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에 대한 ‘사대(事大)’는 조선이 건국하면서부터가 아니라 고려 말부터 시작됐습니다.
공민왕이 원나라의 그늘에서 벗어나 새로 일어나는 명나라와 관계를 맺으면서 씨앗이 뿌려졌고, 그 이후 임금이 바뀌는 등의 중요한 일이 있을 때면 중국에 사신을 보내는 것이 정례화됐습니다.
이성계가 정권을 잡는 위화도 회군에서도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슬릴 수 없다는 ‘명분’을 천명했으니, 이 무렵에는 이미 큰 나라를 섬기는 사대가 ‘상식’이었다고 봐야겠죠.
그러나 역시 본격적인 사대는 조선 왕조가 들어서면서부터입니다. 나라 이름까지 중국에 묻고 정했으니까요.
태조가 즉위한 당일로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와 각급 신하, 한량(閑良), 원로 등은 밀직사 지사 조반(趙胖)을 중국에 보내 그간의 사정과 태조가 즉위한 일 등을 보고하자고 청합니다. 바로 보냈죠.
40여 일 뒤 다시 전 밀직사 사(使) 조임(趙琳)을 보내 글을 올리고 이성계를 권지국사(權知國事)로 추대한 사정을 설명토록 했습니다. 권지국사란 임시로 나랏일을 맡아본다는 뜻이니, 황제의 승인이 나지 않은 상태에서 임금을 칭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해 10월에 먼저 사신으로 갔던 중추원 지사 조반이 돌아왔습니다. 임금이 백관을 거느리고 선의문(宣義門) 밖에서 맞았습니다. 조반이 가져온 중국 예부(禮部)의 공문 속에는 황제가 이성계의 즉위를 ‘묵인’한다는 내용의 칙지(勅旨)가 들어 있었습니다.
“삼한(三韓)은 왕씨가 망하면서부터 이씨의 뜻대로 움직여온 지 벌써 여러 해가 되었고, 지금은 확실히 차지했다. 왕씨가 옛날에 삼한을 차지했던 보답도 그러한 것이니, 이것이 어찌 왕씨가 옛날에 일을 잘하고 이씨가 오늘날 계책을 잘 썼기 때문이겠는가? 황제의 명령이 아니면 안 되는 것이다. 삼한의 신민이 이미 이씨를 높이고 백성들에게 병화(兵禍)가 없으며 사람마다 각기 하늘의 낙(樂)을 즐기니, 바로 황제의 명령인 것이다. 그렇기는 하나, 앞으로 영토를 잘 지키고 간사한 짓을 하지 않으면 복이 커질 것이다.”
임금이 시좌소(時坐所)에 돌아오니 백관이 절하며 축하했습니다. 사흘 뒤 문하부 시랑찬성사 정도전(鄭道傳)을 보내 은혜에 사례하고 말 60 필을 바치게 했습니다.
한 달 뒤인 11월 말에는 두 번째로 보냈던 계품사(計稟使) 조임이 돌아왔습니다. 임금이 백관을 거느리고 서쪽 교외에 나가서 맞이했습니다. 황제는 먼젓번 사신이 가져온 내용과 다름이 없다는 점을 지적한 뒤, 산과 바다로 분리된 고려의 내정에는 간섭하지 않을 테니 나라 이름을 어떻게 고쳤는지나 빨리 보고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이날 백관이 줄을 지어 축하하는 한편, 원로와 백관을 도당(都堂)에 모아 나라 이름을 의논했습니다.
의논 결과 옛날 우리 나라 이름이었던 ‘조선(朝鮮)’과 이성계의 출신지 이름인 ‘화령(和寧)’으로 후보가 좁혀졌습니다. 사신을 보내려 할 때 예문관 학사(學士) 한상질(韓尙質)이 자청해 가겠다고 나섰습니다.
“신이 외국에 사신 가서 응대할 만한 재간은 부족하지만, 감히 성상의 명령을 받들어 조그만 충성을 나타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임금이 기뻐하며 그를 중국에 보내 두 후보 가운데 나라 이름을 정해달라고 청하도록 했습니다. 나라 이름을 멋대로 정할 수 없다는 ‘철저한 사대 정신’이었습니다. 보름 뒤에는 문하부 시랑찬성사 우인열(禹仁烈)을 뒤따라 보내 은혜를 사례하고 말 30 필을 바치게 했습니다.
나라 이름에 대한 회답이 온 것은 이듬해 2월이었습니다. 이때 임금은 계룡산 도읍지를 살피러 가는 중이었는데, 주문사(奏聞使) 한상질을 수행해 갔던 통역원 곽해룡(郭海龍)이 예부 공문 사본을 가지고 먼저 달려왔습니다. 임금이 크게 기뻐하여 곽해룡에게 말을 내려주었습니다.
주문사 한상질이 도착해 정식 공문을 전한 것은 계룡산에서 돌아오는 도중인 2월 15일의 일이었습니다. 임금이 황제의 궁궐을 향해 은혜를 사례하는 예(禮)를 올렸습니다. 조칙 내용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동이(東夷)의 나라 이름으로 오직 ‘조선’이 좋고 또 유래가 오래니 그 이름으로 돌아가 따르고, 하늘을 본받아 백성을 다스려서 후사(後嗣)를 영구히 번성하게 하라.”
임금이 감격하고 기뻐하며 한상질에게 땅 50 결(結)을 내려주고, 온 나라에 교지를 반포하고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도성에 있던 문하부 좌시중 조준 등 신하들은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이황(李滉)을 대표로 보내 글을 올려 축하하게 했습니다.
이렇게 정해진 것이 5백 년이나 이어진 이씨 왕조의 나라 이름이고, 지금도 한반도 북쪽의 정권은 이 이름을 이어받아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보고 넘어갑시다. 우리는 그냥 ‘조선’이라고 하면 바로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이성계의 조선으로 이해합니다. 그리고 고대의 단군, 기자, 위만의 조선은 ‘고조선(古朝鮮)’으로 구별해 부릅니다. 뭐 이상한 점 없나요?
백제(百濟)의 경우를 봅시다. 고대의 백제는 그냥 ‘백제’고 그 뒤 통일신라 말기의 백제는 ‘후백제(後百濟)’입니다. 신라도 앞 시대는 그냥 ‘신라’고 나중 것이 ‘통일신라’입니다.
앞 시대에 ‘선점권(先占權)’이 주어졌고 뒷 시대는 부가 설명을 붙여 구분했습니다. 그런데 유독 ‘조선’만은 앞 시대의 것에 부가 설명인 ‘고(古)’를 붙이고 나중 것이 원래 이름을 차지해 선점권이 무시됐습니다.
고대의 조선이 ‘조선’이고 이성계의 조선은 ‘후조선(後朝鮮)’이나 ‘신조선(新朝鮮)’으로 부르는 게 맞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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