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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스트 조병옥의 맨얼굴

[해방일기] 1948년 6월 12일

1948년 6월 12일

미군정 경찰 총수로서 조병옥이 대단히 독선적이고 난폭한 인물이었다는 사실은 그의 언행 도처에서 확인된다. 그 정도를 넘어 그가 반민주적 사고를 가진 인물이었다는 사실도 1946년 4월 7일 일기에 인용했던 아래 발언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우리 경찰 진용은 사회 추천에 의한 민선 기관이 아니고 그 직원은 군정관이 부여한 경무부장의 임명권에 의하여 그 신분이 보장된다. 사회와 타협하고 구합할 권리도 없고 의무도 없는 것이다. 군대와 같은 명령 계통을 가지고 규율적으로 복무를 다함으로써 의무를 다하게 되어 있다." (<동아일보> 1946년 4월 7일)

해방된 민족의 진로에 해로운 역할을 맡은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이 정도 확인해 놓고도 한 달 전(1948년 5월 5일) 일기에 옮겨놓은 김익렬 제9연대장의 회고 내용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 회고에 따르면 조병옥은 난폭한 파시스트일 뿐 아니라 극히 간사하고 음흉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1950년대 야당 지도자의 간판에 가려져 온 그의 진면목을 그 동안 많이 밝혀 왔지만, 이 정도까지 끔찍한 인물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오랜 시간이 지난 후의 개인적 회고라는 점을 감안해서 편향성의 여지를 두고 받아들였다.

그런데 6월 8일 조병옥의 제주도 사태 '진상' 발표를 보면 김익렬의 회고가 사실을 벗어난 것이 아니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부녀자 폭행 후 생매(生埋)까지-이렇다! 제주도의 인민 항쟁 진상"

조 경무부장은 공산 계열이 감행한 만행의 진상에 대하여 8일 대략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남조선의 질서를 교란하고 치안을 파괴하여 북조선과 같이 소련에 예속시키려는 공산 계열의 목적 달성을 위하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무차별 무자비한 폭동 만행은 총선거 실시에 따라 민중에 대한 공포심 주입과 단말마의 최후 발악으로 더 한층 포학과 잔인성을 나타내었으니 그 일례를 제주도 폭동에서 들면 다음과 같다.

폭동이 일어나자 1읍 12면의 경찰지서가 빠짐없이 습격을 받았고 저지리 청수리 등의 전 부락이 폭도의 방화로 타버렸을 뿐 아니라 그 살상 방법에 있어 잔인무비하여 4월 18일 신촌서는 6순이 넘은 경찰관의 늙은 부모를 목을 잘라 죽인 후 수족을 절단하였으며 대동청년단 지부장의 임신 6개월 된 형수를 참혹히 타살하였고 4월 20일에는 임신 중인 경찰관의 부인을 배를 갈라 죽였고 4월 22일 모슬포에서는 경찰관의 노 부친을 총살한 후 수족을 절단하였으며 임신 7개월 된 경찰관의 누이를 산 채로 매장하였고 5월 19일 제주읍 도두리서는 대동청년단 간부로서 피살된 김용조의 처 김성히와 3세 된 장남을 30여 명의 폭도가 같은 동리 고히숙의 집에 납치한 후 십수 명이 윤간하였으며 같은 동리 김승옥의 노모 김 씨(60)와 누이 옥분(19) 김중삼의 처 이 씨(50) 16세 된 부녀 김수년 36세 된 김순애의 딸 정방옥의 처와 장남 20세 된 허연선의 딸 그의 5세 3세의 어린이 등 11명을 역시 고히숙 집에 납치 감금하고 무수 난타한 후 눈노름이라는 산림지대에 끌고 가서 늙은이 젊은이를 불문하고 50여 명이 강제로 윤간을 하고 그리고도 부족하여 총창과 죽창, 일본도 등으로 부녀의 젖, 배, 음부, 볼기 등을 함부로 찔러 미처 절명되기 전에 땅에 생매장하였는데 그중 김성히만은 구사일생으로 살아 왔다. 그리고 폭도들은 식량을 얻기 위하여 부락민의 식량 가축을 강탈함은 물론 심지어 부녀에게 매음을 강요하여 자금을 조달하는 등 천인이 공노할 그 비인도적 만행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정도이다." (<경향신문> 1948년 6월 9일)


<제민일보> 4·3 취재반이 1988년 활동을 시작한 이래 4·3 사태의 진상이 많이 밝혀져 왔으므로 조병옥의 위 발표 내용이 얼마나 엉터리인지 지금 새삼스럽게 따지고 나설 필요는 느끼지 않는다. 다만 저런 내용을 경찰 총수라는 자가 공식적으로 발표한다는 사실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이었는지는 한 차례 생각할 필요가 있다.

당시의 일반인들이 저런 발표 내용을 곧이들을 것이라고 조병옥은 생각한 것일까? 아니라고 본다. 이 발표 며칠 후 제주 파견에서 돌아온 한 검찰관의 견해가 보도되었다.

"제주도 사건 원인-첫째는 경찰과 민심 이반, 해결엔 무력보다 행정력"

지난 5월 26일 서울로부터 제주도로 파견된 판검사 일행은 사건 처리를 끝마치고 지난 12일 공로로 무사히 귀경하였는데 검찰관을 대표하여 박근영 검찰관은 14일 다음과 같이 그 실정을 말하였다.

"제주도에는 일본에서 귀환한 동포가 많은데 그 중에는 공산주의자가 섞여 있으나 이번 사건이 전적으로 공산당의 지령에서만 발생했다고 볼 수는 없다. 사건 원인은 경찰이 민심과 유리된 것인데 사건이 발생하면 민중은 경찰에 신고를 아니하고 방관하며 심지어는 반항까지 하고 있다. 이 사실은 경찰이 제주도 특수 사정에 대한 사찰을 등한시한 시책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최고 책임자는 사건 해결을 단시일 내로 수습할 수 있다고 말하였으나 수습은 무력으로 하는 것도 좋지만 먼저 민심을 수습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경찰력과 행정력을 통일하는 유능한 사람이 필요하다. 그리고 사설단체를 경찰력으로 이용한 데 대하여 사설단체에 대한 비난이 높아가고 있다." (<경향신문> 1948년 6월 15일)

경찰의 책임은 경찰 내에서도 부인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제주에 파견되었던 수도경찰청의 최난수 경감의 6월 21일 발언을 살펴본다.

"폭도 귀순은 가장(假裝)-장기 항전을 기도"

제주도 사건 수습 차 두 번째 현지에 출장한 최난수 경감은 21일 중간 보고를 하러 서울에 돌아왔는데 동씨는 제주도 현 사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최근 제주도를 시찰하고 돌아온 중앙의 경찰관 등도 폭동의 원인이 경찰에 있다고 하였는데 그것은 사실이다. 해방 직후 경찰 행정 책임자들의 부패로 말미암아 좌익 진영의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모든 조직체 훈련을 방임하고 제주도를 공산 혁명의 저수지로 만들게 하여 사상 정치 경제적 혼란을 이용하여 민중의 불평불만을 그 때 그 때의 투쟁 형식으로 폭발시켰다. 그와 같이 도민은 대소 폭발 사건으로 투쟁의 세력과 조직체를 완비하였다. 부패한 경찰은 모리배와 결탁하여 돈벌이에 눈이 어두워 이를 미연에 방지치 못한데 큰 원인이 있다.

현재의 수습 상황을 말한다면 폭도들은 5월 20일 이후 투쟁 방법을 변경하여 일부(약 2000명)는 귀순을 가장하고 일부 정예부대는 수개 부대로 분산하여 무장한 채로 산중에 도피 잠적 중이다. 말하자면 '장기 항전'에 돌입한 모양이다. 현재 제주도 경찰은 군경 1000여 명과 운수경찰 수백 명의 응원을 받고 있는데 완전 수습을 하려면 대다수의 강력 무장 부대의 응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동아일보> 1948년 6월 24일)


최난수가 어떤 인물인가? '해방 일기'에서는 장덕수 암살 사건 관계로 김석황을 체포하는 장면에 등장한 일이 있다.(1948년 1월 16일) 그리고 장차 반민특위 파괴에서 큰 공을 세울 인물이다. 수도청장 장택상의 심복 중 하나로, 4·3 사태가 터지자 좌익 사찰을 위해 제주에 파견되었던 것이다.

그런 '반공투사' 최난수의 보고조차 조병옥의 발표보다는 비교가 안 되게 점잖고 합리적이다. 도대체 조병옥은 누구의 보고를 받고 폭도들의 그토록 참혹한 만행을 그려내게 된 것일까? 김익렬의 회고에 나오는 것처럼 앉은 자리에서 멋대로 상황을 지어내는 탁월한 창작능력을 가진 것이었을까? 도대체 그는 누가 읽어주고 곧이들어주기를 바라고 그런 황당무계한 발표를 했던 것일까?

조병옥의 6월 8일 발표가 하지 사령관과 딘 군정장관 등 미군정 수뇌부 몇몇 사람을 상대로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5월 5일 '최고수뇌회의'에서 조병옥은 다른 모든 사람을 무시하고 딘 한 사람만을 상대로 (영어로) 이야기한 것으로 김익렬의 회고에 그려져 있다. 앞에 앉아 있는 연대장이 공산주의자라고, 그 아버지의 사주를 받은 것이라고, 돌아서서 확인만 하면 탄로날 거짓말을 태연하게 늘어놓은 것으로 김익렬은 회고했다.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이다. 그래서 김익렬의 회고에 착오나 과장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런데 6월 8일 발표를 보면 그 회고도 사실대로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조병옥은 사실 여부에 관계없이 그저 딘이 만족할 만한, 미군정 수뇌부가 정해놓은 방침을 뒷받침해 주는 말만 하면 되는 입장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다.

미군정은 여러 가지 무리한 정책의 핑계로 '공산주의자들의 위협'을 내세우고 있었다. 제주도에서 일어난 사태에는 이 핑계를 정당화해 주는 호재로 받아들일 만한 측면이 있었다. 사태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이 통치권자로서 공식적 책임이었지만, 공산주의자들의 위협이 현존하고 실재하는 위협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데 이 사태를 이용할 동기도 있었다.

반공의 명분에 이용하기 위해 제주도를 '공산 혁명의 저수지'처럼 만들기로 미군정과 경찰 수뇌부의 방침이 일찍부터 정해져 있으리라고 볼 만한 대목이 많이 있다. 그러지 않고는 1947년 3·1절 발포 사태 이후 제주도 사정을 악화시키기만 해온 일련의 조치를 이해하기 힘들다. 어리석음만으로는 도저히 설명이 되지 않는다. 나는 섣부른 '음모설'을 좋아하지 않지만 4·3 사태 발발 이전과 발발 초기의 상황에서 미군정과 경찰의 조치는 합리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것이 너무나 많다.

조병옥의 6월 8일 발표도 그런 예의 하나다. 무엇을 위해 증오심과 공포심만을 부풀리는 그런 해괴한 황색 선전을 내놓았나? 민심 안정을 위해서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다. 효과적인 해결을 위해서라고도 말할 수 없다. 그러니 반공 정책 강화를 위해 제주도민을 희생시키려는 책략이라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점령 3년 동안 미군정은 친일파와 유산 계층을 기반으로 한 단독 건국 세력과 유착 관계를 맺고 있었고, 단독 건국 세력의 전위대가 경찰이었다. 남조선이 외부 세계와 절연된 고립 지역이었다면 미군정과 경찰의 폭력 독점상태는 무한히 계속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계의 이목이 있었다. 미국은 남조선의 단독 건국을 통해 영향력을 유지하려고 유엔을 이용했지만 유엔 이용이 공짜는 아니었다. 다른 회원국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타당성을 인정받아야 했고 내키지 않는 찬성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반대 급부가 있어야 했다. 유엔을 대표한 조선위원회가 공의(公義) 실현을 위한 충분한 힘을 가진 기구는 아니었지만, 미군정과 경찰의 비행을 견제하는 얼마간의 힘은 갖고 있었다.

6월 7일 상해에서 서울로 돌아온 유엔위원회는 5·10 선거에 대한 평가를 아직 확정하지 않고 있었다. 경찰에 의한 선거 자유 분위기 침해가 부정적 평가의 첫 번째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되고 있었다. 특히 무조건적 좌익 탄압이 두드러진 문제였다. 이 무렵 장택상과 조병옥이 잇달아 좌익 취체의 합리적 기준을 내세운 것은 유엔위원회의 눈치를 본 것으로 이해된다. 장택상은 6월 8일에 이런 성명서를 내놓았다.

"지하 운동은 싫다-파괴 말고 당당 이론으로 싸우라"

수도관구경찰청 장택상 총감은 8일 "좌익 운동자에게 고함"이라는 대요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이번 수도경찰청의 기구 개혁에 따라 다소 경찰 조직에 이상이 있습니다. 다름 아니라 근자 좌익 진영에서 사실 아닌 착각을 일으키고 있다. 경찰이 무차별로 좌익 관계자를 무조건 탄압하는 줄 오인하는 것이다. 이보다 더 큰 오해가 없다. 나는 무엇보다도 좌익 운동자가 지하 운동으로 들어가는 것이 싫다. 해방된 조선에서 당당히 이론 투쟁을 하고 민중을 계몽한다면 그야말로 이상적 민주주의이다. 동족이 상쟁하는 살인 방화 기타 남조선에서 감행하는 악질분자의 범죄만은 용서 없이 실력으로 박멸하겠다. 내가 수도 치안 책임자로 있는 한 이론 투쟁 운동선상에서 활동하는 동포에게는 절대 자유와 평등을 보장할 것을 맹서한다.

폭력을 피하고 이론과 계몽으로 천하의 공론에 호소하여 각자의 진영 세력 획득에 힘쓰라. 이제까지 경찰에서 찾던 좌익 범죄자 즉 살인범과 방화범 이외에는 전부 불문에 부치겠다. 그대들은 이 정책에 순응하여 남자답게 나와 경찰의 온정을 재인식하라. 경찰은 그대들을 포옹할 용의가 있다. 그러므로 경찰은 속이지 않을 것이니 믿고 외선(外線)에 나와 제가끔 자기 이념에 따라 건국 노선에 매진하자. 나의 중대한 결의인 만큼 그대들도 경솔히 생각 말고 협력하기를 바란다." (<경향신문> 1948년 6월 9일)


1946년 5월의 정판사 사건 이래 경찰의 소행을 보아 온 독자에게는 어처구니없는 소리로 들리겠으나, 이런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태연히 하는 것이 장택상의 주특기다. 끝 문장에서 자신의 "중대한 결의"라고 하는 대목에서는 또 한 차례 실소를 금할 수 없었지만.

이것으로 부족했는지 이튿날 또 한 차례 성명을 발표했다. "폭동을 종용하는 삐라 외 이론 전개로 구성된 삐라는 취체치 않음" 등 구체적 취체 기준을 밝혔는데, 그중 "경찰 비판은 취체치 않음. 정당한 비판 즉 근거 있는 경찰의 불법행위 등을 비판한 문자는 절대 포용함"이 특히 눈길을 끈다. (<경향신문> 1948년 6월 9일 "탄압 일관(一貫) 아니다 - 장 청장 좌익동포에 재성명")

비슷한 취지의 담화문이 6월 11일 조병옥에게서도 나왔다. 6월 13일자 <동아일보>에 게재된 요지를 옮겨놓는다.

"국립 경찰이 과거 좌익 운동에 대하여 무차별 탄압을 가하여 온 것 같은 오해를 일반 사회로 하여금 가지게 하고 경찰의 운영 방침이 돌연 변경된 것과 같은 악인상을 주고 있음은 천만유감이다. 그러나 경찰은 정치 운동과 정치 이념 그 자체를 탄압한 일은 없다. 오로지 정부의 행정을 방해하고 법과 질서를 교란시키는 행동만을 단속 또는 처단하여 왔다. 그러므로 해방 이후는 정치사범은 1건도 없다.

공산주의 운동에 대해서는 경찰은 다른 정치 운동에 비하여 엄중한 사찰을 실시함이 요청되어 있다. 소련이 공산주의 팽창정책을 세계적 규모로 포기하지 않는 한 그리고 조선에 대한 그의 야망을 철회하지 않는 한 또는 남로당 계열이 북로당 세력과 합류하여 5·10 선거의 결과로 성립된 국회의 임무인 정부 수립을 방해함에 있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고 하는 근본적 설계를 취소하지 않는 한 그 도당들의 합법적 운동은 도저히 기대할 수 없다고 보는 바이다. 본래 공산주의운동이란 그 본질상 합법적 운동을 행하기가 불가능한 까닭이다. 그러므로 남로당 계열의 운동에 대한 경찰의 방침은 종전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국립 경찰은 사찰을 엄중히 하여 폭동과 음모의 근거지 또는 파괴 운동의 원천이 되는 세포 조직을 경찰의 실력을 기울여 수사 섬멸하지 않으면 안 된다. 끝으로 좌익 운동에 대한 경찰 단속의 실례를 다음과 같이 몇 가지 들어 보겠다.

이렇게 모처럼 점잖은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지금도 경찰은 이해하기 힘든 일을 계속 벌이고 있었다.

"경북 상공국장 등 피검-극비리 준엄한 문초 계속"

대구경찰서에서는 10일 상오 11시경 돌연 백 대구부 후생과장 이하 약 30명의 부정 직원을 검거하고 연달아 11일에는 경북 상공국장 신현수 씨 이하 광공과장 동 계장 등 30명을 검거하였다고 하는데 피검 이유는 일체 비밀에 부치고 있다. 한편 대구서에서는 기자들의 출입을 엄금하고 준엄한 문초를 계속하고 있는데 탐문한 바에 의하면 모 정당 세포 조직 관계인 듯하다. (<경향신문> 1948년 6월 13일)

"200여 학생 피검"

[전주] 지난 16일부터 부내 각 중등학교에 검거 선풍이 일어나 남녀 학생 200여 명이 검거되었다. 탐문한 바에 의하면 이 학생들은 모 당의 지령에 의하여 동 당에 정보를 제공하는 동시에 학원의 적화를 도모하였던 것이라 한다. (<경향신문> 1948년 6월 20일)

대구의 공무원 대량 검거는 7월 초까지 계속, 모두 201명이 검거되어 "경북 관리 적색 사건"이란 이름으로 발표되었다.(<동아일보> 1948년 7월 16일) 남로당의 '특수세포조직반'으로서 그 직위를 이용해 온갖 나쁜 짓을 "표면합법적으로 감행"했다는 것이다. 도청 직원만 54명인데, 총원의 10퍼센트에 달한다. 전주의 학생들, 대구의 공무원들이 모두 살인범이고 방화범이었단 말인가?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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