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금요일(5월 31일) 박근혜 대통령이 청와대 출입기자단과의 오찬 자리에서 남북 관계 경색의 책임을 북한 측에 미루고 당국 간 대화에 앞서 민간의 대북 접촉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는 뜻을 밝혔다고 한다. 이 뜻에 따라 개성공단 재개나 6·15 기념행사를 위한 민간 접촉을 정부가 불허할 것으로 보인다.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신뢰 프로세스' 이행의 의지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 측이 이 의지를 무시하고 개성공단에서 "생각지도 않게 모든 합의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고 안타까움을 표했다고 한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몇 주일 전 나는 진행 중이던 군사 훈련을 장차 조금이라도 축소할 제스처를 보인다면 '신뢰 프로세스'의 실마리로서 큰 효과를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적은 일이 있다. (☞관련 기사 : 박근혜만이 '한반도 핵전쟁' 막을 수 있다) 그런 제스처는 없었고, 북한 측에서는 대통령의 '신뢰 프로세스' 의지에 대한 믿음을 얻지 못한 것 같다.
지금이라도 '신뢰 프로세스'의 실마리를 풀 의지가 대통령에게 있다면 관계 경색의 책임을 북한 측에 미루는 데 너무 힘을 들이거나 민간 접촉을 가로막는 것이 과연 현명한 태도일지 의문이다. 민간 접촉을 비롯해서 접점이 많아야 실마리가 자연스럽게 나타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리고 책임 문제를 놓고 대립 의식이 너무 강하면 실마리가 설령 나타나고 놓쳐버릴 위험이 큰 것 아닌가? '신뢰 프로세스'를 대통령이 전매특허처럼 독점하려 한다면 그것은 상대가 없는 신뢰, 혼자서 자기 자신만을 믿는 신뢰에 그치고 말 것이다.
같은 날 익명의 '정부 당국자'가 "북한 군부가 5년 주기로 실시하는 개성공단 총화를 실시한 것으로 파악됐다"며 "이 자리에서 개성공단이 북한 체제 유지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취지의 비판적 의견이 다수 개진되며 '폐쇄가 불가피하다'는 쪽으로 결론이 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는 발언이 몇몇 매체에 실렸다.
개성공단 폐쇄를 비롯한 남북 관계 경색이 북한 지도부의 의지에 따른 것일 "가능성이 크다"는 정황 증거를 제시한 것이다. 익명으로 나오는 이런 추측성 발언에서 정부 전체가 '북한 책임론'에 매달려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만약 정부에게 대화 의지가 있다면 관계자의 이런 발언을 통제할 것이기 때문이다.
65년 전 북한의 송전 중단을 둘러싸고도 비슷한 상황이 펼쳐졌다. 1947년 6월 남북 간에 맺어진 전력 협정은 1947년 6월 22일자 <동아일보>에 이렇게 보도되었다.
"전력 문제 해결-양 대표 간 협정 수(遂) 성립-남은 물자, 북은 8만 킬로 송전"
해방 이후 1945년 8월 16일부터 1947년 5월 31일까지 북조선으로부터 남조선에 공급되어 온 8억3767만8737킬로와트의 전력에 대한 1633만4735원으로 추산되는 대가의 지불과 금후의 조치를 원만히 해결 짓고자 지난 13일부터 동 18일까지 남북 조선 대표와 미소 양국 대표가 평양에 회합하여 상의한 결과 남조선에서 일본으로부터 배상받는 기계와 기타 물자로 지불하도록 상호간 협정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북조선에 지불된 기계와 기타 물자는 북조선 각지의 발전소 시설을 확충 개선케 될 것이므로 남조선으로 현재의 3만5000킬로와트에서 8만 킬로와트씩 송전을 증가하며 또 완전 복구된 후에는 앞으로 10만 킬로와트까지 전력을 증가하여 주기로 합의를 보았으며 지불될 기계와 기타 물자는 오는 8월까지에는 북조선에 교부하기로 되었다.
금년 6월 1일부터 명년 5월 31일까지의 기간 중 북조선에서 남조선으로 공급할 전력 요금은 매월 계산하게 되는 동시 동 협정이 만기되기 1개월 전에 쌍방에서 이의가 제기되지 않을 때에는 자동적으로 1개년 동 협정이 연장되기로 되었다 한다.
이 협정의 정확한 내용을 찾아보지 못했지만 1948년 5월의 송전 중단 사태 때 양측에서 나온 주장 속에서 대충 짐작할 수 있다. 이 협정에는 남북의 조선인 대표와 미소 양군이 모두 참여했다. 이 협정 전, 즉 1947년 5월 31일까지의 송전 대가는 액수가 결정되어 몇 달 내에 지불하기로 약속되었다. 그리고 그 이후의 송전 대가는 협의하여 결정하기로 했다.
그런데 남측은 1948년 4월까지 지불이 약속된 대가의 일부만을 지불했다. 북측이 20퍼센트 미만이라고 주장한 데 대해 미군정에서는 훨씬 더 많이 지불했다고 주장했지만 그래도 약속의 절반에 미달하는 액수였다. 그리고 북측에서는 북조선인민위원회가 새 협정의 주체가 되겠다고 하는 것을 미군정이 거부해서 새 협정이 맺어지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북측은 5월 10일 평양방송을 통해 5월 14일까지 "전력 문제를 책임지고 해결할 수 있는 남조선 조선인 대표"의 평양 방문을 요청하면서 불응할 때는 송전을 중단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러 아무도 평양에 가지 않았고(미군정에서 가로막아 못 간 것인지 여부는 확인하지 못했다.) 5월 14일 정오에 송전이 끊어졌다.
이 사태에 임해 5월 15일자 <경향신문>에는 조선전업사 측의 낙관적 전망을 담은 기사가 실렸다.
"별 통양(痛痒) 없다-조선전업사 측 담"
14일 오전 12시부터 북조선으로부터의 송전은 절단되었으나 당일 오후 1시부터는 벌써 당인리발전소에서 발전이 되어 서울 시내를 중심으로 근방의 송전은 아무 이상이 없다. 그리고 이 날 오후 1시부터는 인천 미군 발전함으로부터도 발전이 되었다는 통지를 받았다. 북조선으로부터의 송전이 절단된다 하여도 인천 부산 등지에 있는 미군 발전함을 비롯하여 청평 영원 섬진강 당인리 등 7개소의 발전소는 한 시간 이내에 발전을 개시할 수 있으며 이 전력을 합하면 남조선 일대에 약 8만 킬로와트의 송전을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다소 부족되는 곳은 있으나 남조선 산업 기관에 이르기까지 별 지장이 없다.
이남의 발전 시설을 모두 가동하면 8만 킬로와트를 생산할 수 있으니 북으로부터의 송전 중단이 아프지도 가렵지도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랬나? 송전 중단이 2주일째 되는 5월 28일자 같은 신문에 실린 기사는 이와 전혀 다른 현실을 보여준다.
"한심타 발전량 점차 감소-그러나 긴급 방면은 모두 확보된다"
북조선으로부터 송전이 단절된 지 2주일이 경과함에도 불구하고 쌍방의 태도는 서로 강경하여 언제나 송전이 복구될 것인지 이렇다 할 교섭 성과를 보여주지 않아 애꿎은 백성만 애태우고 있다. 남조선의 전력으로써 자급자족을 못할 것이라면 무슨 선책이 있어야만 할 것인데 그와 반대로 남조선 발전량은 점차 감소의 일로를 걷고 있고 이로 말미암아 생활필수품의 가격은 고등하여만 가니 우선 전력문제 해결이 일일이 천추로 기다려짐이 요즈음 백성의 심경이 되고 있다.
현재 남조선의 최대 수요량은 12만 킬로와트로 되어 있으며 적어도 7만5000킬로와트는 확보되어야만 된다고 한다. 그런데 남조선 수력화력 발전소의 총 능력을 최대한도로 발전한다면 이 수요량을 확보할 수 있다고 하는데 기계 고장과 석탄 부족 등 여러 가지 난관으로 부득이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나마 비까지 내리지 않아 2만 킬로와트 청평 발전소는 27일부터 4천 킬로와트밖에 발전할 수 없게 될 것이라 한다. 각 발전소의 발전량을 26일 현재로 보면 다음과 같다.
청평 8000 / 섬진강 10000 / 영월 18000 / 부산발전함 8000 / 부산화력 2000 / 인천발전함 2000 / 당인리 7000 합계 55000.
이 숫자는 남조선 최소 수요량보다 2만 킬로와트, 최대 수요량보다 2분지 1이 못되고 있다. (…) 서울 지구만 보더라도 최대 7만 킬로와트, 최소 4만5000킬로와트는 확보되어야 하는데 경전에서는 2만2000킬로와트로 치안 수도 교통 통신 관계 특수시설 등에만 겨우 확보할 정도라 한다. 이로써 의식주에 직접 영향을 주고 있는 방직공장 정미소 등에 종전의 3분의 1의 전력을 공급하고 있었으나 최근에 와서는 정전이 되는 때가 더욱 많아 생산을 하지 못할 경우가 빈번하다 한다.
이런 심각한 사태를 미군정은 왜 초래하고 방치하느냐는 불만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하지 사령관이 코르트코프 북조선주둔소련군사령관에게 보낸 편지를 5월 22일 공개한 것은 이 불만에 대한 대응일 텐데, 대응이 잘 되었을 것 같지 않다. 5월 23일자 <경향신문>에 게재된 편지 내용 중 앞부분을 옮겨놓는다.
"친애하는 코르트코프 장군,
1948년 5월 14일 정오를 기하여 북조선으로부터의 남조선에 대한 송전은 단절되었습니다. 북조선을 관리하고 있는 소련사령관으로서의 귀하는 귀하의 점령지대 내의 제반 조치에 대하여 책임이 있습니다. 이 단전은 조선 민족의 장구한 역사상 최초로 실시된 거 5월 10일의 자유 선거에 있어서 독립을 갈망하는 의사를 표시한 남조선 내 2000여만 주민의 행동에 대한 보복적 수단으로 남조선 국민을 전율케 하려는 일 정치적 술략으로밖에 볼 수 없는 금반 고압적 조치에 대하여 귀하에게 항의를 제출하는 것은 본관의 의무입니다.
본관은 송전에 대한 정당한 지불을 위하여 누차 노력한 데 비추어 금반 귀하의 조치가 전연 부당한 것이며 전력 미불액에 관한 귀하의 성명은 그 조치 배후에 있는 의도를 은폐하려는 일종의 구실에 불과하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이러한 성명을 조선 국민은 물론 전 세계 자유국가를 기만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귀하가 과거 누차 서면으로 본관이 북조선인민위원회와 교섭하라는 요구도 역시 이 종류에 속한 것입니다. 귀하가 잘 알고 또 귀하가 누차 서면으로 발표한 바와 같이 양 점령군 사령관은 세계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독립 조선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는 각 점령 지대 내에 있어서 책임이 있습니다. 작하 개최되었던 전력 회담에 있어서는 각 사령부에서는 동 회담에 조선인 대표자를 참가시켰으며 그들의 결정은 미소 양 대표가 재검토한 후 승인하였던 것입니다. 앞으로의 회담도 이와 동일한 방법으로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은 본관의 확호한 주장입니다. (…)"
첫 문단에서 송전 중단 조치를 5·10 선거에 대한 "보복적 조치"로서 남조선 주민을 위협하는 하나의 "정치적 술략(術略)"이라고 규정했다. 그러고는 대가를 지불하라는 요구도, 북조선 인민위원회와 교섭하라는 요구도 모두 이 술략의 "의도를 은폐하려는 일종의 구실"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고통받고 있는 주민들을 이런 주장으로 납득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정말로 생각한 것일까? 엄청난 바보 아니면 대단한 악질이라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된다. 박근혜 대통령이 하지 사령관보다는 똑똑하고도 착한 사람이기를 비는 마음 간절하다.
송전 중단 상태를 살펴보면서 정태헌이 <문답으로 읽는 20세기 한국 경제사>(역사비평사 펴냄) 202~203쪽에 미군정의 경제 정책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 놓은 내용에 깊은 공감을 느낀다.
해방 후의 급선무는 각종 자원과 노동력, 생산력을 고갈시켰던 식민지 자본주의 유산을 극복하고 재건 정책을 통해 일제하에 억압되었던 잠재력을 평화 산업으로 집결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점령 당국인 미군정이 세계 냉전 체제에 대응하고 동아시아의 전후 처리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남한을 일본 등에 비해 주변적 변수로 설정하고 있었다는 점이었지요. 따라서 남한의 경제 재건에도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특히 적산 기업에 대한 부실한 관리는 생필품 부족을 가중시켰습니다.
적산 혹은 귀속 재산이란, 해방 때까지 일본인들이 조선에서 갖고 있던 기업체, 부동산, 유무형의 동산과 주식 및 지분 등을 말합니다. 1941년 말 현재 일본인 회사의 자본이 91퍼센트나 될 정도로 조선 경제는 압도적으로 일본 자본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적산 공장이 원자재 결핍, 대체 설비의 어려움, 자금 부족 등과 더불어 미군정의 관리 부실로 제대로 가동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미군정이 임명한 관리인도 책임감이 떨어졌고요. 일제 시기부터 축소 재생산이 불가피했던 상황에서 해방 후 자재와 자금까지 조달되지 못하면서 생산 회복이 어려웠습니다.
게다가 미군은 퇴각하는 일본인들이 기계 시설이나 재고 원료를 팔아치우는 것을 막지도 않았고, 일본인 기술자를 잔류시켜 공장 가동에 나서도록 하지도 않았습니다. 방임된 초인플레 속에서 생산적 투자보다 물자난에 편승하여 생산 시설과 자재를 불법으로 내다 팔아 축적을 꾀하는 투기꾼들이 날뛰어서, 경제 재건은 더욱 어려웠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리 원조 물자가 들어와도 생산적으로 활용되기 어려웠습니다.
(…) 또한 북한과의 경제 단절이 남한 경제에 미친 여파도 컸습니다. 남북 교역 규모는 1949년 3월 국방부가 전면 중단시킬 때까지 대외 무역에 필적할 정도였습니다. 특히 반출액에 비해 반입량이 2배 이상이었습니다. (…) 중공업이나 전력 시설이 집중된 북한의 경제 재건 입지가 남한보다 유리했기 때문에 교역 단절에서 오는 충격도 남한이 훨씬 커서, 북한의 송전 중단(1948년 5월)으로 생산고의 4분의 3이 축소될 정도였습니다.
경제 분야를 충분히 다루지 못하는 것이 독자들에게 늘 미안했는데, 정태헌의 이 책을 권한다. 알기 쉽게 쓰고 균형도 잘 잡힌 서술이다. 해방 공간을 다룬 분량이 많지 않아 아쉽지만, 대략의 윤곽은 알아볼 수 있다.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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