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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과 놀다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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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과 놀다 <24>

불교를 폐하고 유교를 세우려니

불교와 유교. 고려와 새 나라의 차이점을 얘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입니다.

사실 불교와 유교는 고려와 조선에서 각기 나라를 이끌어가는 이념적 기반이었기 때문에 두 시기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한대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변화란 그렇게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특히 5백 년, 아니 신라 때까지 계산하면 1천 년 동안이나 생활의 모든 측면에서 바탕이자 잣대였던 것이 하루아침에 바뀔 수는 없습니다.

불교 사회에서 유교 사회로 넘어가는 조선 초기에도 그 이행(移行)은 단번에 이루어질 수는 없었습니다.

새 나라의 지도층이 된 공신 집단은 유학을 기반으로 한 신흥 사대부들이었습니다. 이들은 태조를 왕위에 올려놓자마자 빨리 ‘배’를 옮겨 타자고 재촉합니다.

건국 다음다음날 사헌부는 새 나라를 세우고 유념해야 할 일 열 가지 중 하나로 중들을 줄이는 문제를 제기합니다. 불교는 나라를 좀먹고 백성을 병들게 하는 것이니 ‘사이비’들은 모두 환속시켜 생업에 종사케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임금은 유독 내시의 폐해를 제기한 조항과 불교 문제만은 건국 초기에 갑자기 시행할 수 없다며 보류시켰습니다.

며칠 뒤 도당(都堂)에서도 대장경 인쇄를 맡은 대장도감(大藏都監)을 폐지하고 불교 행사인 팔관회(八關會) 연등회(燃燈會)도 폐지하라고 청했습니다.

사헌부에서는 두 달 뒤 다시 좀더 구체적인 12 조목을 건의하는 가운데 불교 문제를 또 끼워 넣습니다. 도당에서도 현안 22 조목을 나열하면서 두 조목을 불교에 ‘할애’했습니다.

중이 되려는 사람은 양반(兩班)의 경우 오승포(五升布) 1백 필, 서민은 1백50 필, 천인은 2백 필을 바치면 도첩(度牒)을 주어 출가케 하고, 중들이 관리들과 결탁해 절을 짓거나 불서(佛書)를 인쇄하는 등의 일을 모두 금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때는 임금이 모두 허락했습니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유교 사회가 될 수는 없었으니, 우선 임금부터가 그랬습니다. 관료들의 잇단 건의를, 일부는 거부하고 일부는 받아들이고 하는 정도로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을 수는 없었습니다.

태조의 이러한 불교 신봉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 자초(自超)라는 중입니다. 무학(無學)대사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지요.

조선 건국과 관련한 그의 예언에 관한 일화들이 몇 가지 전합니다만, 실록에는 중을 ‘키워줄 우려가 있는’ 그런 얘기들은 없고 그 대신 약간 ‘비트는’ 얘기들만 들어 있습니다. 유학자들이 편찬한 책이기 때문이겠죠.

태조는 1392년 10월 자초를 왕사로 봉합니다. 자초를 왕사로 봉한 다음다음날인 자신의 생일에는 중 2백명을 공양하고 자초를 청해 선(禪) 설법을 들었으며, 현비도 뒤에서 발을 드리우고 들었습니다. 실록은 이 행사에서 자초가 종지(宗旨)를 제대로 해설하지 못해 중들이 탄식했다고 토를 답니다.

태조는 자초를 중시해, 나라의 큰일인 도읍을 정하는 일에도 자초의 의견을 들었습니다. 계룡산 도읍을 살피러 갈 때도 중신들과 함께 그를 데리고 갔고, 한양을 도읍으로 정할 때도 그의 의견을 물었습니다.

1392년 12월, 임금은 양광도(楊廣道) 안렴사(按廉使) 조박(趙璞)과 경상도 안렴사 심효생(沈孝生)이, 백성으로서 상복(喪服)을 입은 사람이 절에 가서 부처에게 공양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말을 듣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색(李穡)은 세상에서 큰 유학자면서도 부처를 숭상했는데, 이 무리들은 무슨 글을 읽었기에 이다지도 부처를 좋아하지 않는가?”

임금이 중추원 첨서(僉書) 정총(鄭摠)에게 ‘대장경(大藏經)’을 찍는 원문(願文)을 지어 올리게 했는데, 정총과 이런 말을 주고받았습니다.

“전하께서 어찌 불사(佛事)에 정성이십니까? 청컨대 믿지 마소서.”
“이색(李穡)은 유학의 큰스승이지만 불교를 믿었는데, 만약 믿을 것이 못된다면 이색이 어찌 믿었겠는가?”
“이색이 세상에서 학식 높은 선비면서 남에게 비난을 받는 것은 진실로 이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색이 그대에게도 미치지 못한다는 말인가? 다시 말하지 말라.”

이듬해 1월에는 대사헌 남재(南在)가 임금 앞에서 불교의 폐해를 남김 없이 말했습니다. 그 폐해들을 인정했는지, 임금은 도평의사사에 교지를 내렸습니다.

“각 도의 연화승(緣化僧)들이 내가 직접 서명한 원문(願文)을 가졌다면서 양반과 백성을 속이니, 이를 모두 금지하게 하라.”

그러나 마찰은 계속됩니다.
죽주(竹州, 안성) 감무(監務) 박부(朴敷)는 안렴사(按廉使)의 결재를 받은 뒤 그 고을에 있는 야광사(野光寺)라는 절을 헐어 관청을 수리했는데, 불교 문제를 담당하던 승록사(僧錄司)에서 이를 보고해 임금이 처벌하려다가 그만두고 베 5백 필을 징수한 뒤 본래의 직책에 돌려보냈습니다.

이때 도성 5 부 학당이 교사(校舍)가 없어 절에 들어가 있었던 모양인데, 아이들이 절에서 말썽을 일으키자 임금이 동부(東部) 유학(儒學) 교수관(敎授官) 이격(李格)을 꾸짖었습니다.

“너는 어찌 미친 아이를 내보내 절을 더럽히고 훼손시켰는가?”
그러면서 곤장을 치려다가 그만두고는 5 부 학당을 절에서 내보내게 했습니다.

고려 때 3월에는 선종 교종의 중들을 모아 성안 거리에서 경(經)을 외게 하고 이를 경행(經行)이라 했는데, 승록사에서 이를 시행하도록 청하자 그대로 따르기도 했습니다.

1394년 12월에는 조계종(曹溪宗) 중들이 담선(談禪)을 부활하자고 청했습니다. 임금은 도평의사사에 내려 의논하게 한 뒤 담선이 개성의 지리 때문에 생겼던 것인데 새 도읍으로 옮겼으니 필요없다는 도평의사사의 의견을 따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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