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면적인 정권의 안정을 찾은 건국 첫해를 넘기고 1393년으로 접어들면서, 조선 왕조에서도 이른바 ‘역사 바로세우기’가 시작됐습니다.
이해 1월, 사헌부는 전 예문춘추관 학사 이행(李行)의 직첩을 회수하고 국문해 논죄하라고 글을 올렸습니다. 이행은 공양왕 때 지신사(비서실장)로 사관(史官)인 수찬(修撰) 직책을 겸했었는데, 이색과 정몽주에게 아첨하느라 이성계가 우왕, 창왕과 변안열을 죽였다고 거짓으로 꾸며 썼다는 것이었습니다.
임금은 기다렸다는 듯이 윤허했습니다.
이 문제는 앞서 춘추관의 웃어른으로 앉은 시중 조준이 전 왕조의 사초(史草)를 보다가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발단됐습니다.
이행은 “윤소종이 이숭인의 재주를 꺼려 조준에게 알리고 이숭인을 해치려 했다”고 썼는데, 조준은 해를 가리켜 맹세하고 자신이 그런 일을 하지 않았음을 극구 변명하면서 임금에게 고했습니다.
임금은 1388년 이후의 사초를 바치도록 지시해 직접 이행이 기록한 것을 보았습니다. 변안열과 우왕 부자가 모두 자신 때문에 죄도 없이 살해당했다고 적힌 것을 보고 임금이 말했습니다.
“변안열은 대간에서 처벌을 청하고 공양왕이 바로 목베기를 허가해 내가 미처 그만두도록 청하지 못했다. 또 신우, 신창 부자는 백관과 나라 사람들이 연명으로 목베기를 청하고 공양왕이 윤허했지만, 나는 처음부터 죽일 마음이 없었다. 못된 선비가 어찌 이렇게까지 썼을까?”
그러면서 이행이 공양왕의 측근 신하로 사건의 본말을 바른 대로 쓰지 않았다며 사헌부에 국문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실록이 정리하고 있는 우왕 부자에 관한 ‘진실’은 이렇습니다.
아들이 없던 공민왕이 신돈(辛旽)의 간사한 계책에 말려 아홉 살 난 신돈의 아들 우(禑)를 궁녀 한(韓)씨가 낳았다면서 강녕대군(江寧大君)으로 봉해 왕대비 궁전에 두었는데, 뒤에 공민왕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이인임 등이 공민왕의 옳지 못한 뜻을 찾아내고 그를 세워 군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1388년 회군 때도 이성계는 다시 왕씨를 세우려 했으나 조민수가 이색의 말을 빌어 우왕의 아들 창을 세우자고 주장했다고 합니다.
변안열은 우왕의 장인 이임에게 가담해 추방된 우왕을 복위시키려고 두드러지게 움직였는데, 나중에 공양왕이 왕위에 오르자 대간에서 변안열을 처벌하자고 청하고 공양왕이 이를 윤허해 사헌부에서 즉시 관리를 보내 유배지에 가서 목베었으며, 이성계는 이를 듣고 중지시키려 했으나 미치지 못했다는 주장입니다. 우왕 부자의 경우는 각급 신하들이 법으로 다스려 화근을 없애도록 청하고 공양왕이 윤허했던 것으로 정리했습니다.
이 문제는 두 달 이상을 끌다가 결국 3월 21일 이행에게 곤장 1백 대를 치고 재산을 몰수해 울진(蔚珍)으로 귀양보내는 것으로 결말지어졌습니다.
그러고는 왕씨들을 다독거렸습니다. 태조는 이행을 귀양보내고 나서 10여 일 지나, 고려 왕조의 제사를 받들게 된 공양왕의 아우 왕우와 함께 격구를 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내가 인척이라서 경을 용서한다고 말하지만 그렇지 않다. 과인이 경과 더불어 공민왕을 함께 섬겼고 서로의 교분이 얕지 않으니, 내가 어찌 경을 해치겠는가? 경을 마전군에 봉한 것은 주(周)나라에서 미자(微子)를 송(宋)나라에 봉한 것과 같다. 경의 형인 공양군은 욕심이 한이 없었기 때문에 오늘날 이렇게 됐을 뿐이다.”
태조는 왕우의 딸을 무안군 이방번의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태조와 왕우는 사돈간이었습니다. 왕우는 울면서 사례했다고 합니다.
5월 말에는 도평의사사에 이렇게 지시했습니다.
“예로부터 왕자(王者)가 처음 대업(大業)을 정할 때에는 전 왕의 후손이 자기에게 후환이 될까봐 곧잘 의심하고 꺼리며 반드시 베어 없애고자 했는데, 나는 그렇지 않다. 하늘이 과인에게 명해 한 나라의 군주로 삼았으니, 무릇 영토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나의 적자(赤子)다. 차별 없이 똑같이 사랑해 하늘의 뜻에 보답해야 할 것이다. 이미 공양군은 원하는 곳에서 편안히 살게 하고 처자와 종들도 예전처럼 모여 살게 했으나, 다만 그 일가붙이들은 섬에 들어가 거처해 살기가 고생스러우니 내가 매우 민망하게 여긴다. 거제에 있는 왕씨들은 시일을 정해 육지로 나오게 하고 각기 육지 고을에 안치해 생계를 이루어 떠돌지 말게 하라. 재능 있는 사람이 있으면 골라 관직을 주어 공도(公道)를 보이라. 도평의사사에 맡겨 빨리 시행하라.”
도평의사사에서는 경상도 안렴사와 거제 병마사에게 공문을 보내 왕씨 일족을 모두 육지로 나오게 해서, 완산(전주), 상주(尙州), 영해(寧海, 영덕)에 나누어 거처하게 했습니다. 왕씨 일족인 왕강, 왕승보(王承寶)는 도성으로 불러들였습니다.
1393년 7월에는 회군공신을 책록했습니다. 위화도 회군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공신으로 올림으로써 회군 자체의 정당성을 과시하려던 것이겠지요. 심덕부, 이화, 유만수, 최영지, 이지란 등 13 명과 죽은 시중 조민수, 배극렴, 그 한 달 전에 중국에 사신으로 가다가 죽은 삼사 판사 윤호 등이 1등공신에 포함됐고, 2등공신이 24 명, 3등공신이 15 명이었습니다.
태조는 며칠 뒤에 왕씨 일족인 전 밀직사 동지사 왕강도 회군 3등공신에 추가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왕씨 일족에 대한 회유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었을까요? 교지에는 회군에 대한 언급은 없이 40 년 동안 막혀 있던 조운(漕運)을 재개해 공을 세웠다느니, 습악제조(習樂提調)로서 음악을 혁신했다느니 하는 엉뚱한 얘기들만 늘어놓고 있습니다.
태조는 내친 김에 교서감 판사 송문중(宋文中)과 대장군 조경(趙卿)을 원종공신에 추가했고, 이해 7~8월에 여섯 건의 포상 지시를 잇달아 내려 문하부 판사 홍영통과 삼사 영사 안종원 등 원로에서부터 내시부 판사 김사행 등 내시들에 이르기까지 수백 명을 포상했습니다.
이때 귀양간 이행은 1397년 10월의 임금 생일 때 풀려납니다. 나중에 공양왕 일족의 신수에 대해 점친 사건으로 귀양간 이첨도 함께 풀려났고, 이인임, 조민수는 자손의 임용 제한을 풀어주고 직첩을 모두 돌려주려 했으나 사헌부에서 용서할 수 없다고 해 사면은 취소하고 못을 팠던 이인임의 집을 메우도록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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