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조와 팀장들이 구 사장을 반대하는 까닭은 그가 교육부 관료 출신이라는 점 외에도 의혹이 제기되는 부당한 행태들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구 사장은 아들의 위장전입은 시인하면서도 딸의 교사 임용 특혜와 본인의 박사학위 논문 중복 의혹 등에 대해선 거부하며 맞대응하고 있다.
지난달 19일 구 사장은 노조를 상대로 서울중앙지법에 업무방해금지 가처분신청에 냈다. 그는 이어 지난달 27일 보직을 사퇴하고 간부회의에 불참 중인 팀장들에게 "사내질서를 위반하는 행위 등을 계속하고 있어 규정에 의한 조치가 불가피하다"는 내용의 공문을 보냈다.
구 사장의 이런 강경대응에 EBS 노조도 성명을 내고 "지난달 19일 국정감사에서 구관서 씨는 국회의원들에게 적극적인 대화로 해결하겠다고 했지만 이는 거짓말이었다"며 "칼을 들이대며 대화를 강요하는 군부독재의 퇴물 관료는 EBS 사장으로서 자격이 없다"고 주장하며 물러서지 않을 태세다.
계속되고 있는 노조와 구관서 사장과의 팽팽한 갈등은 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EBS 추덕담 노조위원장을 만나 노조가 생각하는 문제와 해법을 들어봤다. 지난 9월 초 구관서 사장에 반대하며 삭발했던 그의 머리카락은 어느새 많이 자라있었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
"노조에 대한 가처분신청도 노태우 정권 이후 방송계에선 처음"
프레시안: EBS 사태가 해결되지 않고 있다. 앞으로 어떻게 할 건가?
추덕담: 구관서 씨가 EBS 사장으로 적합하지 않다는 판단을 내려 싸움을 시작했다. 여러가지 대응방안을 생각하고 있다. 구관서 씨가 법적으로 해결하겠다고 하고 물리력을 동원하겠다는데 우리도 법적으로 해결하는 방안을 고민하고 있다.
어차피 구관서 씨가 이 상태로 사장이 돼도 사내에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없다. 끝까지 싸울 것이다. 구관서 씨가 물러날 때까지.
프레시안: 구 사장의 자진사퇴만이 해법일까?
추덕담: 공인들은 대부분 흠결이 나오면 '부끄럽다. 물러나겠다'는 자세를 보인다. 그런데 구관서 씨는 '무슨 잘못이냐. 문제없다'며 버틴다.
교육부 관료가 아들을 위장전입해서 부정입학시켰다? 그것은 건설교통부 직원이 개발예정지에다 말뚝 박아놓은 것과 같다. 주동황 전 방송위원도 위장전입 때문에 물러났다.
논문 문제에서도 민교협이 '박사 논문이 거의 가치가 없다'고 밝혔다. 아무리 교육부 관료들에게 박사 학위를 수여하는 것이 시대 관행이었다지만 이제 바뀌었다. 황우석 사태 이후로 연구윤리도 강화된 시점이다.
프레시안: 구관서 사장이 임명된 뒤 어떤 점이 달라졌나?
추덕담: 인사 단행이다. 오자마자 며칠 새에 자기 말을 듣지 않는다고 부서장들을 다 바꾸고 새 인물들을 임명했는데 임명 근거를 잘 모르겠다. 들리는 얘기로는 고등학교 후배, 옛날에 교육부와 연관됐던 이들 중심으로 뽑았다고 이야기한다. 회사가 장난도 아니고 본인이 방송에 문외한인데 EBS의 정체성을 생각치 않고 자기에게 맞는 사람만 뽑아서 회사를 꾸려나가겠다니.
노조에 대해 업무정지방해 가처분신청을 낸 것도 방송계에서는 노태우 정권 이후 처음이다. 교육부 관료 시절 관련기관대책회의를 부활시켰던 것처럼 전형적인 관료마인드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열린우리당은 비겁했고, 한나라당은 열의가 부족했고…"
프레시안: 지난달 19일 방송위원회와 EBS 국정감사도 사태 해결에 도움이 안 된 듯 하다. EBS 사태를 KBS와 연관지어 정파적으로 해석 혹은 이용하려는 움직임도 있어 사태가 더 어려워지는 것 같다.
추덕담: 국감 때 구관서 씨에 대해서는 정파적인 이해관계를 떠나 도덕성이 결여돼 있는 사람이라는 원론적인 입장으로 접근해주길 바랬다. 그러나 열린우리당은 비겁했고, 한나라당은 열의가 부족했고, 민주노동당은 고군분투했지만 시간이 부족했다.
열린우리당에서는 'EBS 사장이 밀리면 정연주 전 사장도 못 지켜낸다'고 생각한다. 한나라당은 '정연주 끌어내리기 위해서 EBS 사장도 사퇴시키자'라고 말한다. 사실 정연주 전 사장과 구관서 씨의 개인적 부도덕성이 무슨 관계가 있겠나.
프레시안: 방송위원회는 왜 그랬을까? 재검증을 거쳤지만 결국 처음 결정대로 구 사장을 임명했다. 현재 사태에 대해서도 아무 반응이 없다.
추덕담: 방송위는 지금 구관서 씨에게 다 맡겨놓는 분위기다. 국감 질의 때도 방송위원들은 '사장 임명 뒤에는 우리도 모른다'고 답변하더라.
최민희 부위원장은 본인의 직무대행 시절에 구관서 씨를 사장으로 임명했기 때문에 실질적인 책임이 있는 듯하다. 그러나 책임이 무엇인가. 언론운동을 했던 이가 책임지는 자세는 자신의 철학을 건 행동 아닌가.
최 부위원장은 그 누구보다도 EBS 정체성에 대해 같이 고민했던 분이다. 지난 6월 EBS의 사외보에 'EBS의 정체성을 위해서 노력해달라. 공익성 강화가 EBS 경쟁력의 강화다'라는 요지의 기고까지 했다. 그런데 방송위원 되자마자 "그동안 방송전문가가 사장으로 가서 해놓은 것이 뭐가 있나?"라고 말하다니.
"공적재원에 대한 사회적 논의는 없고, 제작비용은 부족하다"
프레시안: 그렇다면 노조와 팀장들이 구 사장을 반대하며 지키려 하는 EBS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추덕담: 2000년 공사로 독립한 이후 끊임없이 고민해 왔다. 편성제작 특별팀(TFT)도 만들었다. 문화채널, 직업채널, 지식채널, 또는 그런 규정을 하지 않는 방법까지 두고 고민했다.
그런데 정권에서 지키고 싶어하고 관심있는 유일한 것은 수능방송이다. 수능은 EBS의 한 영역이다. EBS는 평생교육, 민주시민교육, 문화교육 등으로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방송이다. 그런데 공영방송에 대한 철학이나 깊은 고민 없이 오직 참여정부의 가시적 성과라고 자평하는 수능사업을 어떻게 좀 더 잘 할 것인지 생각해 교육부 출신 관료가 낫지 않겠느냐는 접근으로 사장을 임명했다.
이것은 EBS의 역사와도 맞물려 있다. 오랜 기간 '공사 독립'을 주장한 것은 단순히 형식적인 기관 형태가 중요해서가 아니었다. EBS가 학교 교육의 보완재가 아니라 문화·교양을 아우르는 채널로 가야 된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교육부 산하기관이 아닌 공사로 만들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프레시안: 일각에서는 EBS 구성원들의 자기정당성 문제를 언급하기도 한다. 수능교재 사업에 구성원들 자체가 매몰돼 있다는 비판도 심심찮게 들린다.
추덕담: 수능방송의 역사는 매우 길다. 전두환 정권부터 시작했고 참여정부 때 다시 한 번 국책사업으로 발전시켰다. 자세히 말하면 한나라당에서 안을 내고 현 정부의 청와대에서 발전시켰다.
우리가 '책 파는 데 함몰된 것 아니냐'고들 하는데 실제로 EBS 재원구조를 볼 필요가 있다. 예산 1800억 중 26%가 공적재원이다. 이것이 전부 제작비로 쓰이는데 실제 제작비는 더 든다. 공영방송의 재원은 공적재원이 되야 되는데 돈을 벌어서 제작할 수밖에 없는 기형적인 구조다.
수능교재사업을 비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공적재원을 어떻게 해줄 것인가에 대해 사회적 논의가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다.
방송위는 "우리는 늘려줄 방안이 없어서 국고보조금 잘 타올 수 있는 사람을 사장으로 임명했다"고 얘기한다. 그러나 국고보조금은 세금이다. 세금으로 운영되는 방송은 KTV와 같은 관제방송이다. 그렇게 되면 국가정책을 홍보할 수밖에 없다.
"지금 EBS는 새로운 도약을 위한 성장통을 겪는 중"
프레시안: 추 위원장은 공영방송의 공공성이 무엇이라 생각하나?
추덕담: 사회적으로 관심을 못 받는 사람들, 그러나 목소리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사회적 약자들에게 시청 기회와 교육적 기회를 주는 것이 공익성이라 본다.
교육방송의 공영성은 좀 특별하다. 유아·어린이들에 대한 책임이 있다. 시골 아이들도 서울 강남 아이들도 <방귀대장 뿡뿡이>를 보고 같이 놀 수 있게 해야 한다.
TV를 통한 교육적 효과는 유아, 어린이가 훨씬 중요하기 때문에 교육기회의 평등에 대해 특별히 유아·어린이 분야의 투자가 필요하다. 그리고 어린이라는 시청대상층 자체가 우리나라에서는 대표적인 소외계층이다. 유아 프로그램은 품이 많이 드는 반면 돈은 안된다. 광고도 안붙고 시청률도 낮고.
돈 많이 들지만 꼭 필요하기 때문에 공적재원이 필요한데, 재원이 부족하니까 수능 사업을 통해서 조달한다. 바람직한 재원구조는 아니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공영방송 모델을 완성시키기 위해서는 재원을 그런 식으로라도 충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본말이 전도되서 수능이 전부다, 그러니까 교육부 관료인 구관서 씨를 임명했다? 이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 공영방송 프로그램을 잘하기 위해서 수능 사업이 필요한 것인데 수능사업이 전부라고 규정한다면 지난 16년간 벌여 왔던 노력을 완전히 무시당하는 것과 다름없다.
프레시안: 오랫동안 투쟁하고 있다. 지치기도 할 텐데.
추덕담: 힘들다. 빨리 끝내고 싶다. 그런데 본인이 저렇게 막무가내로 버티는 이유가 개인의 독선이나 오기뿐만은 아닌 듯해 안타깝다.
내부적으로는 본질적인 정체성 문제에서 시작됐기 때문에 이해관계에 비롯된 것보다는 덜 힘들다. 파업도 고려하고 있다.
계속 말했듯이 이 싸움은 구관서 씨라는 일종의 상징에 대한 싸움이기도 하다. 정권이 EBS의 역할이나 철학을 1980년대처럼 수능방송, 학교방송으로 되돌리려 한다. EBS가 공영방송으로 어떻게 자리매김할 것인가에 대한 내부 고민이 계속되고 있다. 구관서 씨에 대한 반대는 그 시작이다. 이 싸움이 EBS를 망가트린다기보다는 새로운 도약을 위한 성장통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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