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방송 EBS는 본사를 도곡동에 두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프로그램을 양재동 교육개발원 내 스튜디오에서 제작한다. 교육방송이 과거 교육부 산하의 기관이었다는 점을 그대로 드러내주는 대목이다. EBS는 2000년에 교육방송공사로 독립을 했다. 공사체제로 전환되었지만 아직도 제작 여건이 열악하고, 그 정체성을 찾기에 분주하기에 더 많은 관심과 배려가 필요한 방송이다. 간혹 교재와 관련된 불미스러운 뉴스로 좋은 이미지를 풍기기엔 역부족인 면이 있긴 하다. 하지만 실상 그 내부를 꼼꼼히 들여다보면 노력하는 흔적들이 한둘이 아니다.
타 지상파 방송이 그대로 가져간 방송 포맷이 한 둘이 아닐 정도로 실험성을 발휘하기도 했다 (도올 김용옥 방송). 그 좁은 공개홀에서 음악 프로그램을 지성으로 만들어내는 열정도 보이곤 한다 (스페이스 공감). 타 지상파 방송이 어린이 프로그램을 없애거나 줄였지만 EBS는 더욱 강화한 흔적을 지니고 있다 (방귀대장 뿡뿡이). 뺑그르르 돌아가는 지식채널 로고와 그 내용은 감동적이기도 하다. 공사 출범 이후 여러 사장들이 일관성을 유지하지 않은 채 거쳐 간 덕에 혼란을 겪은 것도 사실이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이만한 성과를 낸 것은 많은 박수를 받을 만하다.
약속의 추억
2002년의 가을쯤으로 기억한다. 당시 민주당 대선 후보였던 노무현 후보를 EBS에서 만났던 적이 있다. EBS에서는 처음으로 교육문제만을 내건 대선 토론회를 기획했었다. 당시 나는 토론회의 패널로 선정되어 이러저러한 질문을 준비했다. EBS가 교육 문화 채널임을 감안하여 문화와 관련된 질문을 하도록 주문을 받았고 그에 맞추어 준비를 했었다.
여러 후보를 초청했지만 토론회에는 모든 후보가 응하진 않았다. 당시 민노당의 권영길 후보, 민주당의 노무현 후보만이 토론에 응했다. 한때 상한가를 누리던 정몽준 후보와 당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던 이회창 후보는 EBS 토론회는 대세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후보로 선출되었지만 인지도 면에서 열세를 면치 못했던 노 후보와 권 후보만 토론회에 응해왔다.
토론 내내 권영길 후보는 여러 차례 걸쳐 부유세 징수를 통해 교육재정을 확보할 것을 주장했다. 자신이 프랑스에서 겪었던 교육 현장을 중심으로 꼼꼼히 교육개혁을 주장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권 후보는 단 한 명의 수행원을 대동하고 나타나 눈길을 끌었고, 소박한 사람됨도 기억에 남는다.
노무현 후보는 이낙연 비서실장과 이기명 후원회장과 함께 토론장에 왔었다. 토론회장에 들어서기 전에 분장실에서 차를 나눴다. 자신이 국회의원 시절 교육위를 상임위로 두고 있었다며 토론에 자신감을 내비추었다. 교육방송의 사정을 잘 알고 있다며 방송 여건이 획기적으로 개선될 필요가 있다며 큰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자신이 당선이 되면 "교육방송을 제대로 한번 살려서 명실상부한 교육과 교양 함양에 이바지하는 방송이 되도록 도울 것"이라며 힘을 주었다.
최근 한미 FTA 체결의 위험성을 주장하는 방송 강의가 있어 EBS 분장실에 들렀었다. 당시 후보들의 분장을 담당했던 분장사를 우연히 마주쳤다. 분장사는 그 때 노 후보의 이야기를 나에게 다시 확인해주었다, 이번에 교육부 장관으로 내정된 서울대의 김신일 교수도 당시의 패널이었고, 같이 현장에 있었으니 제대로 증언을 해줄 수도 있으리라. 아무튼 노 후보는 토론회에 성실히 임했고, 평소의 지론을 담담히 펼쳐내 성공적으로 토론회를 마쳤다.
소꿉장난 인사
대선이 끝난 다음 나는 노무현 대통령에게 당시의 약속 이행을 촉구하는 데 무던히도 애를 썼었다. 교육개혁 공약들이 흔들리고 있을 때에도 초심으로 돌아가기를 주변 인사들에 요청했었다. 요청의 말미에는 교육방송에 대한 약속 이행을 꼭꼭 챙겼었다. 언론을 통해 공개적으로 EBS를 살리자는 주장도 펼쳐보았다 (오마이뉴스 2003년 7월 18일). 공영방송들이 상업주의에 흔들리는 모습을 더해 갈수록 해독제 역할을 할 EBS가 힘을 받아야 함을 주장했지만 역부족이었다.
EBS의 어려움에 고개를 돌리진 않았지만 최근 들어서는 과거와 같은 비중으로 목소리를 내진 못했다. EBS 내부에도 좋은 방송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도 많아 일정 믿음이 있었던 탓이다. 어차피 방송은 독립성이 우선인데 대통령이 이러저러한 말을 해 크게 바뀌는 것도 스캔들이라고 생각한 것도 크게 작용했었다. 방송위원회가 좋은 정책을 수립해 많은 지원을 하고, 교육부에서도 과외 프로그램을 의존하고 있으니 많은 지원을 해줄 것이라고 믿기도 했다.
방송계의 인사를 둘러싸고 이런 저런 얘기가 들릴 때 마다 인상이 찌푸려지기는 했지만 말을 아꼈었다. 몸담고 있는 <문화연대>의 공식 성명 외는 어떤 목소리도 내지 않았다. 이미 과거에 늘 해오던 방식대로 흘러가고 있거니 체념 상태로 접어들었던 듯 하다. 그러던 중 EBS 사장과 이사 선출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제 더 이상 말을 아껴 몸속에 담아두는 것은 몸에 대한 모독이라는 생각에까지 미쳤다.
도대체 어떤 생각으로 이런 인사를 했을까? EBS 사장과 이사를 선출하는 역을 맡은 방송위원회에 먼저 물어야 할 것 같다. 방송위원회의 위원들은 생각이나 가지고 선출에 임했나? 아니면 전달되어온 쪽지에 몸을 실어버리고 말았나? 늘 그랬듯이 후자에 따라 움직였을 것 같다. 정부나 여당 쪽 추천을 받은 방송위원들이 방송을 모르는 이들이 아니고 십 수 년 간 방송을 연구했거나, 방송계에 몸담았거나, 언론 운동을 했던 사람들 아닌가. 그런데도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은 무언가에 밀려 허둥댄 탓일 게 뻔하다.
방송위원들은 억울한 표정을 지을 수도 있다. 아니 강하게 항변할지도 모른다. 진심을 믿어달라고 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쩌랴? 방송을 안다는 사람들이라면 이런 결정을 내릴 리가 없다. 방송위원회 위원들을 두고 전혀 방송을 모른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방송을 아는 이들이 EBS 재원에 대한 명쾌한 답을 가졌다는 이유로 방송가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은 이를 선출할 리가 만무하지 않은가. 더구나 정부와 여당으로부터 추천을 받은 방송위원들은 공공성에 더 많은 관심을 두고 있는 사람들인데 그런 식으로 사장을 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연히 사장 선출과 관련해 시선을 옮겨볼 수밖에 없다. 청와대가 방송위원들을 움직였다고 할 밖에는 다르게 볼 궁리가 나지 않는다. 방송에 진지한 고민도 없는 이들끼리 머리를 맞대고 누굴 선출할까 고민을 했을거라 생각하니 우습기 짝이 없다. 욕지거리가 날 정도로 방송계 인사를 주물러 놓고 마지막으로 EBS 건으로 방점을 찍는 저질의 인사를 보고 있자니 속이 다 울렁거린다.
참여정부 혐오증에 걸린 신문사들처럼 코드 인사를 말함이 아니다. 코드 인사는 불가피한 조처라고까지 생각해본 적도 있다. 하지만 코드 인사에도 정도는 있어야 한다. 적임자인가를 따지는 일이 우선되어야 함은 삼척동자도 다 안다. 대통령이 말했듯이 '깜냥이나 되는' 사람인가를 물어야 하는 일이 앞서야 하지 않은가. 정말 한 번이라도 EBS의 미래를 고민한다면 말이다. 그곳은 지금 다시 일어서고자 발버둥치며 교육부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새로운 미래를 꾸리고 있는데 시계바늘을 5년 전으로 돌려 버리고 있으니 도대체 그러고도 밥 먹고 사는 꿍꿍이가 궁금하기만 하다.
EBS 대선 토론 때를 기억할 만한 사람이 없다고 뭉개지는 말았으며 좋겠다. 방송을 잘 알고 있다고 너스레를 떠는 일은 더더욱 않았으면 좋겠다. 정치적 행위에 도덕을 너무 내세우지 말라며 항변하지도 말았으면 좋겠다. 이번 방송계 인사 배치는 정치적 행위가 아니라 지인들간의 계놀이 비슷하다. 너무나 사적인 지경으로 넘어서고 말았다. 옛날 신세졌던 사람들 챙기는 것을 정치라 말할 순 없지 않은가. 고분고분할 거라 예상되는 사람들 여기저기 심어두는 일을 정치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 단어에 대한 모욕이다. 국민들이 즐겨보는 방송에 구정물을 끼얹는 것을 정치라고 말할 수는 없다. 최근 청와대와 여당이 벌인 방송계 인사 배치는 소꿉장난에 불과하다. 어제 빌린 소꿉 도구가 고마워 오늘 빻아놓은 벽돌가루 한 숟가락 더 부어주는 아이들 장난에 불과하다.
방송위원회의 몫
꼭꼭 숨어있는 모습이어서 마땅히 말을 넣어볼 상대도 마땅찮으니 자신만 곧추 세우면 얼마든지 멋진 인사를 해낼 수 있는 방송위원회를 다시 겨냥할 수밖에 없다. 한나라당이 추천한 방송위원들에 대해선 별 드릴 말씀이 없다. 어른답지 못한 짓들을 다 벌이고도 아직 살아남아 있는 '서바이벌' 선수들에게는 말 걸고 싶은 생각도 별로 없다. 방송 자율성과 공공성을 금과옥조처럼 내세우며 한때는 언론 운동판에서 '동지적' 길을 걸었지만 위태롭게 탈선의 위험을 걷고 있는 몇몇 방송위원들에게 몇 말씀 건네고 싶다.
"방송위원 선임 이후 방송계에 번져가는 분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시라." 산적한 일로 바쁘겠지만 과거 남겼던 발자국들도 한번씩 뒤돌아보는 기회를 가지시길 권한다. 어떤 말들을 남겼고, 지금 그 말들과 얼마만큼 어긋나고 있는지도 꼽아보는 시간을 갖길 권한다. 방송에 애정도 없는 이들과 소꿉동무가 되어 방송 역사의 한 페이지에 오명을 남기는 일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볼 일이다. 지금 어떤 어깨를 겯고 있는지 옆의 얼굴들에 곁눈질 해보는 일을 마다하지 말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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