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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철 대법관, 노동자 옥죄는 '이것' 해결해줄 수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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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신영철 대법관, 노동자 옥죄는 '이것' 해결해줄 수 없나?

[김선수, 노동을 변호하다] <7> 직장 폐쇄와 노동3권

신영철 대법관을 기억하는가. 이명박 정부 초반 대법관으로 지명돼 청문회를 거친 후 현재까지 대법관을 지내고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2008년 촛불집회 관련 사건 재판을 빨리 진행하라며 후배 법관들에게 '이메일 압력'을 행사해 논란의 대상이 된다. 대법관 자질에 대한 사회적 의구심도 함께 커져갔지만 그는 여전히, 아직도 대법관직을 수행하고 있다. 그런 신 대법관이 과거 재판연구관 시절 주요하게 언급한 판례가 있다.

대통령 직선제가 부활한 1987년, 노동운동 역시 전례 없는 '전성기(?)'를 맞이했지만, 그에 대한 탄압도 더 교묘해지기 시작했다. 1990년, 나우정밀 파업과 관련된 사건 및 일련의 판결들은 노동자들의 노동3권에 균열을 내는 결과를 가져왔다. 김선수 변호사가 "아직까지 나쁜 영향을 끼치고 있는 판결"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직장 폐쇄 및 퇴거 불응죄와 관련된 판결들이다.

대법원 재판연구관들이 중요 사건에 대해 검토한 연구 결과를 게재하는 <대법원 판례 해설> 제16호에는 위 판결에 대한 당시 신영철 재판연구관(현 대법관)의 해설이 실려 있다. 이 해설에서 당시 신 재판연구관은 이 판결이 "근로자의 쟁의권과 이에 대항하는 사용자의 쟁의행위 사이의 이해 조정에 관련된 판례로서 중요한 선례가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사용자들의 권리를 지키는 데 유용하다는 것으로 읽힌다. 뒤집어 얘기하면 사용자들이 악용하기에 편리하다는 의미도 된다.

김 변호사가 자신이 겪은 1991년, 2002년, 2012년의 관련 사건을 토대로 직장 폐쇄와 퇴거 불응죄가 지금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들여다봤다. 김 변호사는 당시 사건을 회상하며 "재판연구관으로서 1991년 대법원 판결에 기여했던 신영철 대법관이 주심이 되어 전원합의체 판결로 대법원의 견해를 변경해 줄 수는 없을까?"라고 질문을 던진다. <편집자>

김선수, 노동을 변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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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폐쇄는 노동조합의 파업에 대한 사용자의 대항 행위로서 업무의 정상 운영을 저해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행위를 말한다. 노동조합의 파업으로 말미암아 파업 불참자들이 근무해도 아무런 성과도 없을 때 사용자로 하여금 직장 폐쇄를 통해 파업 불참자들에 대한 임금 지급 의무를 면하도록 하는 데 그 의미가 있다. 직장 폐쇄의 핵심 개념 요소는 '근로 제공의 수령 거부'이고, 법률 효과는 파업 불참자에 대한 임금 지급 의무의 면제이다. 직장 폐쇄의 대상은 파업에 참가하지 않고 근무에 임하는 비조합원 또는 파업 불참 조합원들이다. 파업 참가 조합원의 경우에는 사용자에게 임금 지급 의무가 없으므로 직장 폐쇄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직장 폐쇄는 노사 간의 실질적 대등의 보장과 형평 원칙이라는 차원에서 허용되므로 노동조합의 쟁의 행위에 대항하는 데 필요한 한도 내에서만 그 정당성이 인정된다. 시기적으로 노동조합이 쟁의 행위를 한 이후에 개시되어야 하고(대항성), 목적상으로 노동조합의 쟁의 행위로 인하여 노사 간 교섭력의 균형이 깨지고 사용자 측에 현저히 불리한 압력이 가해지는 상황에서 수동적, 방어적인 수단으로 행해져야 하며(방어성), 정도에서 상당성이 인정되는 범위 안에서 행해져야 한다(상당성).

그런데 직장 폐쇄가 행해지는 현실을 보면 파업 중인 조합원들을 사업장에서 몰아내기 위한 방편으로 악용되고 있다. 노동조합이 파업을 시작하자마자 직장 폐쇄가 공격적으로 단행되고, 직장 폐쇄 후에는 구사대 또는 경비용역 인력을 투입하여 파업 농성 중인 조합원들을 몰아내는 과정에서 폭력이 행사된다. 파업 참가 중인 조합원들에 대해서만 직장 폐쇄가 취해지고 파업 불참자들을 이용하여 정상적인 조업이 이루어진다. 노동조합이 파업을 철회하고 조업에 복귀하고자 하는 경우에도 직장 폐쇄를 유지하면서 조합원들의 복귀를 불허하고 각서나 서약서 등의 제출을 강요한다. 직장 폐쇄가 노동조합을 무력화하고 파괴하는 도구로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직장 폐쇄가 이렇게 남용되게 된 데에는 잘못된 대법원 판결이 자리 잡고 있다. 정당성이 인정되는 직장 점거 형태로 파업 중인 조합원들에 대해 사용자가 직장 폐쇄를 이유로 퇴거 요구를 하고, 조합원들이 이를 거부하면 퇴거 불응죄의 책임을 지우는 판결이 그것이다.

나우정밀 사건 판결(대법원 1991. 8. 13. 선고 91도1324 판결)

나우정밀은 구로공단에 있던 전자제조업체로 여성 노동자들이 많이 근무했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 과정에서 구로공단의 다른 회사들과 마찬가지로 노동조합이 설립되었다. 회사 측이 노동조합을 인정하지 않고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여 설립 초기부터 어려움을 겪었다. 1989년 말부터는 임금 인상 등을 요구하는 과정에서 파업을 하게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김점숙 위원장이 1990년 6월 13일, 이은순 부위원장이 6월 14일경 구속되었고, 후에 강연미 선전부장도 함께 기소되었다. 이 사건은 당시 같은 사무실에 근무하였던 김한주 변호사가 주심으로 담당했고, 나는 곁에서 지켜보면서 함께 의논했다.

파업과 관련한 공소 사실은 ① 1989년 12월 19일 조합원 임시총회의 명목으로 노동 쟁의 발생 신고 없이 파업하고, 1990년 5월 18일 등 3회에 걸쳐 사업장 밖 타 회사에서 쟁의 행위를 한 노동쟁의조정법 위반의 점, ② 1989년 12월 19일 조합원총회 시에 컨테이너 차량이 사내에 들어오지 못하게 방해하고, 1990년 3월 14일 집단 조퇴하고 경찰서에 항의 방문함으로써 생산 차질을 초래하고, 1990년 6월 8일부터 회사 정문을 봉쇄하고 작업장을 점거하여 업무를 방해한 업무 방해의 점, ③ 1990년 6월 8일 사용자의 적법한 직장 폐쇄 후 6월 8일과 6월 11일 2회에 걸쳐 퇴거 요구에 불응하고 6월 13일까지 직장점거를 계속한 퇴거 불응의 점 등이었다. 김점숙 위원장은 다른 노동조합 사건에서 증인으로 출석하여 위증했다는 혐의가 추가되었다. 이은순 부위원장은 위장 취업을 위해 타인 이름으로 이력서 및 각서를 위조하여 행사했다는 혐의에 대해서도 기소되었으나, 이 부분은 증거 부족으로 1심에서 무죄가 선고되었고 검사가 항소 및 상고를 하였으나 모두 기각되었다.

1심 선고 결과는 김점숙 위원장과 이은순 부위원장이 각 징역 1년의 실형이었고, 강연미 선전부장은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의 형이었다{서울지방법원 남부지원 1990. 12. 12. 선고 90고단2178,2378(병합) 판결; 판사 이길수}. 위원장과 부위원장이 실형 1년을 받은 것은 유사 사건에 비추어 보면 지나치게 무거웠다.

항소심 진행 과정에서 1심 판결을 선고하기 직전인 1990년 12월 4일 구로공단의 19개 업체 대표들이 재판부에 피고인들은 불법 파업과 연대투쟁을 주도하여 구로공단의 산업 평화를 저해하는 핵심 인물들이므로 일정 기간 사회에서 격리시켜 달라는 취지의 탄원서를 제출한 것이 드러났다. 구로공단 업체들이 두려워할 정도로 두 사람이 열심히 활동했다는 점은 이해할 수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엄벌을 원하는 탄원서를 제출하는 것이 타당한 것인지 또 판사가 그에 따라 두 사람에게 실형을 선고하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피고인들과 검사가 모두 항소했는데, 항소심은 검사와 피고인들의 항소를 모두 기각했다(서울형사지방법원 1991. 4. 4. 선고 91노760 판결: 재판장 판사 신정치, 판사 이혜광, 판사 이건웅). 쌍방이 상고하였으나 대법원은 쌍방의 상고를 모두 기각했다{대법원 1991. 8. 13. 선고 91도1324 판결; 대법관 김석수(재판장) 이회창 이재성 배만운}. 김점숙 위원장은 2009년 6월 8일, 이은순 부위원장은 2010년 11월 15일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 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에서 유죄 판결 및 해직된 것에 대해 명예 회복 결정을 받았다.

이 사건의 대법원 판결은 직장 폐쇄 후 퇴거 불응의 쟁점에 대해 직장 폐쇄가 적법한 한 직장 점거의 정당성 여부에 관계없이 사용자의 퇴거 요구에 불응하면 퇴거 불응죄가 성립한다고 판단했다. 즉, "근로자들의 직장 점거가 쟁의의 목적 달성을 위하여 필요한 범위 내에서 제한적으로 개시됨으로써 적법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사용자가 이에 대응하여 적법하게 직장 폐쇄를 하게 되면, 사용자의 사업장에 대한 물권적 지배권이 전면적으로 회복되는 결과 사용자는 점거 중인 근로자들에 대하여 정당하게 사업장으로부터의 퇴거를 요구할 수 있고 퇴거를 요구받은 이후의 직장 점거는 위법함을 면치 못한다." 지금까지 계속적으로 인용되는, 심각하게 나쁜 영향을 끼치고 있는 판결이다.

대법원 재판연구관들이 중요 사건에 대해 검토한 연구 결과를 게재하는 <대법원 판례 해설> 제16호에는 위 판결에 대한 당시 신영철 재판연구관(현 대법관)의 해설이 실려 있다(신영철, "직장 폐쇄 후 계속된 직장 점거가 퇴거 불응죄를 구성하는지의 여부").

위 해설은 당시 직장 점거 및 직장 폐쇄와 퇴거 불응죄의 점에 대해 우리나라와 일본에 전례가 없는 내용이라면서 위 대법원 판결은 근로자의 쟁의권과 이에 대항하는 사용자의 쟁의 행위 사이의 이해 조정에 관련된 판례로서 중요한 선례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위 판결은 '쟁의권과 사용자의 쟁의 행위 사이의 이해를 조정'한 것이 아니라 노동조합의 정당한 쟁의 행위를 제약하고 노동조합 간부들을 탄압하는 무기로 악용되는 잘못된 대표적인 판결로 현재까지 그 영향이 지속되고 있다.

▲ 신영철 대법관 ⓒ연합뉴스

남서울대학교 사건(대법원 2002. 9. 24. 선고 2002도2243 판결)

천안에 캠퍼스가 있는 남서울대학교의 직원들은 1997년 10월 1일 노동조합을 설립했다. 설립 당시 산업별 연합 단체인 전국대학노동조합연맹(대학노련)에 가입했는데, 대학노련은 1998년 11월 23일 산업별 단위 노조인 전국대학노동조합(대학노조)으로 조직 변경을 하였고, 남서울대학교노동조합은 대학노조 남서울대학교지부로 전환했다.

학교 측의 노조 불인정과 단체교섭 거부 등으로 말미암아 노조는 1998년 10월 21일 적법 절차를 거쳐 파업에 들어갔다. 당일 <한국대학신문>에 이사장의 비리 의혹에 대한 기사가 게재되자, 학교 측은 10월 22일 노조의 요구를 들어주겠으니 파업을 철회해 달라고 요청했다. 10월 22일 오후에 합의서가 작성되어 노조는 파업을 철회했다. 그런데 학교 측이 약속을 지키지 않아 노조는 다시 1998년 12월 16일부터 파업에 돌입했다. 학교 측은 다음날인 12월 17일 자로 조합원들에 대해서만 직장 폐쇄를 단행했다. 학교 교문은 항상 열려 있고 일반인에게 개방되었음에도 학교 측은 조합원의 출입을 금하는 공고를 하고 조합원들의 출입을 제지했다. 조합원들은 대학 진입로를 통하여 교내 주차장, 교직원 식당, 도서관이나 공학관 앞까지 들어가 항의했다.

학교 측은 노조의 행위 하나하나를 트집 잡아 고소했고, 노조 간부들을 상대로 두 건의 위자료 청구 소송도 제기했다. 노조 간부들은 각종 집회, 유인물과 피켓에 의한 명예훼손, 직장 폐쇄 후 학교 구내로 들어간 건조물 침입의 점 등의 혐의로 기소되었다.

우여곡절을 거쳐 1999년 4월 3일 단체협약이 체결되었다. 노조는 법인과 학교 측을 상대로 하여 제기했던 모든 고소·고발과 진정 등을 취하했다. 그런데 노조 간부들에 대한 형사 사건과 법인 및 이사장 명의로 제기한 위자료 소송은 계속 진행되었다. 두 건의 위자료 소송은 1심에서 법인과 이사장에게 각각 3000만원씩 및 500만원씩 지급하라고 인정되었다{대전지방법원 천안지원 2000. 6. 8. 선고 98가합4470, 4487(병합) 판결/ 대전지방법원 천안지원 2000. 6. 8. 선고 99가합1041 판결). 형사 사건은 1심에 계류 중이고 위자료 사건은 항소심(대전고등법원)에 계류 중이던 2000년 11월 16일 자로 노사 간에 합의가 이루어졌다. 위자료 사건은 법인과 이사장이 취하하여 종결되었고, 형사 사건은 법인이 고소취하서를 제출해서 명예훼손 부분은 공소 기각되고 주거 침입 부분만 남게 되었다.

1심 재판은 대전지방법원 천안지원에서 진행되었다. 천안까지 수차 왕복해야 했다. 재판과정에서 법인 보직자가 사용자 측 증인으로 출석하기도 했고, 우리도 증인을 신청해서 신문하는 등 많은 노력이 들었다. 형사사건(김춘호 위원장 외 11인)은 1심에서 주거 침입죄 부분에 대해 유죄를 인정했다(대전지방법원 천안지원 2001. 4. 18. 선고 99고단1504 판결). 항소심은 대전지방법원에서 진행되었는데, 피고인들에게 무죄가 선고되었다(대전지방법원 2002. 4. 19. 선고 2001노1004 판결: 재판장 판사 이승영, 판사 심활섭, 판사 당우증).

학교 측이 파업 개시 하루 만에 파업 참가 조합원들만을 상대로 전격적으로 단행한 직장 폐쇄는, 근로자 측의 쟁의 행위에 의해 노사 간에 힘의 균형이 깨지고 오히려 사용자 측에 현저히 불리한 압력이 가해지는 상황에서 회사를 보호하기 위하여 수동적·방어적인 수단으로서 부득이하게 개시된 것이라고는 도저히 보기 어려우므로, 형평의 견지에서 근로자 측의 쟁의 행위에 대한 대항·방위 수단으로서 상당성이 인정되지 아니하여 정당성을 결여했다고 판단했다. 이에 대해 검사가 상고했으나 대법원은 검사의 상고를 기각했다{대법원 2002. 9. 24. 선고 2002도2243 판결; 대법관 배기원(재판장) 서성(주심) 이용우 박재윤}.

나우정밀 사건 대법원 판결로 인해 직장 폐쇄의 정당성이 인정되면 책임을 면하기 어려울 것 같아 이 사건에서는 직장 폐쇄의 정당성 여부를 집중적으로 주장했다. 대법원 판결은 "사용자의 직장 폐쇄는 사용자와 근로자의 교섭 태도와 교섭 과정, 근로자의 쟁의 행위의 목적과 방법 및 그로 인하여 사용자가 받는 타격의 정도 등 구체적인 사정에 비추어 근로자의 쟁의 행위에 대한 방어 수단으로서 상당성이 있어야만 사용자의 정당한 쟁의 행위로 인정될 수 있고, 사용자의 직장 폐쇄가 정당한 쟁의 행위로 인정되지 아니하는 때에는 다른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근로자가 평소 출입이 허용되는 사업장 안에 들어가는 행위가 주거 침입죄를 구성하지 아니한다"고 법리를 전개한 후 원심의 판단을 지지했다.

직장 폐쇄의 정당성을 부인하는 방법으로 직장 폐쇄 후의 직장 점거에 대해 무죄 판결을 받아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한국노동연구원 사건(대법원 2012. 4. 13. 선고 2012도44 판결)

나우정밀 사건 대법원 판결이 직장 폐쇄를 남용하는 근거로 악용되고 있어 이 판례의 입장을 변경할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던 차에 한국노동연구원 사건을 맡게 되었다. 대법원 판례의 입장을 변경하기에 안성맞춤인 사건으로 보였다.

정부 출연 연구기관인 한국노동연구원에는 전국공공연구노동조합 한국노동연구원지부가 조직되어 있다. 연구원에서는 그간 파업이 발생한 적이 없었는데, 2008년 8월 박기성 원장이 부임한 이래 노사 관계가 어렵게 전개되었고 결국 2009년에 파업까지 발생했다. 박기성 원장은 2009년 2월 3일 노조 측의 통일교섭 요구를 거부했고, 2월 5일 단체교섭권을 노무법인에 위임했으며, 2월 6일에는 단체협약 해지 통보를 했다.

노동조합은 노동위원회에 조정 신청 및 조합원 찬반투표 등의 절차를 준수하여 2009년 7월 13일부터 부분 파업을 진행했다. 연구원 측은 2009년 8월 5일 지부장의 업무 복귀 및 노동조합 사무실 제공 중단 통보, 8월 10일 근무시간 중 조합 활동 금지 및 조합비 일괄 공제 중단 통지 등으로 대응했다. 이에 노동조합은 2009년 9월 21일부터 전면 파업을 진행했다.

노사 간에 2009년 11월 10일 본교섭이 재개되어 11월 26일에는 노동조합이 연구원 측의 수정안을 수용하겠다는 입장을 밝혀 타결이 예상되었다. 그런데 연구원 측은 교섭 결렬을 통보하고 11월 30일 오후 10시 무렵 연구원 9층과 10층 출입문에 12월 1일 오전 8시부터 직장 폐쇄를 한다는 공고문을 부착했다. 조합원들은 직장 폐쇄 후 사무실 안으로는 들어가지 않고 2009년 12월 1일부터 4일까지 9층 엘리베이터 앞 로비에서 농성을 하다가 12월 5일부터는 아예 연구원 시설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한편 박기성 원장이 국회에서 헌법의 노동3권 보장 조항을 삭제해야 한다는 것이 자신의 소신이라고 발언한 것이 문제가 되어 12월 14일 사표를 제출했다. 노동조합은 박기성 원장의 사직 소식을 듣고 긴급조합원총회를 개최하고 12월 15일부로 지부장 1인을 제외한 모든 조합원이 파업을 중단하고 업무에 복귀할 것을 결의하고 이를 연구원 측에 통보했다. 연구원 측은 12월 15일 파업을 종료하고 업무에 복귀한 조합원들에 대해 사무실 출입과 업무 수행을 저지하면서 개별적으로 파업종료확인서를 작성할 것을 종용했다. 노조가 12월 18일자로 조합원들의 개별 서명을 받은 '업무 복귀 확인서'를 노조 명의로 제출했음에도 연구원 측은 조합원들의 업무 복귀를 허용하지 않다가 12월 30일에야 조합원들의 업무 복귀를 허용하면서 12월 15일 이후의 임금을 지급했다.

연구원은 2009년 12월 11일 자로 전체 조합원들을 파업 중의 행위에 대해 업무 방해 혐의로, 그리고 직장 폐쇄 이후의 9층 로비 점거에 대해 퇴거 불응 혐의로 고소했다. 연구원을 지도·관리하는 경제인문사회연구회는 연구원으로부터 자료를 건네받아 전체 조합원들을 고발했다. 명백하게 파업에 참가하지 않은 조합원들도 고발한 것으로 밝혀져 뒤에 일부에 대해 취하하기도 했다.

영등포경찰서가 서울남부지방검찰청의 지휘를 받아 수사를 했다. 업무 방해 혐의로 기소하기 위하여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철저하게 수사했다. 주요 노조 간부들의 통화 내역까지 입수하고, 건물 관리 회사 직원과 다른 층 근무자들까지 불러서 조사했다. 검찰은 1년 이상 수사를 한 후 2010년 12월 31일 전국공공운수노조 위원장과 정책국장 그리고 연구원지부장을 퇴거 불응 혐의로 구약식기소 했다. 주된 혐의 사실이었던 업무 방해에 대해서는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무혐의 처분을 했다. 그리고 2011년 1월 3일 자로 노조원 46명에 대해, 업무 방해 혐의에 대해서는 무혐의 처분을 하고 퇴거 불응 혐의에 대해 기소유예 처분을 했다.

구약식기소된 피고인들은 정식 재판을 청구했고, 기소유예 처분을 받은 조합원들은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헌재 2011헌마142)을 제기했다. 이 사건에서 법리적 쟁점은 정당성이 인정되는 병존적·부분적 직장 점거 형태의 쟁의 행위가 사용자의 직장 폐쇄에 의하여 위법한 것으로 전환되고, 나아가 퇴거 요구에 불응했다고 해서 퇴거 불응죄가 성립하는가 여부이다.

이에 대해서는 나우정밀 사건의 대법원 판결이 있지만, 대법원 판결(2007. 12. 28. 선고 2007도5204)은 '정당한 쟁의 행위로서 회의실을 부분적, 병존적으로 점거하고 있던 피고인 등 조합원들로서는 서용자 측의 퇴거 요구(직장 폐쇄를 이유로 하는 것인지 여부와 상관없다)에 응하여야 할 의무가 인정되지 아니한다"고 판단한 바 있고, 또 다른 대법원 판결(2010. 6. 10. 선고 2009도12180)은 사용자가 직장 폐쇄의 효과로서 조합원들의 사업장 출입을 제한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사업장 내의 노조 사무실 등 정상적인 노조 활동에 필요한 시설, 기숙사 등 기본적인 생활 근거지에 대한 출입은 허용"되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노동연구원 사건은 대법원 판례 입장에 의하더라도 무죄가 가능할 수 있다. 우선 직장 폐쇄가 방어성과 상당성 등의 요건을 구비하지 못하여 위법한 것으로 평가되면 된다. 또 직장 폐쇄가 정당하다고 하더라도 9층 로비를 '사업장 내의 노조 사무실 등 정상적인 노조 활동에 필요한 시설, 기숙사 등 기본적인 생활 근거지' 또는 그에 준하는 것으로 본다면 조합원들이 퇴거 요구에 응할 의무가 없게 된다. 이런 관문에서 걸리지 않으면 대법원 판결을 변경하여야 한다.

1심 재판 과정에서 고소인 및 고발인 측 주요 참고인 4명의 진술조서를 부동의하여 이들을 검찰 측 증인으로 소환했다. 우리 측 증인으로는 공인노무사 자격이 있는 노동조합 기획부장을 불러 파업의 원인과 전반적인 진행 과정 그리고 직장 폐쇄 이후의 상황에 대해 상세한 증언을 들었다. 1심 판사는 진행 과정에서 무척이나 부담스러워했고, 이렇게 저렇게 질문하는 것을 보니 노동법에 대해서는 깊이 연구가 되어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래도 진지한 자세를 보여 좋은 결과를 기대했는데, 유감스럽게도 유죄를 선고했다(서울남부지방법원 2011. 8. 8. 선고 2011고단280 판결, 판사 장성관).

어차피 대법원까지 가야 할 것으로 각오했지만 하급심에서 좋은 결과를 가지고 올라가길 바랐는데 아쉬움이 많았다. 항소를 제기하고 법리적인 주장을 중심으로 항소이유서를 제출했다. 사실 인정이나 증거 관계는 크게 문제될 것이 없었기 때문에 첫 기일에 결심을 했다. 재판부 구성에 비추어 일말의 기대를 했으나 항소 기각 판결이 선고되었다(서울남부지방법원 2011. 12. 8. 선고 2011노1125 판결: 재판장 판사 이림, 판사 설정은, 판사 최환영).

결국 대법원까지 가게 되었다. 당사자들이 비용 문제로 상고 여부를 고민했다. 대법원 판결을 꼭 받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상고를 제기해서 상고이유서 마지막에 대법원 판례를 변경할 필요성이 있다는 점도 명시적으로 지적했다. 그런데 대법원 판결은 너무 허망하게 몇 줄로 원심 판결에 위법이 없다고 썼다{대법원 2012. 4. 13. 선고 2012도44 판결; 대법관 이인복(재판장) 김능환(주심) 안대희 박병대}.

한편 기소유예 처분된 조합원들이 제기한 헌법소원 사건은 2012년 7월 26일자로 기각되었다. 재판관 정원은 9명인데, 7명만이 심판에 참여했다. 당시 헌법재판소가 오랜 기간 비정상적인 상태로 방치되고 있었다.

대법원 판례의 변경은 다음 기회로

이렇게 해서 직장 폐쇄 후 정당한 직장 점거 지속 행위의 퇴거 불응죄 성립 여부에 대한 대법원 판례의 변경은 다음 기회를 기약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에 대한 나우정밀 사건 1991년 대법원 판결이 아직도 폐기되지 않고 효력을 유지되고 있어 많은 노동조합 간부들이 여전히 형사처벌의 위협을 받고 있으며, 사용자들은 이 판결을 악용하여 공격적 직장 폐쇄를 악용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김지형 전 대법관 퇴임 기념 논문집에 "직장 점거, 직장 폐쇄 및 퇴거 불응죄 관련 판결 검토"라는 제목으로 논문을 게재한 바 있다('김지형 대법관 퇴임기념 노동법실무연구' 제1권, 2011, 590-626면).

재판연구관으로서 1991년 대법원 판결에 기여했던 신영철 대법관이 주심이 되어 전원합의체 판결로 대법원의 견해를 변경해 줄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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