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포스코 본사 점거를 불러왔던 포항 건설노동자들의 '울분'은 단순히 포항지역 건설노동자들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점에서 보다 근본적인 고민이 필요하다. 굳이 순서를 따지자면 건설노동자의 포스코 본사 점거보다 불법 다단계 하도급이라는 우리 건설산업에 만연한 구조가 먼저였기 때문이다.
제2의 포스코 사태가 언제든 재발될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는 다단계 하도급, 그 실체는 무엇이며 건설 현장의 노동자들의 삶과 무슨 관계를 갖고 있는 것일까?
'불법 다단계 하도급' 구조 속에 '국민'은 없다
건설노동자들이 하나둘씩 스스로 포스코 본사 건물에서 빠져나오던 20일 밤부터 21일 새벽 사이 포스코 앞에서 만난 이들은 하나같이 "우리가 얼마나 힘들게 살고 있는지 알려주고 싶었다"고 했다. 저임금과 불안정한 고용, 잦은 임금체불, 국가 4대보험의 혜택도 받지 못하는 '버려진 국민'인 건설일용직 노동자들. 이들이 때로는 "열흘씩 잠 한 숨 못 자고" 일하면서도 피폐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원인은 '다단계 하도급 구조'에 있다.
현행 건설산업기본법에 따르면 하도급은 2단계까지만 허용되게 돼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전체의 70% 이상이 다단계 하도급이다. 삼풍백화점 붕괴(1995년)와 성수대교 붕괴(1994년) 이후 십장을 시공참여자로 등록시켜 책임의식을 강화하자는 취지에서 지난 1996년 시공참여자 제도가 만들어졌다. 그 결과 음성적인 불법 하도급은 일정 부분 양성화됐지만 이는 오히려 중층적인 하도급 구조를 더욱 만연하게 만들었다.
다단계 하도급의 문제는 줄줄이 이어지는 하청과 재하청을 따라 최초 공사비가 대폭 줄어들어든다는 것이다. 중간 단계의 업체들이 모두 수수료 등의 명목으로 공사비를 떼어가, 최종 공사단계에서는 최초 공사비의 48% 수준까지 감소된다는 통계도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처우는 열악할 수밖에 없다. 줄어든 공사비의 부담이 노동자들에게 고스란히 전가돼 노동자들은 저임금과 잦은 임금 체불에 시달리고 있다. 노동부에 접수된 체불임금 발생 신고에서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하는 업종도 건설업이다.
또 안전 보호구 지급 책임과 안전 교육, 건강 진단 등의 사업주의 기본적인 의무사항과 고용보험 등 4대 보험에 대한 책임까지 원청업체는 전문건설업체에게, 전문건설업체는 다시 팀장에게 전가하고 있다. 그러나 밑으로 내려올수록 줄어드는 공사비 때문에 팀장들의 경우 안전장비 지급 및 보험 지불 능력이 없어 일용직 노동자들은 산업재해와 국가보험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것이 현실이다. 노동자들의 여건뿐 아니라 이같은 다단계 하도급은 부실공사의 위험마저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다.
포스코가 공사발주액 대폭 줄여 포항지역 문제 특히 심각해져
포항지역의 경우는 상황이 더 심각하다. 포항지역 공사 대부분의 발주처이자 원청업체인 포스코가 최근 공사비를 대폭 줄이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노총에 따르면 1998년 설계가 대비 98% 선에서 발주를 하던 포스코는 2002년 이후 설계가의 77% 선에서 발주를 하고 있다. 또 이 공사비에서 또 20% 이상 삭감된 액수로 하도급이 주어진다.
포스코가 이처럼 공사비를 줄임에 따라 포항지역 건설노동자들의 임금은 다른 지역보다 30% 이상 낮다. 포스코 현장의 기계분야 기능공 일당은 9만7000원, 전기분야의 일당은 9만4000원이다. 보통 건설노동자들의 평균 일당이 12만 원에서 15만 원 수준임을 감안하면 포스코의 공사비 절감이 현장 노동자들에게 끼치는 막대한 영향을 짐작할 수 있다.
일이 있는 경우에 이들이 평균적으로 한 달에 일하는 날은 20일에서 25일 정도. 그렇다면 한 달에 180만 원에서 많게는 250만 원 정도를 받는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이 금액도 숙련된 기능공의 경우이고 일반적으로는 일당 8만 원 가량, 즉 월 160만 원에서 200만 원 사이의 임금을 받고 있다.
그나마 이 돈도 정기적으로 들어오는 '월급'이 당연히 아니다. 이들이 어느 한 기업의 정규직이 아니라 공사가 있을 때마다 현장별로 고용되는 비정규직 노동자이기 때문이다. 21일 새벽 포스코 앞에서 만난 한 건설노동자는 "한 현장에서 공사가 끝나고 바로 이어서 일을 할 수 있는 경우는 무지하게 행운"이라고 말했다. 그는 "보통 하나 끝나면 한 달 이상씩 놀 수밖에 없다"며 "일하고 싶어도 할 일을 못 구하는 고통을 다른 사람들은 모른다"고 하소연했다.
고용의 안정성이 보장되지 못하는 것은 이들이 대학생을 비롯한 젊은이들처럼 '임시로' 하는 아르바이트가 아니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된다. 이번에 포스코 본사를 점거한 농성자들의 평균 연령은 51세. 다들 곧 대학생이 되거나 대학생인 자녀를 두고 있는 한 가정의 가장이다. 평균적인 수입과 지출을 따져 계획적인 생활을 이어가는 일반 직장인과 달리 안정적인 수입원이 보장되지 못한다는 불안감은 삶을 더 팍팍하게 할 수밖에 없다.
정부의 의지 있었어도 '포스코 사태'는 없었다
결국 '제2의 포스코 사태'를 막기 위해서는 불법 하도급을 막을 수 있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참여연대도 24일 이번 건설노조의 포스코 점거와 관련한 논평을 통해 "하도급 문제의 구조적 개선이 문제해결의 핵심"이라고 지적했다. 참여연대는 이날 논평에서 "공사비를 줄이기 위한 원청회사들의 싸구려 발주행위가 하청, 재하청 업체들에게 단가와 공기단축 부담으로 전가되고 그 부담은 건설현장의 노동자들의 열악한 근로조건으로 고스란히 전가된다"며 "모두가 책임을 회피하는 가운데 노동자들은 비인간적인 노동시간과 열악한 환경의 문제를 하소연하려 해도 하소연할 수 없는 상황이 빚어지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신영철 경실련 전문위원도 "정부만 의지가 있으면 새로운 입법 절차나 시공참여자 제도의 폐지 등 복잡한 절차가 없이도 충분히 해결 가능한 문제"라고 주장했다. 건설공사 대부분의 발주처인 정부가 일정한 비율은 직접 시공하도록 입찰 기준을 세우기만 하더라도 불법 다단계 하도급으로 인한 건설노동자들의 고충이 상당 부분 해소될 수 있다는 것이다.
포스코 점거 농성이 사회 이슈가 되면서 관련 기사에도 많은 댓글이 달리는 등 이 문제는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다. 이 가운데 한 포털 사이트의 관련 기사에 자신이 포스코 포항산업과학기술연구소에서 근무하는 직원이라며 댓글을 단 사람(아이디 smileagain16)은 "이번 파업 때문에 일처리를 제대로 못해 힘들었다"면서도 "저분들의 심정이 이해가 간다"고 했다.
그는 "38년 전 포항제철 공사를 이끌었던 사람들이 지금의 포항건설 노조"라며 "그런데 지금은 포항제철공업고등학교 출신들과 뛰어난 전문직에 밀려 하청업체에 고용된 노동자로 밀려났다"고 설명했다. 그 과정에서 "(이들은) 연봉도 많이 삭감되고 24시간 중에 14시간을 일하는 중노동에 시달리면서도 제대로 월급도 잘 받지 못한다"고 가까이서 지켜본 건설 일용직 노동자의 현실을 전했다.
한때 지금의 포스코를 만들기 위해 밤잠도 못 자고 일했던 노동자들이 이제는 우리 사회의 빈곤층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더욱이 "생존권을 지켜달라"는 이들의 요구사항은 '우리는 지불능력이 없다'는 전문건설업체와 '우리는 제3자일 뿐 노사관계의 직접 당사자가 아니다'라는 원청업체 포스코, 노동자들의 파업에만 '법과 원칙'을 들이대며 정작 건설산업 전반에 만연한 불법 하도급 문제는 외면하는 정부 사이에서 묻혀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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