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나는 이 편지를 쓰고 싶지 않았다. 지난번에 편지를 썼던 공공부문, 국민연금, 세금 등이야 나름대로 하소연할 것이 많겠지만, 난 솔직히 지금이 좋다. 봄날을 누리는데, 굳이 여기서 나를 노출시킬 이유가 없지 않은가. (☞관련기사: 공공부문, 국민연금, 세금)
불법 대선자금 수사가 진행돼도, 엑스파일 사건이 터져도, 국회에서 아무리 증인으로 불러도 끄덕도 하지 않는 게 우리 집안의 전통이다.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하는 게 바로 우리다.
그래도 오랜만에 편지를 쓰는 것이라 조금은 침잠해진다. 우리도 자신을 되돌아볼 틈이 필요하다. 오늘은 가능한 솔직하게 글을 써보련다.
'현대판 왕족' 우리 집안을 소개한다
내 생각에도 우리 집안은 독특하다. 어릴 때 역사책을 보면서 누구는 왕족이 되고 누구는 노비가 되는 게 어처구니없었는데, 살다보니 바로 우리가 '현대판 왕족'이란 걸 알았다. 오죽 답답했으면 대통령마저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하소연 했겠는가.
여기서 먼저 우리 집안을 소개하겠다.
우리는 '선출되지 않은 최고권력'이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권력은 국민들의 선거로 정해진다. 그것도 독재를 예방하고자 4~5년마다 새로 권력자를 뽑는다. 하지만 우린 선거가 필요 없다. 임기도 무기한이다. 이게 바로 21세기 돈의 힘이다. 현대사회 권력의 원천이 국민, 국민주권이라고? 천만에, 돈이다, 돈!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치권력은 왔다가 가지만, 우리 재벌권력은 끄덕도 없다.
우리는 '핏줄을 중시하는 경제권력'이다. 외국에도 기업들이 뭉쳐 영향력을 행사하는 기업집단이 일부 있지만, 우리처럼 총수일가가 지배하는 경우는 없다. 이건희 회장이 삼성왕국의 제왕이 되고, 그 아들 이재용 씨가 다음 회장으로 옹립되는 데 필요한 것이 핏줄이다. 조선 이씨왕조가 되살아 왔다 해도 할 말은 없다. 정씨 일가, 최씨 일가가 좀 섭섭해 하겠지만 말이다.
우리는 '충실한 가신그룹을 가진 집합권력'이다. 우리 재벌이 왕족으로 살 수 있는 데는 여러 공모자들의 충성이 필요하다. 모피아, 김앤장, 학계, 언론계 등 우리가 먹여 살려야 하는 식구들이 많다. 사실 총수와 일가(혈족 8촌, 인척 4촌)가 지닌 지분은 다 합쳐봐야 2% 안팎인데, 이것으로 재벌체제를 거느리는 건 불가능하다. 기네스북에 오를 만한 갖가지 상속증여 묘안들을 짜낸 게 바로 우리다.
출총제, '솔직히' 폐지되지 않으면 좋겠다
주책없이 집안 자랑만 한 것 같은데, 나는 당신들에게 조금 미안한 마음도 지니고 있다. 당신들, 특히 서민들의 사는 것을 보면 더욱 그렇다.
우리 일가가 해방 후 원조물자를 독점하고, 해외차관을 이용해 땅 짚고 헤엄치며 커 온 것은 당신들도 잘 알 것이다. 하지만 너무 질타하지 말고 넘어가주길 바란다. 그 때는 자본주의 초기 원시적 축적이 벌어지던 때였으니까.
그런데 오늘날까지도 우리를 향한 정부의 지원이 끊이질 않는다. 환율이 떨어지면 달러를 매입해 환율을 방어해 주고, 우리의 주특기인 수출에서 한 탕 하라고 정부가 나서서 미국과 FTA(자유무역협정)를 체결해 준다. 2004년 한해에만 환율방어 비용이 28조 원에 달했다. 그 부담은 분명 국민들의 몫인데, 그 수혜는 주로 우리 집안이 누린다. 한미 FTA도 양지와 음지가 있어, 서민들은 피해를 보고 우리 집안과 금융가는 대박을 거둘 것 같다. 이러니 내가 봐도 양극화가 심화될 수밖에.
법인세 등 세금 감면도 어찌나 많은지. 연구개발비 세금 감면, 임시투자세액 공제 등 우리 집안의 맏형인 삼성 재벌이 작년 한해 면제받는 세금만 1조 원이 넘는다. 법정 법인세율 25%도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들의 평균에 미치지 못하는데, 삼성전자에 적용된 실효 법인세율이 16%대라니…. 내가 생각해도 좀 그렇다.
출자총액제한제는 이미 폐지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데도 우리가 조금만 엄살을 부리면 정치권이나 언론이 '출총제 폐지하라'고 지원사격을 아끼지 않는다. 이건 정말 우리끼리만 소곤거리는 비밀인데, 나는 사실 종이호랑이에 불과한 출총제가 폐지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래야 이걸 핑계로 '규제완화'를 주장하며 다른 것을 얻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삼성, 내가 봐도 대단하다
요즘에는 우리 집안도 조금씩 개선되는 모양을 보여주려고 노력한다. 몇몇은 지주회사체제로 전환하며 세련미를 과시하고 있다. 그래도 아직까진 갈 길이 멀다.
특히 삼성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 그 놈이 잘 나가 배도 아프고, 너무 막 나가 걱정도 했는데, 끝내 사고가 터졌다. 여러 차례 주의를 주었건만 막무가내였다. 삼성에 대해선 나도 할 말이 많다. 그 놈 때문에 자꾸 우리가 양지로 공개되기 때문이다.
삼성은 내가 보기에도 특이한 놈이다. 우리 집안 대표선수인 만큼 색다르게 컸다.
삼성은 우리 재벌 집안에서도 유일하게 1%도 안 되는 지분으로 권세를 누리고 있다. 이건희 총수일가가 삼성그룹 전체에서 지닌 지분은 0.81%다. 참 능력도 좋은 놈이다.
삼성은 가장 많은 금융보험사를 거느린 재벌이다. 재벌들은 보통 많아야 3개의 금융보험사를 소유하고 있는데, 삼성은 무려 10개다. 금융보험사 많은 게 무슨 대단한 일이냐고? 당신네 돈으로, 즉 가입자 보험료로 자기네 재벌체제를 구축하기 때문에 대단하다.
삼성의 왕족 승계과정은 너무 별나다. 에버랜드 전환사채 매입(10만 원 상당 사채를 7700원에 매입), 삼성생명 주식 매입(70만 원 상당 주식을 9000원에 매입), 삼성SDS 신주인권부사채 매입(5만원 상당 사채를 7000원에 인수) 등 헐값 매입이 노골적이다. 이재용 씨 회사에 일감을 몰아주는 회사기회 편취도 공공연하게 이루어진다. 일반 주주의 자산을 총수일가가 도둑질했다고 해도 할 말이 없다.
삼성은 법을 개의치 않는다. 지난번에 금산법 개정이 논란이 된 것도 삼성 때문이었다. 금산법을 위반한 10개 재벌 금융기관 중 당국의 시정조치를 이행하기는커녕 아예 '법을 바꿔달라'고 우긴 곳이 바로 삼성생명, 삼성카드였다. 그리고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 정말 대단하다!
삼성은 노동조합을 부정하는 재벌이다. 우리 집안 모두 노동조합을 싫어하지만 그래도 헌법에 명시된 노동권을 마냥 모른 체 할 수 없어 시늉은 내는데, 삼성은 다르다. 21세기 자본주의가 고도화된 나라에서 아직도 유령노조가 살아 있다니….
사회적 대타협론, 정말 반갑다
요즘 우리 집안을 개혁해야 된다는 목소리가 높다. 여러 번 듣는 이야기고, 다행히 이번 대선에서 우리와 친한 후보가 대통령이 될 것 같아 크게 개의치는 않는다. 그래도 흐르지 않는 물은 썩는 법, 우리도 변해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
우리 집안의 입장에서는 이번 기회에 아예 재벌 규제를 전면 해제하는 것이 최고의 개혁이다. 비판론자들은 재벌이 있기 때문에 재벌 규제가 생긴 것이라 항변하지만, 화끈하게 다 풀어 줬으면 좋겠다. 은행도 하나 가지면 원이 없겠고, 외국인의 적대적 인수합병(M&A)을 막기 위해 차등의결권도 도입됐으면 좋겠다.
그러면 또 비판론자들이 목소리를 높일 것이다. 우리에게 은행을 넘겨주면 금융을 쌈짓돈 쓰듯 유용할 것이라고, 차등의결권 도입은 총수일가의 지배를 영구화하려는 수작이라고.
일단 우리를 한번 믿어 달라. 어찌됐든 우리가 많이 버는 만큼 당신들에게도 조금은 떡고물이 생기지 않겠는가? 그런데, '한번 믿어달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우리뿐만이 아니다. 최근에는 재벌을 싫어하는 진보개혁 진영 일각에서 우리와 친하게 지내자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이들은 외국자본의 공격이 심각하니, 재벌과 노동이 대타협하여 국민경제를 가꾸어가자고 제안한다. 우리에게 경제권력을 확고히 보장해 줄 테니, 그 대신 고용과 사회복지를 책임지라는 이른바 '재벌-사회 빅딜론'이다.
정말 반갑다. 항상 우리를 '사악한' 집단으로 보는 줄만 알았는데, 우리도 '착한' 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다니! 우리 집안의 반세기 역사에서 보면 경사다. 우리에게 돈은 넘쳤으나, 당신들의 믿음과 존경은 부족했기 때문이다. 나도 가끔은 돈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고 생각한다.
근데 당신들이 스스로 무기를 버리고 화해하자는데, 막상 우리가 맞장구를 쳐 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잘 알겠지만, 우린 이미 글로벌 기업이다. 지구 시장에서 최고 이윤을 찾아 떠돌아 다녀야 한다. 이전보다 줄었다고는 하지만, 삼성전자 주식의 48%, 포스코 49%, SK텔레콤 47%, 현대자동차 33%가 외국인 지분이다. 당신 민족의 성원이 경영권을 가져도, 이윤극대화 가치를 훼손하는 경영을 하기가 이제는 어렵다.
글 쓰는 학자들이야 무기를 내려놓겠다고 선언하면 될지 모르지만, 글쎄, 우린 아니다. 지금도 잘 나가는데, 굳이 우리가 그럴 필요가 있을지 모르겠다.
내 권력은 영원할 것이다
우리를 해체하겠다고 덤비는 세력도 있다. 우리의 족벌체제를 해체하고 국민의 기업으로 재탄생시키겠다고 위협을 가한다.
'족벌체제 해체'는 출총제를 강화해 우리의 몸을 묶고, 순환출자 금지와 강제 계열분리제를 통해 수평적 문어발을 아예 잘라버리겠다는 것이다. '국민기업으로의 재탄생'은 우리를 몇 개의 전문업종으로 분할한 후, 새로 기업집단법을 제정해 우리를 착한 전문기업 체제로 교정하겠다는 것이다. 게다가 노동자와 지역사회가 주주도 아니면서 기업경영에 참여하고, 산별 퇴직연금, 국민연금기금을 통해 소유에도 개입하겠다고 한다.
기분은 나쁘지만, 기업집단법이 틀린 이야기는 아닌 듯싶다. 재벌총수가 경제대통령 행세를 하고, 그룹 전략기획실이 청와대 같은 권력을 행사하는데, 이를 견제하는 법과 기관이 없다는 것은 내가 보아도 엉성하다. 노동자와 지역사회가 기업경영에 참가해 공동으로 의사를 결정하겠다는데, 이 얼마나 아름다운 민주주의인가?
그런데 솔직히 가소롭다. 우리 집안의 반세기 역사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게 아니지 않은가? 과연 당신들이 기업집단법을 만들 힘이 있을까? 기업경영에 참가해 전략적 결정을 수행할 능력을 지니고 있는가? 우리의 소유구조를 바꾸겠다고? 노동자의 파업보다 더 위력적인 것이 우리 자본파업(자본철수)인 걸 당신은 아는가?
아무래도 우리 집안의 권력은 영원할 것 같다. 우리 왕국을 공격하기엔 당신들이 너무 약하다. 그래도 당신은 정말 행운아다. 적어도 이렇게 솔직하게 쓴 내 편지를 받아 보았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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