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명의 철거민 희생자의 시신은 아직도 장례를 치르지 못한 채 서울 순천향대병원의 냉동고에 있다. 유족, 철거민, 이들을 돕는 시민은 날마다 참사 현장 앞에서, 그리고 수시로 유관기관을 방문해 사과와 해결책 마련을 촉구하지만 정부는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행세만 할 뿐이다.
이런 가운데서 용산의 재개발 조합과 시공사는 하루속히 공사를 진행하겠다는 태세다. 문정현 신부 등 참사 현장을 지키는 철거민과 시민들은 날마다 용역업체 직원의 시비를 상대해야 한다. 다섯 달 전과 비교해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는 셈이다.
문화예술인이 이 같은 용산의 현실을 알리기 위해 연재를 시작한다. 6·9 작가선언 모임을 비롯해 작가, 미술가, 만화가, 사진가 등으로 구성된 '용산참사와 함께 하는 예술가들' 등이 다양한 방식으로 용산 참사에 대한 자신의 에세이를 풀어낼 예정이다. <편집자>
쏜살,
너는 나의 고양이였다
먼 곳으로부터 너의 주인을 데려오라
쩌렁쩌렁한 부름을 받고 너는 한달음에 나에게로 달려왔다
나는 너의 졸음에 겨운 두 눈과 쫑긋거리는 두 귀를
사랑하였다
- <나의 고양이, 쏜살> 전문
때 : 2009년 겨울 혹은 그보다 더 먼 과거나 미래
곳 : 대한민국 서울 용산 뒷골목 혹은 전 세계의 고통 받는 거리
나오는 사람들
신부/시인/배우/가수/화가/춤꾼/전경/아이/노파/사진작가
말이 없는 남자들/울고 있는 여자들/그 밖의 사람들
무대는 끝없이 펼쳐진 모래의 땅이거나 풀 한포기 나지 않는 황량한 사막이었으면 좋겠다. 아니면 완전한 폐허이거나 시커먼 잿더미여도 상관없을 터.
그곳에 사람들이 남긴 흔적들과 함부로 버려진 것들, 과거의 상흔들이 마구 뒤섞여있다.
그러하기에 이것은 시작도 끝도 없는 이야기 혹은 쉼표도 마침표도 없는 이야기, 거짓 선지자의 자기모멸의 시대, 그러나 그 언젠가 먼 옛날 또 다른 예감이 있었다.
아이가 지나간다.
바람이 분다.
노파가 지나간다.
바람이 분다.
남편이 지나간다.
바람이 분다.
아내가 지나간다.
바람이 분다.
다시, 목마른 계절의 바람이 분다.
천지가 눈을 뜬다.
천지의 눈들이 기지개를 켠다, 새로
태어난 눈들이 두리번거린다. 눈들의 가지가
서로 얽히고 깊은 뿌리는 하늘까지 맞닿았다 나무
위엔 한 쌍의 새가 서로의 목을 껴안고 슬프게 운다.
세상에서 제일 비가 많이 오는 묘지에서
하늘의 차고 뜨거운 창문이 열린다.
죽은 자들의 머리.
죽은 자들이 입을 연다.
죽은 자들이 노래한다.
마지막에 죽은 자는 땅속에서 올라온다.
희미한 불빛.
물 좀 주세요. 도와주세요. 목이 말라요.
자신이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는 남자들.
머나먼 하늘을 바라본다.
우린 살고 싶다.
발밑으로 시선을 떨어뜨리는 남자들.
우린 죽고 싶다.
배우들은 말한다.
배우들은 외친다.
배우들은 울부짖는다.
ⓒ프레시안 |
미사를 진행하는 신부의 옆얼굴.
온 누리의 하느님, 당신은 어디로 가시나이까.
저희가 저희를 용서하듯 당신이 저희를 긍휼히 여기소서.
자비를 베푸소서. 은혜를 내려주소서.
죄의 사슬에서 우리를 풀어주소서.
줄 지어 늘어선 남자들은 물을 마시고 싶어 한다.
여자들의 입술에서 목으로, 목에서 젖가슴으로 흰 젖이 흘러내린다.
맨손과 맨발.
몸을 웅크리는 남자들. 허공을 향해 두 팔을 내젓는다.
환영, 짐을 지고 떠나가는 사람들. 다가오는 전경들.
비명을 지르는 여자들. 땅 위를 기어 다닌다.
망루에 묶인 남자들. 갈 곳이 없다.
뒤돌아보는 남자들. 갈 곳이 없다.
아아아. 천상의 소리.
아아아. 지옥의 소리.
아-아-아- 길게, 길게, 길게 찢어진다.
가수는 노래 부른다.
지금 여기 이곳은 사랑의 땅.
지금 여기 이곳은 평화의 땅.
로프를 잡아당기는 공중의 남자들.
풀잎처럼 흔들리는 지상의 여자들.
이쪽 끝은 너무 아득해 종잡을 수 없어 아 아 아 목청껏 소릴 질러봐 그래도 너무 멀어 당신 얼굴이 보이지 않아 가물가물해 매캐한 연기인가 한 치 앞을 분간할 수 없어 지금 내가 어디에 있지 아 내려가고 싶다 그럴수록 내 몸은 하늘 위로 솟아올라 도무지 가까이 다가갈 수조차 없어 바로 코앞에 있어도 잡히지 않아
땀을 흘리며 벽화를 그리는 화가들.
무심하게 신문을 펼쳐든 경찰들.
지상의 여자들, 손수건을 깔고 공중의 남자들을 부른다.
하얀 손수건 위에 함께 눕는 사람들.
여자의 손을 어루만지는 남편. 남자의 발을 끌어당기는 아내.
그들은 격렬하게 몸을 섞는다.
엇갈리는 시선들. 안타까운 몸짓들.
미친 듯 춤을 추는 춤꾼들.
나는 인간이다, 나는 짐승이다, 아니 나는 인간도 짐승도 되지 못했다.
산을 넘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그림자.
강을 건너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그림자.
점 점 이 빛나는 도시의 불빛.
시인의 눈으로 한줄기 바람이 스친다.
사진작가는 일어선다.
셔터를 누른다.
사진작가는 앉는다.
셔터를 누른다.
사진작가는 일어섰다 앉는다.
펑 펑 펑
지구가 신음하는 소리
펑 펑 펑
태양이 갈라지는 소리
펑 펑 펑 펑 펑
달과 별과 온 우주가 폭발하는 소리
어둡다
불을 켜 보아도
슬픔이 가시지 않고
가시처럼 목구멍 깊숙이
박힌다, 빼낼 수 없는 것도 있지
세상이 온통 비에 젖어도
흥건하게 고인 눈물에 비가 내려도
무덤 위에 흙비가 내려도
어째서 한 슬픔이 다하면 또 다른 슬픔이
걷잡을 수 없는 해일처럼 저를 에워싸는 검은 숲처럼
얼음 소나기가 쏟아진다.
내 몸이 썩는다.
관이 들려나간다.
내 몸이 썩는다.
어둠을 갉아먹는 벌레들이여.
내 몸이 타들어간다.
꽃들아 네 멍울진 알몸을 보여 다오.
잘근잘근 씹어 먹고 싶구나.
너희들의 수수깡 같은 목을 꺾게 해 줄까.
통째로 삼키고 싶어 풀기 없는 입술을 적시듯 내가 널 적셔줄까.
꽃들아 어디 있니.
너희들의 입 속으로 숨고 싶어.
꽃들아 입을 열어 줘, 제발.
너희들의 혈관을 타고 숨의 뿌리 그 끝까지 미끄러지고 싶어.
나를 받아주렴.
아아, 꽃들아, 제발!
바람소리 무섭다
천리만리 갈가리 찢겨진 빈 들판을 내달리는
저 시퍼렇게 멍든 말 바람소리
어머니 나는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이나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러니 제발 그 별 속으로 숨게 해 주세요.
크게 한 번 숨쉬고 싶어요.
아 어디선가 닭이 울고 있어요.
시도 때도 없이 울어 제치는 저 넋 나간 닭 울음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어지러운 풍문들
산 자는 말이 없고 죽은 자들만
넘쳐나는 시대
살려 주세요 여긴 어지러워요
뒤돌아보면 달도 별도 없고
다만 칠흑 같은 어둠 뿐
우리는 모두 돌아가는 사람들.
걸어가자, 걸어가자, 걸어가자.
저 낮은 세상의 구석으로.
신부여! 시인이여! 배우여! 가수여! 화가여! 춤꾼이여! 전경이여! 아이여! 노파여! 사진작가여! 말이 없는 남자들이여! 울고 있는 여자들이여! 온 누리의 사람들이여!
▲ 경찰에 의해 청와대로 향하는 길이 저지당하자 눈물을 흘리고 있는 용산 참사 유가족. ⓒ프레시안 |
* 극작 노트
문학 혹은 연극은 인간에 관한,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지극히 인간적인 예술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특히 연극은 시적인 예술, 다시 말해서 '인간에 의한 공간의 시'라는 말도 있지요. 아마도 그 모든 문학과 연극에 관한 말들은 예술이 눈과 귀를 비롯한 인간의 오감을 통해 이 세상에 숨을 쉬고 있는 온 누리 목숨붙이들의 고귀한 영혼에까지 가 닿아야 한다는 믿음에서 나온 것이겠지요. 그러하기에 극작가는 무한하게 열려있는 초월적 신비 혹은 보이지 않는 삶의 고결함과 비애를 은연중에 드러내는 존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불행한 일이지만 '(문학 혹은)연극은 세상을 비추는 거울'이라거나 '(문학 혹은)연극은 그 시대와 사회를 반영하는 자화상'이라는 말이 쑥스러워질 만큼 한 편의 희곡을 써서 무대 위에 공연으로 올리는 작업이 점점 더 무력하고 부질없는 일로 느껴지는 요즈음입니다.
용산 참사 현장과 남겨진 사람들, 그 후의 풍경을 침묵극의 형식을 빌려 짧은 시극으로 표현해봤습니다. 희곡을 쓰면서 내내 부끄럽고 참담했습니다. 그리고 아주 소박한 소망 한 가지를 마음속으로 품어봤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무슨 거창한 법과 정의가 지켜지는 사회가 아니라 최소한의 기본적인 상식이 통하는 사회에서 살게 됐으면 좋겠다는 바람 말입니다. 용산 참사 현장에서 지금도 밤낮없이 땀 흘리고 계신 분들께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고마움의 인사를 드립니다.
우리 모두 용기를 가지고 힘내도록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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