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이었던 왕씨는 서민으로 물러나고, 이씨는 한 집안에서 왕실로 격상이 됐습니다. 이른바 화가위국(化家爲國)이라는 것이죠. 조상들도 4대까지 모두 임금으로 높이고 존호(尊號)를 올렸으며, 이방원을 동북면에 보내 조상들의 산소에 즉위를 고하고 능호(陵號)도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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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상시(奉常寺)에 지시해 4 대의 신주(神主)를 다시 만들게 하고, 신주를 임시로 효사관에 안치토록 했습니다.
또 왕실 사당인 종묘 지을 땅을 잡게 했습니다. 서운관 관원이 도성 안에 좋은 곳이 없고 고려의 종묘 터가 가장 낫다고 하자, 이성계는 망한 나라의 옛 터를 쓸 수 없다며 다시 찾도록 했습니다.
중추원(中樞院) 판사 남은이 옛 궁궐을 헐고 땅을 파낸 뒤에 새 종묘를 지으면 된다고 하니, 이성계는 전 왕조의 종묘가 있는 골의 소나무도 베지 말라고 잘랐습니다. 그러나 마땅한 곳이 없었는지, 10월에 가서 대묘조성도감(大廟造成都監)을 설치하고는 고려의 종묘를 헐고 그 땅에 새 종묘를 짓도록 지시했습니다.
동북면에 있는 조상의 능에는 능마다 임시 능지기 두 명과 수릉호(守陵戶) 몇 호를 두었습니다. 이 능들에는 사철 첫달과 납일(臘日)에 특별히 종실과 대신을 보내 제사지내게 하고, 초하루, 보름과 시속 명절에는 도순문사로 하여금 제사지내게 하라고 지시했습니다.
부인 강씨는 왕비가 됐습니다. 현비(顯妃)라는 이름이죠. 또 이성계의 아들들은 군(君)으로 봉해졌습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성계의 ‘서형(庶兄)’의 맏아들 이양우도 함께 군으로 봉했습니다. 이들 가운데 한씨 소생의 둘째아들 이방과와 강씨 소생의 맏아들 이방번, 사위 이제는 의흥친군위 절제사를 겸직해 군사 책임을 맡았습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왕실 정비의 핵심은 후계자인 세자 책봉이었습니다. 비(妃)나 군(君)이야 임금과 가족 관계에 있으면 자동으로 올라가는 ‘당연직’이지만 세자는 ‘임명직’이고, 비중 자체가 다른 자리에 비할 바 아니죠.
세자 책봉은 건국 후 한 달 만에 이루어졌습니다. 갑자기 임금 자리에 올라 시급히 처리할 일이 많았을 텐데, 조금 서두른 느낌이 들죠?
그런데 그 세자 책봉이 희한했습니다. 위로 장성한 아들이 줄줄이 있는데 가장 나이 어린 막내를 고른 것입니다.
이성계에게는 전처인 한씨 소생으로 아들 다섯(원래 여섯이지만 막내는 일찍 죽었습니다)에 딸 둘, 후처 강씨 소생으로 아들 둘에 딸 하나가 있었습니다.
상식적으로 세자 자리에 가장 근접한 사람은 맏아들 이방우였겠습니다만, 이런 형제간의 서열은 완전히 무시됐습니다. 이방우의 경우는 세자 문제와 관련해 전혀 거론되는 일도 없었고, 막내에게 세자 자리가 넘어갔다고 불만을 표시한 흔적조차 없습니다.
그는 아버지인 이성계가 임금이 된 지 1년 반 만인 1393년 12월에 ‘조용히’ 죽습니다. 소주를 마시고 병이 나서 죽었다고 합니다. 그는 아버지의 쿠데타에 적극적으로 나서지도 않았고 일설에는 반대 입장을 취했다는 얘기까지 있어, 애초부터 후계 문제에서 논외의 존재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더라도, 둘째도 있고 그 밑으로 형제들이 여럿 있는데 왜 하필 막내였을까요? 역시 왕비 강씨의 영향력이겠지요. 전처 한씨는 왕비 꿈도 못 꾸고 죽었는데, 후처 강씨는 그런 한씨 소생 왕자가 태조의 뒤를 잇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기에 건국 초 태조의 핵심 측근이었던 정도전, 남은 등의 정치적 야심이 강씨 세력과의 결탁이라는 형태로 나타난 것이었겠지요.
강씨 소생이라도 맏이가 있지 않은가? 그래도 남는 의문은 이것입니다. 이에 대해 실록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태조가 강씨를 배려해 이방번을 세우려 하자 배극렴, 조준, 정도전 등 공신들이 그런 눈치를 채고 사적인 자리에서 이를 의논했는데, 이방번은 그릇이 모자라 곤란하니 강씨의 아들 중에서는 그래도 막내가 낫겠다고 말을 맞추었고, 임금이 세자 문제를 묻자 막내로 하자고 건의했다는 것입니다.
조선의 첫 세자 책봉은 골육상쟁이라는 회오리를 잉태한 채 이렇게 마무리됐습니다.
<이성계의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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