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6월 10일
독도 폭격 사건을 보도한 첫 기사는 6월 11일자 <조선일보>의 "국적 불명의 비기(飛機)가 투탄(投彈) 기총소사, 독도서 어선 파괴 16명이 즉사"였다. 6월 8일 오전 11시 반경 국적 불명의 비행기가 독도에 폭탄을 투하하고 기총소사를 가해 어선 20여 척이 파괴되고 어부 16명이 즉사하고 10명이 중상을 입었다는 보도였다. 이튿날 <동아일보>와 <경향신문>은 사망 9명, 행방불명 5명, 중상 2명, 경상 8명의 인명 피해를 보도했다. 같은 날 <서울신문>에는 피해자 장학상('배학상'이라고 한 자료도 있음)의 증언도 실렸다.
"내가 본 비행기 수효는 11대였는데 처음에는 산에 떨어뜨리는 줄 알았더니 배와 바다에 떨어뜨려 우리는 오도 가도 못하고 폭격을 받았다. 나중에는 비행기에서는 배로 향하여 총까지 놓았다. 나는 구사일생으로 간신히 살아나왔다."
이 기사만 보고도 당시 사람들은 미군 비행기라는 사실을 거의 틀림없이 알았을 것이다. 그곳에 비행기를 보낼 수 있는 것은 미국과 소련뿐인데, 소련이 그곳에 보냈을 가능성은 원체 희박할 뿐 아니라 만약 그랬다면, 아니 조금이라도 그럴 가능성이 있었다면, 지목하지 않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미 극동공군사령부에서는 이 폭격이 자기네 소행인지 조사 중이라고 12일 발표했다.
"시인 반 부인 반-독도 폭격과 재일 미군 당국 담"
[동경 13일 AP 합동] 미 극동공군사령부에서는 지난 8일 독도 근해에서 조선 어선대가 폭격을 받은 사건에 미국 비행기가 관련되어 있을지 모른다고 12일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조선 어선이 폭격을 당하였다는 수역을 포함한 해역 일대에서 실탄 훈련을 할 계획이 서 있었고 그 훈련은 8일부터 시작하기로 되었었다. 조선 어선 조난 사건에 미기가 관련된 것인가를 밝히기 위하여 방금 조난 현장 사진을 조사 중이다."
그런데 조선 경찰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내습 비행기는 4발기로 날개에 원과 별의 표장이 있었다 한다. (<경향신문> 1948년 6월 15일)
하지는 6월 15일에야 담화를 발표했다.
"본관은 독도 폭격 사건의 보도에 접하여 여러분과 함께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조선 주재 미군 사령부에서는 즉시로 철저한 조사를 명하였는데 상금 조사 중에 있습니다.
본 사령부에는 조선에 기지를 둔 또는 조선 부대에 배속된 비행기는 동 지역에 없었고 또 폭격한 사실도 없고 따라서 본 사건에 하등의 관계가 없다는 것을 이미 인정하였습니다. 일본에 기지를 둔 미기의 본 사건 관련 여부에 대하여서는 방금 극동공군사령부와 극동총사령부에서 조사 중에 있으므로 동 조사가 완료되는 대로 즉시 사건의 전모가 발표될 것입니다. 만약 미기가 관련되었다는 사실이 판명되면 미군 당국으로서는 사망자의 유가족 및 피해자를 위하여 만반의 대책을 강구할 것을 조선 국민에게 보장하는 바입니다. 또 미군이 그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 판명되면 그 책임은 도저히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동아일보> 1948년 6월 17일)
조선 주재 미군 책임은 없지만 다른 미군의 책임은 거의 시인하는 내용이다. 미 극동 공군의 소행이라는 사실은 분명해졌는데, 어떤 잘못이 누구에게 있는지 조사 중이었던 것이다.
6월 17일자 신문에 게재된 것을 보면 하지의 담화는 15일 늦게 발표된 모양이다. 같은 15일 극동공군사령부 발표는 6월 16일자 신문에 보도되었다.
"우발적 폭격일 듯-미기 관련 여부 미확인-독도 사건"
[동경 15일발 UP조선] 미 극동항공대사령부에서는 일본해 중의 조선 어선 폭격 사건에 미국 비행기가 관련이 있는지를 조사한 결과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미국 항공대가 일본해에서 행한 폭격 연습에 관한 사진과 보고를 조사한 결과 아직 미군 비행기가 지난 6월 8일 11척 조선 어선 침몰에 대하여 책임이 있다는 것이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나 설혹 미기가 관련이 있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하더라도 이 폭격은 전연 우발적일 것을 확신한다. 조선 경찰이 그리고 이 지점은 소정의 폭격 연습장으로 얼마 전부터 폭격 연습의 목표로 사용되어 온 것이다.
8일 이 구역을 비행한 부대는 고공에서 비행하였으므로 암석 가운데 또는 부근에 있는 폭격장 범위 내외에 있는 어선을 발견하기가 불가능하기에는 곤란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미국 극동항공대에서는 이 날 총격 행동은 취하지 않았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동아일보> 1948년 6월 16일)
이어 6월 16일에 극동공군사령부의 조사결과 발표가 있었는데, 이것이 이후 사건에 대한 미군 측의 공식 입장이 되었다.
"과연! 독도 폭격기는 B29-어선을 도서로 오인-촬영한 사진으로 판명"
[동경 17일 AP합동] 미 극동공군사령부에서는 16일 독도 참변 사건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현장 촬영 사진을 심사한 결과 독도 근해에 있는 어선들은 B29 폭격기의 고도 폭격 연습 때에 암석으로 보이었던 것이 판명되었다. 조사한 바에 의하면 오키나와 기지를 출발한 B29 폭격기대가 폭격을 하기 30분 전에 정찰기가 6회나 독도 부근(북위 37도15분 동위 131도45분 지점)을 시찰하고 연습에 무방하다는 것을 보고하였던 것이다. 현지 부근에는 폭격 대상이 될 수많은 작은 섬이 있는 만큼 이 어선들도 섬으로 보이었던 것 같다.
B29 폭격대는 2만3000피트 상공에서 연습탄을 투척한 것이었으며 이들은 해상에서 아무런 선박도 보지 못하였다고 보고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폭격 30분 후에 정찰기가 촬영한 사진에 의하여 이 위험 지역 구내에 많은 작은 배가 있음을 발견하였다. 정식 조사가 끝나는 대로 완전한 보고를 상급 사령부에 제출할 터이다." (<경향신문> 1948년 6월 18일)
미군 측은 확인되기 전에는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았고, 확인된 뒤에도 완전히 확인된 사실만 인정했다. 섣불리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조심스러운 자세겠지만, 책임을 회피하려 드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결국 B29기의 폭격 연습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했으나 우발적 사고였고 기총 소사는 없었다는 주장을 끝까지 지켰다.
그런데 피해자들의 증언에는 미군 발표와 배치되는 내용이 많았다. 의도적 공격이었고 기총 소사도 있었다고 많은 피해자들이 확신하고 있었다. 미군이 끝까지 감추거나 속이는 것이 있다는 의심이 쉽게 잦아들지 않았다.
정병준은 <독도 1947>(돌베개 펴냄) 179~237쪽에서 독도 폭격 사건 관계 연구와 자료를 검토한 결과 우발적 사고였으리라는 점과 기총 소사가 없었으리라는 점을 인정했다. B29기는 전투기의 요격 위험이 없는 2만 피트 이상 고공에서 폭격하는 것이 정상이므로 어선을 폭격 당시 식별할 수도 없었고 기총 소사도 없었다는 것이다.
정병준은 그 대신 다른 의문들을 제기한다. 무엇보다, 폭격 연습 구역에 어민들이 들어가는 것을 막으려는 노력이 왜 없었냐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것이었다. 독도는 1947년 9월 16일 연합군최고사령부지령(SCAPIN) 제1778호에 의해 폭격 연습장으로 지정되었는데, 이 지령은 "오키(隱岐) 열도 및 북위 38도 이북 혼슈 지방의 서해안 섬 및 항구의 주민들"에게 폭격 연습 이전에 통보할 것을 명시했다는 것이다.
조선 주민들에게 폭격 연습을 통보하지 않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독도가 폭격 연습장이라는 사실을 주조선 미군에게조차 알리지 않고 있었다. 그 사실이 하지에게 통보된 것은 독도 폭격 사건이 터진 뒤인 6월 14일의 일이었다. 게다가 제5공군은 이 날 주조선 미군에게 독도 연습장 재개를 요청하는 전문을 보내고 있었으니 하지가 얼마나 열 받았을까. 6월 15일에 하지가 맥아더에게 보낸 전문에는 이런 말도 있었다. (<독도 1947> 189쪽에서 재인용)
"사건은 엄청난 정치적 중요성을 갖고 있으며 이 문제에 대한 한국인들의 모든 정치적 관심에 따라 본 사령부에 압력이 가중되고 있다. 이제 국회의사당에서도 완벽한 조사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통해 이 문제가 논의되고 있다. 어떻게 다루든지 간에, 공산주의자의 과중한 공격에 당면한 한국 내 미국의 위신은 이 사건 때문에 흔들릴 것이다."
하지 입장에서는 가히 날벼락이었다. 미군은 조선에서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만큼 인민의 눈에 억압자로 비쳐질 수 있는 존재였다. 미군 장병의 개인 범죄가 있으면 민심을 자극하지 않도록 엄벌에 처하는 시늉이라도 하고, 소요 사태에는 미군이 직접 진압에 나서는 일을 극력 피했다. 그런데 다른 미군이 자신에게 통보도 없이 조선 해역에서 폭격 연습을 하다가 조선인 어부들을 무더기로 죽이는 사태가 벌어지다니! 하지는 맥아더를 만나 수습책을 조율하기 위해 6월 21일 도쿄로 날아가야 했다.
민심 이반을 걱정한 미군정은 사태 수습에 전력을 다했다. 피해 보상은 신속히 이뤄졌다. 그러나 조선인에 대한 사과는 누구에게서도 나오지 않았다. 맥아더 사령부도, 하지 사령부도, 극동공군사령부도 이 사건을 '우발적 사고'로 규정한 것이다. 조선인의 분노와 거리를 좁히지 않은 채 이 사건을 넘기려는 미군 측 자세는 7월 1일 딘 군정장관 기자 회견에서의 문답에 나타난다.
문 : 독도 사건에 대한 미군 당국의 태도는 너무도 냉정하다. 공분을 느끼고 있는 조선 민족의 앞에 적절한 사과와 피해자에 대한 배상 조치가 있어야 할 것으로 아는데 귀관의 의견은 어떠한가?
답 : 이 문제는 군정 당국에서 조처할 성질의 것이 아니고 조선 주둔 미군 사령관의 권한과 처리에 속하는 사건이다. 이미 하지 중장도 이에 대한 사과를 하였다고 믿는다. 소청위원회에서 사건 책임과 피해 상태의 조사를 완료하고 돌아오면 다시 상세한 발표가 있을 것으로 믿는다. (<동아일보> 1948년 7월 2일)
여기서 말하는 하지 사령관의 사과란 위에 옮겨놓은 6월 15일자 담화를 가리킨 것이다. "만약 미기가 관련되었다는 사실이 판명되면"이란 조건을 붙인 '잠정적' 사과였다. 이제 판명된 사실을 보고 "사망자의 유가족 및 피해자를 위하여 만반의 대책을 강구"하는 것으로 미군의 책임을 다했다고 딘은 믿는다는 것이었다.
사실 하지는 극동공군과 맥아더로부터 사과를 받아야 할 입장이었다. 그가 책임 맡은 구역을 침해당한 것이니까. 진짜 사과할 책임은 극동공군과 맥아더에게 있었고, 하지에게는 그들의 만행을 막지 못한 부차적 책임만이 있었다.
'만행(蠻行)'이라고 했다. 독도 폭격은 우발적 사고가 아니라 만행이었다. 어선을 일부러 폭격한 것이 아니고 기총 소사를 하지 않았다는 것은 조종사들을 면책시키는 조건일 뿐이다. 독도를 폭격 연습장으로 지정하고 조종사들을 그리로 보낸 극동 공군 당국과 그것을 제대로 감독하지 않은 맥아더를 면책시켜 주지 못한다. 조선 어민들에게 통보도 없이 독도를 폭격한 것은 평화 시에 있을 수 없는 만행이었다. 주조선 미군에게조차 통보하지 않은 것은 관할권 침해였다. 하지는 극동 공군과 맥아더를 미국 정부에 제소해야 했다.
독도 폭격이 만행이었다는 사실은 드러나 보이는 문제다. 그런데 정병준은 더 밑바닥 문제를 제기한다. 극동 공군이 독도를 연습장으로 지정한 까닭이 무엇인가?
독도에 대한 일본인의 야욕과 이에 대한 일부 미국인의 동조가 독도 연습장 지정의 배경에 있었던 것이 아닌가 정병준은 추측한다. 정황 증거만 있을 뿐, 확증은 없는 추측이다. 그러나 정황 증거라도 상당히 강력한 것이고, 달리 이해하기 어려운 사실들을 설명할 수 있게 해주는 추측이다. 정병준의 추론 일부를 옮겨놓는다.
그런데 왜 SCAPIN 1778호가 일본의 정치상-행정상 권리가 정지되고, 일본 선박-선원들이 13해리 이내 접근 혹은 접촉이 허용되지 않는 독도에 일본 어민들이 가지 말아야 한다고 규정한 것인지에 대해서 여러 가지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그중 하나의 가능성으로서 일본 외무성 등이 직간접적 방식의 공작력을 발휘했을 경우를 상정할 수 있다.
이미 1947년 6월 일본 외무성은 (…) 허위 사실에 기초한 팸플릿을 통해 일본의 독도 영유권을 주장했던 것이다. 즉, 1947년 4월 일본 어부는 독도에 불법 상륙해 독도가 자신의 어구라며 한국 어부에게 총격을 가했고, 1947년 6월 일본 외무성은 독도가 일본령이라는 팸플릿을 만들어 연합국에 대대적인 홍보 작업을 벌였다.
일본 외무성의 주장은 주일 미정치 고문이자 연합군 최고 사령부 외교국장이던 지일파 윌리엄 시볼드에게 액면 그대로 수용되었다. (…) 일본 정부가 주일 미군으로 하여금 독도를 군사 시설로 활용하게 함으로써 독도에 대한 일본의 영유권을 강화하고, 미군을 통해 증거문서를 확보하는 책략을 구사하지는 않았는가 하는 의문에 도달한다.
왜냐하면 1948년의 독도 폭격은 1947년의 독도 폭격 연습장 지정 때문이었는데, 같은 상황이 1951~1953년에도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1951년 일본 외무성과 일본 국회가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기 위해 벌인 공작은 1947년의 독도 폭격 연습장 지정에 끼친 일본의 영향력 유무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 제13회 중의원 외무위원회(1952. 5. 23)에서 야마모토 도시나가 위원은 "이번 일본 주둔군 연습지 설정에서 다케시마 주변이 연습지로 지정되면 이를 일본의 영토로 확인받기 쉽다는 발상에서 외무성이 연습지 지정을 오히려 바란다는 얘기가 있는데 사실이냐"라고 질문했고, 이시하라 간이치로 외무성 정무차관은 "대체로 그런 발상에서 다양하게 추진"한다고 답변했다.
1951년 체결된 미일 안전 보장 협정의 후속 조치로 행정 협정(SOFA)이 체결되었고, 이의 이행을 위한 미일합동위원회가 설치되었다. 미일합동위원회는 1952년 7월 26일 '군용 시설과 구역에 관한 협정'을 체결했는데, 이는 일본 외무성이 추진한 대로 독도를 미군의 공군 훈련 구역으로 선정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는 독도를 일본령으로 만들고자 주일 미군을 활용해 증거 문서를 확보하려는 일본 외무성 책략의 구현이었다. 그 후 1952년 9월 한국 어선과 한국산악회 독도 조사대에 대한 미군기의 폭격 사건이 재발했다.
(…) 일본 외무성의 계획에 따라 독도를 일본령으로 전제한 토대 위에서 주일 미공군 훈련장으로의 지정, 일본 어민을 내세운 독도 훈련장 지정의 해제, 이후 한국 정부를 향한 미일 교섭 과정 공개 등이 진행되었다. 미군은 독도 접근이 불법인 데다 원천 봉쇄되어 있던 시마네 현 등 일본 어민에게만 훈련 사실을 통보했고, 아무런 통보를 받지 못한 채 자국 어장에서 조업 중이던 한국 어선-어민들은 폭격에 희생되었다. 일본 외무성과 중의원은 거리낌 없이 이런 책략의 진행에 대해 논의했다. 미국은 이용당했고, 한국의 주권은 침해당했으며, 한국인들의 생명은 존중되지 못했다. (<독도 1947>, 233-236쪽)
우리는 독도가 일본 땅이라고 하는 일본인들의 주장을 이해하기 힘들다. 나부터 그렇다. 그러나 일반 일본인도 단편적으로 제시되는 일부 근거만 보면 독도가 일본 땅인 것처럼 생각할 수 있다. 독도에 대한 미군의 폭격 연습장 지정도 그런 근거의 하나다.
그런 근거만이 일본에서 횡행하는 것은 일본 사회의 문제고, 또 한국에서 일체 무시되고 있는 것은 한국 사회의 문제다. 각자에게 불리한 증거와 유리한 증거를 함께 검토해서 종합적 판단을 해야 영원한 평행선을 면할 수 있다. "독도는 우리 땅"임을 굳게 믿는 사람들도 정병준의 책을 보면 같은 주장을 하더라도 훨씬 더 합리적인 방법으로 할 수 있을 것이다.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믿는 일본인을 만나도 설득을 시도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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