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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 아닌 인간이라면, 말하라, 어서 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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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짐승 아닌 인간이라면, 말하라, 어서 말하라"

[용산, 냉동고를 열어라] 왜 하필 그는 '쥐'가 되었나?

7월 20일은 용산 참사가 발생한 지 반 년 되는 날이다.

5명의 철거민 희생자의 시신은 아직도 장례를 치르지 못한 채 서울 순천향대병원의 냉동고에 있다. 유족, 철거민, 이들을 돕는 시민은 날마다 참사 현장 앞에서, 그리고 수시로 유관기관을 방문해 사과와 해결책 마련을 촉구하지만 정부는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행세만 할 뿐이다.

이런 가운데서 용산의 재개발 조합과 시공사는 하루속히 공사를 진행하겠다는 태세다. 문정현 신부 등 참사 현장을 지키는 철거민과 시민들은 날마다 용역업체 직원의 시비를 상대해야 한다. 다섯 달 전과 비교해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는 셈이다.

문화예술인이 이 같은 용산의 현실을 알리기 위해 연재를 시작한다. 6·9 작가선언 모임을 비롯해 작가, 미술가, 만화가, 사진가 등으로 구성된 '용산참사와 함께 하는 예술가들' 등이 다양한 방식으로 용산 참사에 대한 자신의 에세이를 풀어낼 예정이다. <편집자>


용산 참사 현장에서 돌아오던 6월 어느 날 밤 포장마차에 앉아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최고 권력자를 짐승에 빗대어 부르는 현상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그것도 궁기와 해악의 대명사인 설치류의 짐승으로. 뉴스는 "대통령을 '쥐박이'라고 욕하는 사람들이 잡혀가 고문당하는 상황이 아니므로 지금은 독재 시대가 아니다"라는 모 여당의원의 발언을 전하고 있었다. 세상에, 고문을 해야 독재라니.

내 기억으로는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다. 권력자에 대한 존숭과 두려움이 남달랐던 전통의 영향 탓이기도 했겠지만, 폭정을 일삼았던 철권의 통치자들이 다 짐승 대접을 받은 건 아니었다. 권력이란 그렇게 불리는 걸 허용하지 않는 힘까지를 지녔으니까. 18년의 지배자 박정희도 광주를 피로 물들인 전두환도 동물 차원의 별칭을 따로 얻지는 못했던 걸로 기억한다. 박정희는 대통령이 곧 지엄한 왕이라는 무의식이 완강했던 시대의 인물이었다. 전두환이야 딱히 네 발 달린 생명체에 빗대기 어려운, '짐승' 그 자체였으니까. 그는 모든 인간적 가치의 피안에 서 있는 자, 그러니까 절대악의 화신으로 여겨졌던 것 같다. 그랬기에 시대는 그를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 짐승으로 불렀다. '살인마'는 악마이다.

노무현 정부 시절에는 대통령 욕하는 게 국민 스포츠였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지만, 광기 어린 수구 언론의 사이코들도 노무현 전 대통령의 별명을 찾아 따로 동물의 왕국을 탐험하지는 않았던 걸로 안다. 그런데 새 정권이 들어서자마자 사람들은 그 수장을 '쥐', '쥐새끼', '쥐박이'라고 부른다. 대통령을 그렇게 부르고도 무사한 나라가 민주주의 국가 아니면 뭐냐는 모자란 소리는 못 들은 걸로 하자. 국민이 그를 짐승의 이름으로 부른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다. 왜 이렇게 됐을까.

▲ <猛貓鼠獵圖>(오늘의 현실을 보면서 가소로운 쥐새끼 설쳐대는 꼴을 보면서 나는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맹렬한 기세로 분노의 힘을 모아 쥐새끼를 사냥하고자 한다.) ⓒ김종도

일개 글쟁이가 보기에, 대중의 이 독특한 명명법은 범주를 달리하는 두 대상 사이에 뜻밖에도 외양과 행동에 있어 현저한 닮음이 있음을 발견한 데서 생겨난, 자연발생적인 현상이다. 쥐는 작은 눈, 작은 얼굴, 작은 몸집을 가진 작은 짐승이다. 쥐는 야행성이고, 특히나 인간에 더부살이하는 집쥐는 병균을 옮기고 어둠과 정적을 틈타 양식을 축낸다. 쥐의 작고 더럽고 간교한 이미지가 대중의 분노와 만날 때 '쥐새끼'가 되고 야유의 말놀이에서 '쥐박이'가 나온 것 같다. 동물 고유의 특성과 한 인간을 바로 그 인간으로 만드는 성질들 사이에는 분명 범주 차가 있어야겠으나, 이미지의 층위에서 이 둘은 뭔가 연결이 된다. 아니, 연결이 되는 정도가 아니라 국민 감정은 인상적인 닮음의 수준을 넘어 이 둘을 내용적으로 거의 동일한 것이라 느끼는 것 같다. 느낌이 의심할 수 없는 '판단'으로 굳어진 데는 이외에도 그가 보여준 괴상한 서민 정책, 괴이한 민주주의, 해괴한 평화주의에 대한 괴로운 학습 과정이 단단히 한몫했을 것이다.

그는 과연 작은가. 천만에. 그가 크고 거창한 걸 좋아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대한민국 국민은 이제 없다. '747 공약'이 그러하고 '선진화'의 요란한 구호가 그러하며, 무엇보다 '한반도 대운하'가 그러하다. 그렇지만 국민은 그를 쥐처럼 작다고 여긴다. 그것은 국민이 그가 추진하는 사업의 '큰 규모'가 아니라 그것에 깃든 '작은 가치'를 꿰뚫어 보기 때문이다. 작은 가치로는 전체를 설득할 수 없는데도 그는 그것을 하려 한다. 억지로 하다가 안 되니까 '불도저'답지 않게 꼼수를 쓴다. 말 바꾸기. 포장만 바꾸기. 대운하를 '4대강 살리기'로 이름만 고친다고 삽질이 써레질이 될 리는 만무한 일. 국민은 단군 이래 최대의 역사라는 프로젝트의 크기를 보지 않고 그 추진 방식의 비루함, 즉 인간의 작음을 본다. 추진은 있어도 추구가 없고 프로젝트는 요란한데 플랜은 없는 이 정신 없는 난장판에서, 나는 이상한 조급증과 일그러진 욕망을, 그리고 어떤 갑갑한 무능력과 자폐적인 불구성을 느낀다. 모든 허위는 작은 것이다. 큰 허위는 가장 작은 것이다.

어쩌다 작은 권력자의 손에 들어간 큰 권력 때문에 국민들은 지금 살기가 아주 힘들다. 이 권력은 짐승스러운가. 천만에. 너무 '인간적'이어서 가는 곳마다 눈물이 앞을 가린다. 이른바 시래기 할머니 목도리 쇼. 어묵 쇼. 그의 너무도 인간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국민은 그의 재래시장 방문이 연출된 쇼임을 단박에 알아본다. 국민이 그렇게 보는 것은 그에게서 마음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마음이 있다면 최저임금을 깎고, 대형마트 진출로 생계가 막막한 재래시장 상인들에게 썰렁한 동문서답을 하겠는가. 그는 '천한 것'들의 삶에는 사실 별로 관심이 없다. 국민은 인간으로 살고자 하고 인간으로 대우받고자 하는데 그는 그렇게 할 의사도 의지도 없는 것 같다.

그러니까 국민이 그에게서 짐승의 모습을 보고 그를 짐승으로 표현하는 것은 그가 국민을 인간으로 대우하지 않은 데 대한 극히 자연스러운 반작용이 아닌가. 그리고 그에게 하필이면 작고 초라하고 비천한 짐승의 이미지를 씌운 건 그가 국민을 또한 그렇게 취급하기 때문이 아닌가. 나는 이 적대관계가 계급 갈등인가 일종의 종(種) 간 갈등인가 헷갈릴 때가 있다. 같은 사회 구성원들이 사실 같은 인간이 아니라는 것. 너희들은 우리와 같은 종의 생명체가 아니라는 것. 그러므로 같은 인간으로 대우해줄 수 없다는 것. 생존을 놓고 서로 싸우고 죽이는 정글의 법칙 아래서라면 약자는 오직 먹이에 불과할 뿐이다. 21세기 첨단 문명시대에 이렇게 대한민국은 급속히 동물의 세계로 바뀌어가는 중이다.

용산에서 벌어진 참극은 이 변화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나는 저 용산의 새벽에 적어도 진압 작전을 책임진 지휘계통의 인물들은 옥상의 세입자들을 인간이 아니라고 여기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그게 아니라면 힘없는 철거민이 졸지에 도심 테러리스트가 되고, 프로 중의 프로인 경찰 특공대가 거기 그곳에서 그런 헛짓을 하다 남의 목숨을 빼앗고 제 목숨을 잃기도 한 어이없는 사태를 설명할 길이 없다.

▲ 지난 달 25일 재래시장을 찾은 이명박 대통령이 상인들과 오찬 간담회를 갖고 있다. 대형마트와 재래시장의 구조적인 문제에 대해 이 대통령이 이날 내놓은 대안은 '인터넷 직거래'였다.. ⓒ청와대

경찰은 협상 노력도 변변한 안전 대책도 없이 살기 위해 망루로 쫓겨올라간 세입자들을 사냥하듯 진압했다. 그것은 일종의 전쟁, 공성 작전이었다. 왜 그랬던 것일까. 그들이 그들을 사람이라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가, 왜, 어떻게 사람을 죽였는지 지금껏 알려진 바가 없다. 연이은 거짓말과 은폐, 조작 시도. 거짓말이 들통 나도 사과는 커녕 부끄러운 기색조차 없다. 죽은 자는 있는데 반 년이 지나도록 죽인 자도 책임지는 자도 없다. 용산의 학살극은 이렇게 설명할 수 없는 자살극이 되어간다. 왜 이렇게 된 걸까. 그들이 그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족 동의도 없이 시신을 부검하고, 법원이 허가한 수사 기록 제출을 거부하고는 배 째라고 한다. 철거는 그치지 않고 용역들의 폭력도 계속되는데, 다섯 구의 시신이 냉동고에 방치되어 있는데, 사과 한 마디 장례 협의 한 번 내놨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 없다. 사바나의 맹수들도 같은 종끼리는 이러지 않는다. 왜 이렇게 된 걸까. 그들이, 그리고 그가 그들을 사람이라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며칠 전 '국가조찬기도회'라는 데서 그가 이런 말을 했다. 구구절절 좋은 말씀이다. "섬김의 본을 보이신 예수님을 따라 국민의 힘을 하나로 모으는 데 힘을 다하겠다". 제발 좀 그랬으면. "그리스도의 사랑을 기다리는 곳이 우리 주위에 참 많이" 널려 있다는 것도 잘 안다.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그러나 나는, 정부가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배려에 정책의 중심을 두고 최선을 다하고 있"으며, 자신이 대통령이 된 것은 "서민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여기고 돌보라는 소명이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가슴 찡한 한국어 문장들을 해석할 재간이 없다. 해독이 안 된다. 그 자리의 다른 신도들의 기도가 자신에게 큰 힘이 될 것이라고도 그는 말했다. 그가 힘을 얻는다는데 내가 왜 공포를 느낄까.

그가 그의 소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 "지혜와 명철"로써 "의롭게, 공평하게, 정직하게", 그리고 "담대히" 전진하기로 다짐하는 동안, 용산 희생자 가족들은 정부가 끝내 대화에 나서지 않을 경우 시신을 메고 청와대로 가겠다고 발표했다. 서민 돌보기를 신의 소명이라 여기는 분이 한사코 서민을 피하신다. 관을 메고 길에 나선다는 것이 나에게는 왠지 목숨을 내놓는다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게 아니더라도, 인간이기 때문에 남겨놓은 어떤 마지막 빗장을 푼다는 뜻으로 들린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복음을 구하는 듯한 간절함으로, 그러나 너무도 당연하고 작고 희미한, 그 대화라는 걸 원하고 있다. 인간이 인간임을 증명하기 위해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사회를 인간의 사회라 말할 수 있을까.

근자에 가족을 연이어 잃어본 나는 인간의 육체에서 목숨이라는 것이 사라져도 인간 자체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배웠다. 사라지지 않는 그것을 외계의 객관적 실재로 부를 수는 없을지라도 최소한 그것은 인간의 삶에 균열을 내는, 작용하는 실체이다. 마음의 심층에 자리하는 이 죽은 자의 심상을 유령이라고 부르든 귀신이라고 부르든, 내가 보기에 관을 메고 간다는 것은 이 몸 없는 자들과 한 몸이 되어 가겠다는 뜻이다. 그렇게 하도록 두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이미 모욕당한 몸을 해 아래 일으켜 세워 다시 모욕하고, 그럼으로써 우리 모두가 또 한 번 죽어야 하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짧지 않은 우리 현대사에서 죽음은 언제나 역사를 바꾸어왔다. 지금, 나라에 억울한 무주고혼들이 늘어간다. 그리고 반년은 희생자와 유족들에게 너무도 길고 괴로운 시간이다. 그러니 우리가 짐승이 아니라 같은 종의 인간이라면, 말하라. 파국이 오기 전에 진상을, 사죄를, 해법을, 말하라! 어서, 말하라!

조간은 부음 같다
사람이 자꾸 죽는다

사람이 아니라고 여겨서
죽였을 것이다
사람입니다, 밝히지 못하고
죽었을 것이다

죽이고 싶었다고…죽였을 것이다
죽이고 싶었는데…죽였을 것이다
죽이고 싶었지만…죽였을 것이다

죽은 사람은,
죽을 것처럼 애도해야 할 텐데

죽인 자는 여전히
얼굴을 벗지 않고
심장을 꺼내 놓지 않는다

여전히, 진압 중이고
침입 중이고
폭행 중이다

계획적으로
즉흥적으로
합법적으로
사람이 죽어간다

전투적으로
착란적으로
궁극적으로, 사람이 죽어간다

아, 결사적으로
총체적으로
전격적으로
죽은 것들이, 죽지 않는다

죽은 자는 여전히 농성 중이고
투신 중이고
신음 중이다

유령이 떠다니는 현관들,
조간은 부음 같다

나는, 고아처럼 울고 일어나
유령과 더불어

유령처럼 울고 일어나
산 자들과 더불어

졸시 '유령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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