뀐 모양이다. 1970년대에는 육군 병사 복무 기간이 만 3년에 육박했는데, 지겹게 길었다. '고참' 대우가 각별했던 것도 그 긴 시간에 변조(變調)를 좀 넣어주지 않으면 견뎌내기가 너무 힘들고, 따라서 사고 위험
2013.06.07 07:36:00
"하지 사령관, 우리 헌법은 우리가 만듭니다"
[해방일기] 1948년 6월 5일
1948년 6월 2일자 <경향신문>의 "헌법을 신중 선택, 통일의 길을 열어두라-하 중장 국회에 공함(公函)" 기사에는 전날 하지 사령관이 막 개원한 국회의 의원들에게 보낸 편지 내용이 '공함'이란 이름으로 게재되었다. "본관은 귀하가 조선 정부 조직과 조선 국
2013.06.05 10:58:00
박근혜, 하지보다는 똑똑한 사람이기를…
[해방일기] 1948년 6월 3일
지난 금요일(5월 31일) 박근혜 대통령이 청와대 출입기자단과의 오찬 자리에서 남북 관계 경색의 책임을 북한 측에 미루고 당국 간 대화에 앞서 민간의 대북 접촉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는 뜻을 밝혔다고 한다. 이 뜻에 따라 개성공단 재개나 6·15 기념행사를 위한 민간 접
2013.06.03 07:51:00
산파 외출 중에 몸 푼 미군정, 왜?
[해방일기] 1948년 5월 31일 :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오늘 국회 개원식이 있었습니다. 민족의 경사처럼 떠들어대는 사람들이 있지만 선생님 마음은 착잡하시겠죠. 지난 3월 하순 민정장관직 사직서를 제출했던 것이 '가능 지역 선거'에 반대하는 뜻을 가진 입장에서 그 선거를 주관하는 위치에 서 있을 수 없다는 것 아
2013.05.31 10:35:00
산파 외출 중에 태어난 남조선 제헌국회
[해방일기] 1948년 5월 29일
5월 29일 오전에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폐원식이 창덕궁 비원에서 열렸다. 1946년 2월 어울리지 않는 '민주의원'이란 이름으로 출범한 이 군정사령관 자문기구는 1946년 12월 입법의원이 설립된 후로는 기능이 사라졌는데도 형식상 존속하고 있다가 이제 제헌
2013.05.29 08:07:00
왜 미국은 해방 조선을 그리도 괴롭혔나?
[해방일기] 1948년 5월 27일
남조선 과도 정부 법령 제193호로 유흥음식세, 입장세, 골패세의 세령 개정이 1948년 5월 22일 발포되었는데 '골패세(骨牌稅)'가 무엇인지 어리둥절하다. 5월 27일 윤호병 재무부장이 발표한 개정 내용 중 골패세에 관한 설명은 이런 것이었다. 골패세는 지제(紙製)
2013.05.27 06:18:00
분단 건국의 길 위에 선 민족주의자들
[해방일기] 1948년 5월 24일
분단 건국 저지를 위한 남북 협상 운동의 상징적 인물로 오늘날의 한국인은 대개 김구를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김구가 남북 협상 운동에 나선 것은 1948년 1월말 유엔 조선 위원단에 의견을 제출하면서부터였다. 그때까지 남북 협상 운동을 추진해 온 것은 김규식
2013.05.24 07:02: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