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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나서 인혁당 피살자 '한' 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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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나서 인혁당 피살자 '한' 풀라"

[현장] '인혁당 희생자 30주기 추모제', "정권이 몇번이나 바뀌었는데..."

"서대문 형무소에 갔더니 안내원이 사형장에서 외국인 관광객에게 '이곳 사형장은 국제적으로도 사법살인이라는 비난을 받았던 8명이 사형을 당한 곳'이라고 하더라. 그럼 이미 다 된 것 아니냐. 그런데도 정치꾼들은 뭐하는 거냐. 인혁당 사람들 명예회복하고 진상 밝히는 게 그렇게 힘이 드냐. 정권이 몇 번이나 바뀌었는데 그거 하나 못하고 있다. 그것도 못 하는 지도자는 지도자도 아니다."

9일은 '인혁당(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으로 8명의 민주인사가 대법원의 판결을 받은 뒤 하루만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지 30년이 되는 날이다. 이에 앞서 8일 명동성당에서 열린 추모제에서 문정현 신부는 가슴이 답답한 듯 유족들과 함께 위와 같이 울분을 토해냈다.

***75년 4월9일은 국제법학자협회가 규정한 '사법사상 암흑의 날'**

'인혁당'이란 1964년 '굴욕적인 한일회담' 반대시위를 벌이던 학생들을 중앙정보부가 "북한의 지령을 받고 공산혁명을 일으키려 하는 배후세력이 있다"며 발표한 간첩단 사건이다. 그러나 당시 공안 검사들은 증거가 없어 기소할 수 없다며 사표까지 쓰며 반발했고, 고문 사실이 전해지며 13명만 최고 3년형의 처벌을 받은 사건이다.

그러나 10년이 흐른 뒤 1974년. 박정희 정권은 당시 유신헌법을 제정하며 장기집권 체제에 돌입했고, 이에 항거하는 학생들과 지식인들을 탄압하기 위해 1백80여명의 사람을 체포.기소했는데, 이를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민청학련)' 사건이라고 부른다.

이어 중앙정보부는 민청학련의 배후에는 북한의 지령을 받은 남한내 조직이 있다고 발표했고, 이 지하조직이 64년 인혁당 사건의 인물들이라고 지목하고 검거했다. 이것이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다.

총 23명이 구속된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내란예비 음모 및 내란 선동이라는 혐의로 기소돼 군사재판에서 8명이 사형을 선고 받았고, 진술할 기회 한 번 갖지 못한채 이듬해인 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사형확정 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다음날인 4월 9일 바로 사형을 집행했다. 이러한 폭거를 두고 스위스 제네바의 국제법학자협회는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규정했다.

그리고 30년이 흘렀다. 최근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계기였던 '민청학련 사건' 연루자 일부가 민주화운동 명예회복이 인정됐지만, 유독 인혁당 사건만은 민주화 운동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인혁당 희생자 30주기 추모제. "명예회복-진상규명에 정부 적극 나서야"**

이에 사회 각계인사들은 8일 서대문 형무소 참배 및 명동성당에서 '인혁당 희생자 30주기 추모제'를 열고, 당시 사건으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8명과 이후 옥고 후유증으로 숨진 13명의 명예회복과 진상규명을 촉구했다.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함세웅 신부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한 평생을 노력하신 시노트 신부님이 얼마전 함께 금강산을 방문한 자리에서 당시 사형을 당한 8명에 대한 남다른 추억을 얘기하는 강론을 들었다"며 "외국인 선교사가 우리보다 더 강하게 그들과 그 사건을 마음에 끌어 안고 사는 것을 보고 부끄러웠다"고 말했다.

당시 인혁당 사건에 연루된 인물 중 하나였던 박중기 민족민주열사 희생자추모단체연대회의 의장은 "당시 인혁당 사건 사람들은 30년대 전후반에 태어난 사람들로, 일제시대에 태어나 초등학교를 다니고, 20세 전후에 광복과 분단, 신탁통치, 6.25를 겪었던 사람들"이라며 "그들은 4.19 혁명을 계기로 민족.민주 정신에 눈을 뜨고, 군사정권이 들어서자 사회의 발전에 대해 진심으로 고민했던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박 의장은 "그 분들은 진실을 위해 죽음까지도 마다 하지 않았던 사람들"이라며 "아직까지 구차하게 살아 백발을 머리에 이고 사는 것이 죄스럽다"고 울먹이며 추모사를 마쳤다.

당시 민청학련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던 이철 민청학련운동계승사업회 공동대표는 "당시 민청학련의 배후라고 지목된 인사들을 서대문 형무소에서 처음 보게 됐었다"고 중정의 조작을 규탄하며 "정부가 나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하고, 사법부도 정의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현재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들은 대부분 민주화 운동으로 명예회복이 되고 있지만,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은 명예회복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당시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민청학련을 탄압하기 위해 중정이 배후를 조작한 의혹이 짙은 사건이어서 별개의 사건으로 볼 수 없다.

이와 관련 김형태 변호사는 "2002년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에서 인혁당재건위 고문조작 사실을 발표했고, 같은해 12월 서울지법에 인혁당 사건 재심을 청구했으나, 법원은 2년이 넘도록 재심 여부를 결정하고 있지 않다"며 "법원이 재심을 결정할 수 있도록 촉구하는 활동을 적극 펼치겠다"고 말했다.

김 변호사는 특히 "인혁당 사건이 30년이 지나 이를 잘 모르는 젊은이들이 많다"며 "젊은 세대에게도 인혁당 사건의 부당함을 알릴 수 있는 활동을 함께 펼치겠다"고 말했다.

***국정원 진실규명 위원회의 인혁당 사건 조사 여부 주목**

현재 인혁당 사건은 '국가정보원 과거사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 활동의 주요 진상규명 사건으로 포함돼 있어 국정원 진실규명 위원회의 조사 결과에 따라 법원의 재심 결정 및 명예회복 여부가 결정될 것으로 보여 조사 결과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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