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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미국은 해방 조선을 그리도 괴롭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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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미국은 해방 조선을 그리도 괴롭혔나?

[해방일기] 1948년 5월 27일

1948년 5월 27일

남조선 과도 정부 법령 제193호로 유흥음식세, 입장세, 골패세의 세령 개정이 1948년 5월 22일 발포되었는데 '골패세(骨牌稅)'가 무엇인지 어리둥절하다. 5월 27일 윤호병 재무부장이 발표한 개정 내용 중 골패세에 관한 설명은 이런 것이었다.

골패세는 지제(紙製)의 것 5원이던 것을 50원으로 그 외의 것 15원이던 것을 100원으로 마작 100원이던 것을 500원으로 각각 올리었다. (<경향신문> 1948년 5월 29일)

골패세가 무엇인지 검색해 보니 화투, 마작 등 도박 도구에 붙이는 특별소비세 같은 것으로 1931년 도입되었다고 한다. 식민지 조선에서 도박의 성행에 대한 대책으로 제정한 것이라는데, 마작 한 틀에 3원을 붙였다고 한다. 그 크기에 대해서는 전봉관의 <황금광시대>(살림 펴냄)의 '일러두기' 제2항이 좋은 참고가 된다.

1930년대 당시 1원의 법정 평가는 (…) 금 0.2돈이었다. 즉 10원이 금 2돈이었던 것이다. 금값만을 기준으로 환산하면 1930년대 10원은 오늘날 14만 원 정도의 가치가 있었을 것으로 볼 수 있지만, 당시는 오늘날보다 물가와 소득 수준이 낮았고 경제 규모도 훨씬 작았기 때문에, 10원을 가지고 오늘날 14만 원으로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다.

마작 골패는 재료에 따라 원가에 큰 차이가 있지만 특별히 사치스러운 것이 아니라면 당시 돈 1원으로 괜찮은 물건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3원씩의 골패세를 붙인다는 것은 "도박이요? 마음껏 하세요. 세금만 많이 내시고" 하는 격이니 중국에서 아편 팔아먹던 영국인 장삿속과 같은 틀의 전형적 식민지 정책이다.

그런 정책이 미군정 하에서 그대로 활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경향신문>은 1949년 3월 3일에서 6일까지 4회에 걸쳐 대한민국 재무부의 "세제 개혁 임시 조치안"을 게재했는데 3월 6일자 기사 중 골패세에 관해 "군정 시 세율을 대폭 인상하였으므로 현행대로 잉치(仍置)함"으로 되어 있는 데서 골패세가 미군정을 거쳐 대한민국으로 인계되는 모습을 본다.

'해방일기' 작업이 몇 달 안 남은 상황에서 제일 큰 아쉬움을 느끼는 문제의 하나가 경제-재정 분야를 충분히 다루지 못한 것이다. 애초에 자신 없던 분야이므로 사람들 만나 배워가며 진행했어야 하는데 일이 벅차 틀어박혀 지내다 보니 여의치 못했다. 다음 단계 작업에서 보완해야 할 측면이다.

마침 제193호 법령 발포를 계기로 나온 기사 중에 남조선 재정의 기본 문제점들을 드러낸 것이 있으므로 옮겨놓는다.

"졸렬한 증세보다 탈세자 단속 긴요"

과도 정부에서는 소득세령을 개정 실시하는 동시 유흥음식세 입장세 골패세 등을 고율로 올려 대중 구매력의 흡수로 적극적인 인플레를 시정하고 나아가 미군정 실시 이래의 적자 360억 원을 보충하며 아울러 앞으로 재생 조선 정부의 건실한 운영을 위한 국방 산업 경제 학교 쇄신 등 허다한 시책에 소요될 수백억의 재원을 확보하려 최후의 지혜를 짜내고 있다.

그러나 해방 이후 퇴폐한 기분이 관공서에 충만하고 과세 기술의 빈곤 담세 역량의 부족과 아울러 세무 인원의 능률적인 활동이 결여되어 많은 불합리와 비난을 자아내고 있다. 그중에서도 국고 수입의 태반을 차지하는 전매 수입과 운수 체신 등 각 기관의 운영이 활발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제품이 옆으로 흘러가고 유흥음식세는 그 8할가량이 업자들의 주머니 속에서 그대로 종적을 감추어 다시 인플레를 조성하는 악순환의 재료가 되었음은 참으로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비교적 과세하기 쉽고 또 탈세할 염려가 적은 부면에 고율 과세를 부과하지 않을 수 없는 오늘 재무 당국의 최대한 능력을 국민은 불쌍하게 여기는 동시 좀 더 학리와 실지를 연구 참작하기 바라며 국가 법령을 위반하고 사리사욕에 급급하여 탈세를 감행하는 반민족적 도배는 적발되는 대로 엄벌에 처하는 엄격한 태도를 견지하여서 국가 천년의 재정을 반석 위에 서게 하여야 할 것이다. (<동아일보> 1948년 6월 3일)


세입이 세출의 몇 분지 1밖에 안 되는 상황이 남조선에서는 해방 이후 계속되고 있었다. 화폐 증발과 미국 원조로 버티고 있었다. 북조선 상황은 세밀히 살펴보지 많았지만 소련 원조가 미국의 남조선 원조보다 훨씬 적었고 소련군표 형식의 화폐 증발도 훨씬 적었던 것은 분명하다. 해방 후의 경제-재정 문제를 북조선은 더 잘 극복해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1946년 4월 6일에서 19일까지 <동아일보>에 연재된 익명 특파원의 "북한 답파기" 일부 내용을 1946년 6월 28일자 일기에 소개했다. 이북 사정이 나쁜 것처럼 선전하기 위한 기획이지만 실제로는 이북 사정의 좋은 점을 적지 않게 보여주고 말았다. 무엇보다 시장이 활발한데도 사치풍조가 없다는 점이 눈에 띄었다. 시중 유휴 자금을 동결하는 화폐 개혁은 1947년 12월에야 시행되었지만, 1946년 3월의 토지 개혁 무렵부터는 이북에서 고급 소비시장이 위축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볼 수 있다.

1948년 4월 남북 협상 참가자들은 산업 시찰에서 대단한 감명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강영주는 <벽초 홍명희 연구>(창비 펴냄) 558쪽에 이렇게 적었다.

황해제철소를 시찰하고 북한의 산업 건설에 대해 높이 평가한 것은 홍명희를 포함하여 남북 연석 회의에 참가했던 남측 인사들의 공통된 반응이었다. 당시 평양방송 보도에 의하면 4월 24일 남북 연석 회의에 참석 중인 대표단과 남북조선 기자단 등 약 400명이 황해제철소를 시찰했는데, "제철소의 위대한 용광로 제강 시설들을 보고 일행은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최후까지 열심히 참관하는 홍명희 이극로 조완구 여운홍 강순 시들의 감격은 더욱 뜨거운 바가 있었다"는 것이다. 해방 후 산업 전반이 마비되다시피 했던 남한의 실정에 비추어볼 때 황해제철소가 가동하고 있는 장면은 홍명희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으며, 북의 지도부의 역량을 높이 평가하고 북한의 장래에 대해 낙관하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이런 성공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했을 텐데, 일본인 기술자의 활용도 그중 하나였을 것이다. 김성보가 <북한의 역사 1>(역사비평사 펴냄) 101~103쪽에 "경제 건설을 위해 남은 일본인 기술자들"을 '스페셜 테마'의 하나로 다룬 중에 1946년 8월 1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북조선 기술자 징용령'에 호응하여 10월 12일 결성된 북조선 공업기술총연맹 일본인부 이야기가 흥미롭다. 상당수 일본인 기술자들이 이북에 남아 있었고 이북 당국의 경제 건설 과업에 적극 협조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런 결의문을 냈다고 한다.

전쟁은 끝났다. 이것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일본의 군국주의자들과 독일의 나치스들과 이탈리아의 파스시트들에 의해 선전되고 조직되고 방화된 이 전쟁은 우리 형제와 무고한 세계 인민을 살육하고, 모든 산업 시설을 파괴하고, 우리를 빈곤의 밑바닥으로 밀어냈다. 이 소수 범죄자들에 대한 단호한 투쟁을 전개하여, 우리는 세계 평화를 확보함과 함께 민주주의 원칙에 의한 각 민족의 완전 독립을 열망한다.

이에 우리 일본인 기술자는 인민의 행복을 목적으로 하는 본래 기술적 사명을 온전히 하기 위해 민주주의 조선의 기초를 만드는 공업화 사업에 적극 참가 협력함과 함께, 이 사업을 통해 신일본의 건설에 절대적인 성원을 보내고 그 촉진을 기하는 것이다. 여기 북조선 공업기술총연맹 일본인부의 신발족(新發足)을 맞아 다시 선명(宣明)한다.


이런 명분만이 아니라 일본인 기술자들은 대단한 우대를 받았다. 인민위원회 과장급 월급이 1500원인데 일본인 기술자는 4500~6000원의 월급 외에 생필품과 주택을 제공받았다고 한다. 1946년 11월 당시 이북에는 868명의 일본인 기술자가(가족 포함 2065명) 활동하고 있어서 각지에 일본인 인민학교도 설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정병욱의 논문 '해방 직후 일본인 잔류자들-식민 지배의 연속과 단절'(<역사비평> 64호(2003년 가을))에 보이는 서울의 일본인들과 대비되는 모습니다.

일본인을 대하는 정책에서 남북 간의 차이가 있었다. 미군정은 진주 후 몇 달 동안 식민통치의 최고위층을 우대하며 남조선 통치의 노하우를 전수받는 데 주력했다. 그런데 이북에서는 기술자 집단을 우대하며 실제적 기술을 전수받았다. 해방 후 일본인은 남쪽에서는 미국인들에게 통치 기술을 가르쳐주고 북쪽에서는 조선인들에게 생산 기술을 가르쳐준 것이다. 이민족 지배가 계속된 이남과 조선인의 자치가 시작된 이북 사이의 차이 중 하나였다.

'가능 지역 선거'를 치르고 단독 건국을 향해 움직여 가는 이남에서 과연 미군정이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걱정되는 일이 여기저기 터져 나오고 있다. 미군정의 하곡 수집 정책에 대한 반발로 도지사가 사임하는 사태까지 벌어지고 있었다.

하곡 수집 반대를 이유로 최희송 경북지사가 사표를 제출하고 이 수리가 발표되자 각 국장들도 총사직을 하였는데 대구시보 사장 장인환은 즉시 상경하여 2일 만에 딘 장관과 비행기로 동행 내구(來邱)하여 27일에 지사 취임식을 거행하였다. 이에 따른 국장급의 진퇴가 주목되던 바 딘 장관의 알선으로 각 국장은 일단 사직을 보류했으나 장 지사 취임 이래 다시 진퇴 문제가 대두되어 이미 내무, 상공, 농무, 후생, 노동 각 국장은 장지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초지일관 사의를 표명하여 이미 결정적으로 사직이 예측되어 나머지 2, 3국장급도 이러한 공기로 말미암아 사직할 것으로 보인다. (<서울신문> 1948년 6월 4일)

2년 전 무리한 하곡 수집이 전국적 소요 사태의 온상이 되었던 일을 생각하면 주민의 원성을 뒤집어쓸 일을 피하고도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미군정 측으로서도 최대의 실패를 겪었던 식량 문제만은 다시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경상북도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하곡 수집량 많다-도 군수회의서 재고 진정"

하곡 수집을 앞두고 각 도에서 수집 할당량의 재고려를 요망하는 진정이 계속되고 있는 이때 경기도에서도 할당량이 너무 과중하다 하여 중앙청의 재고려를 진정하고 있다. 이번 진정은 28일에 열린 도내 군수회의석상에서 결정하여 29일 대표자 5명이 중앙청에 진정하게 된 것인데 그 내용은 작년도의 실적이 경작 면적 10만 정보에 48만 석이 수확되어 수집 할당량이 5만8000석이었는데 금년도에는 경작 면적 7만6000정보에 수확 예상고가 40만 석(이 예상고는 중앙청에서 계산한 것이고 도에서의 예상고는 29만9000석에 불과하다)으로 줄었음에도 불구하고 수집 할당량은 7만5000석으로 늘었다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이다. 더욱이 경기도의 금년 하곡 작황은 평년작의 7할 정도임에 비추어 진정의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한다. (<경향신문> 1948년 5월 30일)


농민들 사정은 절박했다. 추곡 생산도 북조선으로부터의 송전 중단으로 큰 타격을 입을 전망이 뚜렷해지고 있었다.

"경기도내 수리 관계 토지, 단전으로 피해 막대-이앙기까지 배전 못하면 55만 석 손실"

북조선의 단전으로 인하여 막대한 피해가 있는 중 특히 곡창 경기도내의 수리 관계 토지로서 단전 피해 몽리 면적은 1만8405정보나 된다고 하는데 수도기인 6월 이내에 전기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면 55만2171석의 피해가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즉 경기도 내 수리조합 44개소 중 전기양수기를 사용하는 곳이 15개소로 전기 관계로 현재 배수를 못하고 있는데 그 중 피해가 격심한 곳은 평택, 부천 등지라 하며 그리고 연백, 옹진 양 지대의 수리 단수로 인한 피해면적이 1만9494정보로 58만4820석의 피해가 예상되고 있는바 결국 앞으로의 해결여하에 많은 기대를 가지고 있다 한다. (<동아일보> 1948년 5월 29일)


농업보다 더 직접 타격을 받고 있는 것은 공업 분야였다.

북조선으로부터 송전이 중지된 후 인천의 산업 능률은 저하일로를 밟고 있다. 지난 15일부터 20일까지는 간간히 송전이 있었고 20일부터 주간만 송전이 계속되다가 25일 이후부터는 아주 계획성 없는 송전이 계속되어 인천의 350여 공장은 전면적인 마비 상태에 빠졌다.

한편 일반에서는 발전에 대하여 기대를 가지고 있으나 전 기능을 발휘하여도 겨우 6000킬로 미만의 발전을 유지할 정도인데 현재 기계 부족과 고장으로 인하여 1600킬로를 발전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이 발전선의 배전을 부평 애스캄과 부평수도 송림동 일부 등화용으로 충당되고 있을 뿐 공업용으로는 전연 가망 없다. 단전의 피해는 주동, 주물, 방직, 화학, 고무 공업에 혹심한 타격을 주고 있어 작금에 있어서는 이 계통의 생산은 전연 없고 대한제분과 식량영단에 대한 작업 불능은 민생 문제에 큰 위협을 주고 있다. 또한 소사수리조합은 단전의 영향으로 물이 없어 이앙기를 목전에 두고 부근 일대는 폐농 상태에 빠졌다. (<조선일보 1948년 5월 29일)


5월 28일자 <서울신문>에는 전 남조선 발전 상황이 보도되었다.

지난 14일 정오를 기한 북조선 당국의 송전 중지로 말미암아 남선당국은 비상조치로 각 발전소에 명령하여 오고 있으나 작금은 이나마 최악의 경우에 돌입하고 있다.

현재 남조선에서 필요한 전기의 최저 절대량은 약 8만 킬로인데 작 26일 상오 9시 현재 남조선 각 발전소의 발전량은 청평 8000킬로, 영월 2만2000킬로, 섬진강 1만3000킬로, 당인리 7520킬로, 보성 3000킬로, 부산 4000킬로, 발전선 8000킬로, 인천 2000킬로 등으로 겨우 6만5000킬로 대를 상하하고 있는데 이것조차 석탄 부족, 저수지 고갈, 부분품 부족 등으로 연명하기 곤란한 처지에 있다고 한다.

즉 청평발전소는 오랫동안 계속되는 한발로 저수지가 거의 고갈하여 금명간 비가 내리지 않으면 곧 휴전 상태에 빠질 것이고 영월발전소는 현재 피크, 앞으로 2만2000킬로까지 내고 있으나 삭도의 불완전 등으로 그 여명이 멀지 않고 당인리발전소도 석탄 부족 게이지글라스의 보충난, 일부 변압기의 소실 등으로 전도가 극히 우려되는 바 있으며 더욱 청평발전소의 기능 감소로 말미암아 지난 24일 하오 11시부터 대전 지구 이남으로부터 남북선 병행으로서 경인 지구에 1만 킬로 역송하고 있으나 종전 경인 지방에 전력 공급량은 주간에 있어 4만5000, 야간 5만5000이던 것이 현재 1만8000 내지 2만 킬로에 미급하므로 공장 지대는 전적으로 종전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등 일반 가정은 물론 생산 공장에도 단전 후의 영향은 막대하여 시급한 해결책이 있기를 일반은 간절히 요망하는 소리가 높아가고 있다.


발전선의 발전량이 8000킬로와트에 불과한 점이 눈에 띈다. 송전 중단 이전부터 중단 당시까지 미군정은 송전이 중단되어도 충분히 대응할 수 있다며 고자세를 취했다. 무엇보다 발전선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두 주일이 지난 이제 온 나라가 상상 이상의 타격을 받고 있었다. 자주통일구국생산위원회는 5월 28일 성명서로 미군정의 오만에 직격탄을 날렸다.

"금번의 북조선으로부터의 단전 결과는 남조선을 암흑천지로 화하고 민생을 일층 도탄에 빠지게 하였음에 불구하고 이에 대하여 눈을 감고 정치적 응수에 시종함은 도저히 그 진의를 알 수 없으며 일부 반역도들이 이에 장단을 맞추어 가며 남조선 단독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장담하면서 북조선과의 교섭 무용설을 유포시키고 있음은 일대 매국적 행위라 아니할 수 없다. 과연 남조선에서 자급자족 할 수 있을 것인가?

송전이 중단되자 당국에서는 남조선 각 발전소에 도합 8만5000킬로의 발전을 명령하였으나 실지로는 5만 킬로 미만이 발전되고 있을 뿐으로 이것을 남조선의 평균 수요 전력 9만 내지 11만 킬로에 비교하면 실로 4만 내지 7만 킬로나 부족되는 것이다. 더욱이 우선 배급을 하고 있는 수도, 전차, 통신을 제외하면 일반 공급은 4만 킬로 이하로서 이것으로선 야간 전등 수요량 5만 킬로조차 미흡하니 주야 작업을 요하는 공업은 완전히 정지치 않을 수 없으며 각종 산업은 완전히 파탄되어 가고 있다.

게다가 수력발전은 수리와 저수량 등 관계로 화력은 저탄량과 운탄 시설 불비로 현상 유지조차 곤란하니 전력은 더욱 감축될 것이 예상되고 있다. 이에 해결 방침은 단 하나뿐이니 그것은 즉 북조선 인민위원회에 대하여 남조선서 사용한 전기 대가만 지불하면 되는 것이다. 이에 우리는 군정 당국에 대해서 종래의 고집을 즉시 포기하고 진심으로 조선 민족을 위하여 본 문제 해결에 허심탄회할 것을 요청하는 바이다." (<서울신문> 1948년 5월 29일)


소련군도 미군도 일본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준다며 조선에 진주했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에는 조선인에게도 일본 제국주의를 도와 연합국을 괴롭힌 죄가 있다는 생각이 없지 않았을 것 같다. 일본군에게 많이 시달린 미군이 특히 그랬을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북 조선인과 대화하지 않겠다는 '원칙' 때문에 이남 조선인을 이렇게까지 괴롭힐 수 있을까?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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