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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는 왜 캐디를 '사장님'으로 만들어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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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회사는 왜 캐디를 '사장님'으로 만들어줬나

[김선수, 노동을 변호하다] <3> 캐디 노조 설립 신고 행정소송

'특고'라는 말이 있다. 특수고용노동자를 말한다. 회사의 지시를 받지만 개인사업자로 등록해 일하는 사람들이다. '특고'를 사용하면 회사가 져야 하는 의무를 대부분 벗어던질 수 있다. 회사 입장에서는 훌륭한 발명품이다. 우리 사회 곳곳에는 사장님이면서 회사의 업무 지시를 따르고, 각종 부당한 대우에 시달리는 '특고'들이 많다. 학습지 교사, 대학 강사, 택배 기사, 방송 작가, 레미콘 기사, 골프장 캐디…. 이들은 근로계약서가 아니라 위탁사업자계약서를 작성한다.

노태우 정부 시절 노동 탄압이 한창일 때 '특고' 문제가 대두됐다. 바로 1989년에 발생한 골프장 캐디 노조 사건이다. 회사는 캐디들을 실질적으로 통제하면서도 개인사업자, 즉 '사장님' 취급하며 캐디피를 직접 받도록 했다. 이런 꼼수들은 곳곳에서 나타났다. 이를 통해 회사는 노동하는 사장님을 부리게 됐고, 노동하는 사장님들은 노동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됐다. 결국 정부는 기다렸다는 듯 노조 설립을 취소해 버렸다. 지난한 싸움이 시작됐다. 싸움이 끝났을 때는, 이미 지친 캐디들이 집으로 돌아간 뒤였다.

한국 사회에서 이런 형식의 '특고'는 노태우 정부 들어서 급속히 늘어났고, IMF 사태를 거치면서 아예 일반적인 일로 인식되고 있다. 2005년 레미콘 기사들의 파업이나 덤프연대 파업 등으로 그 실상이 알려지고 있지만, 악랄한 형태의 '특고'들은 여전히 사회 곳곳에 차고 넘친다. 이들은 아직까지도 노동자임을 증명하기 위해 싸우고 있다. 김선수 변호사는 대한민국 '특고'의 역사에서 '특고'의 노동조합 설립이 정당하다고 인정을 받게 된 '캐디 사건'의 변론을 맡았었다. <편집자>

김선수, 노동을 변호하다
전태일을 생각하며 변호사를 꿈꾸다
노동 변호사를 야유한 노동자들, 그 실체는…

내가 노동사건을 본격적으로 담당하기 시작하였을 무렵인 1989년 7월 초순경 유성관광개발주식회사가 운영하는 대전 유성구 소재 유성컨트리클럽 골프장에서 캐디로 근무하고 있는 여성들이 사무실을 방문했다. 캐디들은 노동조합을 설립하고 관할 행정관청에 설립 신고를 하여 행정관청으로부터 설립 신고증을 교부받았는데, 그후 행정관청으로부터 설립 신고 수리 취소 통보를 받아 이에 대해 소송을 제기하고 싶다고 했다.

현재도 특수고용노동자 또는 특수형태근로종사자라는 명칭으로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당시에는 특수고용노동자 또는 특수형태근로종사자 등의 명칭이 사용되지도 않았다.

일반적으로 법조인이 되면 골프를 치는 것이 거의 관행화되어 있다. 군 법무관 시절 골프를 배우고, 임용된 지 얼마 안 되는 판사나 검사도 골프장에 나가는 경우가 많다. 특히 지방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나는 시간적인 여유도 없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여건도 허락하지 않았다. 또한 야산을 깎고 농약을 쳐 생태를 파괴하는 행위에 가담하지 않는다는 차원에서도 골프를 배우지 않았다. 골프채는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에 근무하던 2006년에 해외 시찰을 나갔다가 영국 히드로공항에서 여유 시간이 있어 기다리면서 단원들과 함께 공을 쳐보기 위해 한 번 잡은 적이 있다. 공을 맞추기도 쉽지 않았다.

1989년에 캐디들과 상담할 때 나는 캐디들의 역할이 무엇인지, 어떤 조건에서 근무하는지 전혀 몰랐다.

'캐디 사장님들'의 열악한 근무 여건, 흙 묻은 공 닦고 결근하면 해고

당시 상담을 통해 파악하게 된 캐디들의 근무 여건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입사하여 캐디가 되려면 회사에서 일간신문에 낸 채용 공고를 보고 응모하여 일정한 과정을 거쳐 합격해야 한다. 1년에 3회 정도, 1회에 40여 명 정도 모집했다고 한다. 캐디로 입사하기 위해서는 이력서와 주민등록등본 등 서류를 제출하고, 서류 전형을 통과하면 면접을 본다. 면접에서 합격하고 통지를 받은 후 30일간의 코스 숙지, 경기 규칙과 이론 교육 등을 받는다. 교육을 받은 후 3~4개월가량 주말에만 근무하는 수습 기간을 거친다. 그후 다시 필기시험을 봐서 합격을 하면 1개월가량 가번호를 부여받고 근무하기 시작한다. 그런 후에야 비로소 정식 직원으로 발령을 받게 된다. 정식 직원이 되면 고유번호가 정해지고, 아크릴 명패를 지급받는다.

캐디들의 근무 형태는 일주일 단위로 근무 시간이 순환하는데, 순환 주기에 따른 출퇴근시간은 거의 일정했다. 매주 화요일에는 캐디 전원이 오전 9시 30분까지 출근하여 회사의 부사장, 차장, 캐디마스터 등으로부터 지시 사항 및 교육을 받고 2시간 정도 코스 정리와 청소 등을 한다.

캐디들의 주된 업무는 내장객의 골프 가방과 모래주머니를 메고 라운드를 돌면서 골프채를 꺼내주고 숲 속에 들어간 공을 찾아주며 흙으로 더러워진 공을 닦아주는 등 내장객에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잔디가 팬 곳을 모래로 메우는 것 등이다. 잔디 파손 부분의 손질은 골프 규칙상으로는 경기인인 내장객의 의무로 되어 있지만 보통 캐디가 담당한다. 경기 진행이 늦을 경우 캐디들이 회사로부터 제재를 받게 되어 경기 진행 속도도 조절해야 하고, 근무 도중에는 회사의 지시 사항과 수칙을 준수해야만 한다. 캐디들에 대한 지휘 계통은 사장, 부사장, 차장, 캐디마스터로 되어 있다. 회사가 캐디들 중에서 중간 관리자로 조장을 임명하여 조장을 통해서 회사의 지시 사항을 전달했다.

회사는 일반 직원에게 적용하는 취업규칙을 캐디에게 적용하지는 않았지만, 캐디가 규칙을 어기거나 결근을 하게 되면 해고나 근무 정지 또는 배치 거부 등의 제재 조치를 취했다. 캐디로 근무하는 동안 다른 부업을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했고, 전업으로 캐디 업무에 종사해야 했다.

캐디들은 근로 제공의 대가로 고객이 입장하면서 회사에 지불한 캐디피 5000원을 회사로부터, 그리고 고객으로부터 봉사료로 통상 1만 원을 지급받아 생활했다. 회사는 노조 설립 전부터 캐디들을 개인사업자로 등록하게 하고 사업소득세를 납부하도록 했으며, 갑종근로소득세를 원천징수하지 않았다. 그러다 노동조합 설립 이후 캐디로 하여금 고객으로부터 캐디피도 직접 받도록 했다.

▲ 아직도 '골프장 캐디'는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사진은 지난 2009년 국가보훈처가 운영하는 골프장 88CC 캐디 노동자들이 회사의 부당 해고를 철회하라며 국가보훈처 앞에서 시위를 벌이는 모습. ⓒ프레시안(허환주)

▲지난 2009년 국가보훈처가 운영하는 골프장 88CC 캐디 노동자들이 회사의 부당 해고를 철회하라며 국가보훈처 앞에서 시위를 벌이는 모습. ⓒ프레시안(허환주)

캐디 노동조합 만들었지만 관청이 나서서 '설립 취소'

캐디들은 회사에 고용되어 근무하는 근로자라는 인식을 하고 있었다. 일반 직원과 담당 업무가 달랐지만, 골프장을 운영하는 회사에 꼭 필요하고도 중요한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는 자부심도 있었다. 캐디피는 회사로부터 직접 받는 임금이고, 고객으로부터 받는 봉사료도 사실상 임금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유성컨트리클럽에서는 1989년 5월경 골프장 식당의 직원들이 시간외 수당 문제로 회사 측과 협상이 타결되지 않아 식당 영업을 하지 않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 여파로 대기실에서 잠을 자고 새벽 근무를 하는 캐디들이 아침식사를 못하게 되었고, 이 일을 계기로 캐디들은 근로 조건의 문제점을 개선하기로 마음먹고 정상 근무를 거부하는 단체행동을 벌였다. 당시 캐디들이 제기했던 요구 사항은 캐디피 인상, 장기 근속자에 대한 격려금 지급, 한 달에 2일의 휴무 제공, 조장 직선제 등이었다. 회사 측이 캐디들의 이러한 요구를 무시하여 캐디 전원이 근무를 거부하는 단체행동을 하게 만든 것이다. 그 결과 1989년 6월 1일 회사 측이 캐디들의 요구 사항 대부분을 수용하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런데 회사 측은 합의를 하고도 합의 사항을 이행하지 않았다. 회사는 캐디들이 조장을 직선으로 선출하려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이에 캐디들은 자신들의 권익을 옹호하기 위해서는 노동조합을 설립하는 방법밖에는 없다고 생각하고, 1989년 6월 4일 유성관광개발컨트리클럽노동조합 설립 총회를 개최하고 노동조합을 설립했다.

노동조합은 관할 행정관청인 대전직할시 유성구청에 노동조합설립신고서를 접수하였다. 유성구청은 1989년 6월 23일에 노동조합설립신고증을 교부하여 주었다. 이로써 노동조합은 형식적인 요건까지 갖춘 합법적인 단체가 되었다.

그런데 유성구청장은 1989년 7월 3일자로 노동조합에 노동조합설립신고수리를 취소한다는 통지를 보냈다. 그 이유는 캐디들의 경우 회사와 근로계약을 체결한 것이 아니어서 근로자로 볼 수 없기 때문에 노동조합설립신고증 교부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갈팡질팡하는 행정관청의 행정 처리로 말미암아 노동조합의 입장에서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꼴이 되었다.

노동조합은 행정관청의 처분에 항의하는 한편, 회사 측에는 단체교섭을 요청하였다. 회사는 유성구청장의 취소 처분을 이유로 단체교섭에 응하지 않았고 나아가 노동조합을 인정조차 하지 않았다.

행정 소송 제기하자마자, 16명 해고로 맞선 회사

이러한 상황에서 당사자인 캐디들이 법률적인 구제조치를 밟고자 우리 사무실에 찾아온 것이다. 방법은 노동조합 설립신고수리 취소 처분을 취소해달라는 행정소송을 제기하는 것이었다. 당시 행정소송을 제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행정심판 절차를 먼저 거쳐야 했고, 행정법원이 설립되기 전이어서 행정소송은 고등법원에 제기하여 2심으로 운영되었다.

노동조합이 어려운 상황에서 회사와 싸우고 있었기 때문에 신속한 절차 진행이 필요했다. 그래서 1989년 7월 15일자로 행정처분의 취소를 구하는 행정심판을 제기함과 동시에 서울고등법원에 행정소송(취소소송)과 함께 효력정지신청서를 접수했다.

그러자 회사는 그 다음날인 7월 16일자로 노동조합 집행부와 핵심 조합원 16명을 해고했다. 회사는 근로자가 아닌 자의 가입을 허용한 경우 노동조합으로 보지 않는다는 노동조합법의 조항을 근거로 해고자들의 출입을 막았고, 이에 해고자들은 바로 해고무효확인 소송을 제기했다. 당시의 노동조합법은 "해고의 효력을 다투고 있는 자를 근로자가 아닌 자로 해석하여서는 아니 된다"고 규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해고무효확인 소송을 제기하더라도 일단 근로자의 지위를 유지할 수는 있었다(이 조항은 1997년 오히려 개악되어 "해고된 자가 노동위원회에 부당노동행위의 구제신청을 한 경우에는 중앙노동위원회의 재심판정이 있을 때까지는 근로자가 아닌 자로 해석하여서는 아니 된다"로 바뀌었다. < 편집자>). 다만 해고무효확인 소송은 대전에서 진행하여야 했기 때문에 내가 담당하지는 못했다.

회사 명령 따르는데 노동자가 아니다?

행정소송 재판 과정에서 우리는 캐디들이 회사와 명시적인 근로계약서를 작성하지는 않았다 해도 입사 과정에서 채용 여부나 교육 등을 회사가 실질적으로 결정하고 시행했으며, 근로 제공 과정 등에서 회사의 지휘명령에 따라야 했기 때문에 캐디와 회사 사이에 사용종속관계가 인정되며, 캐디피는 근로의 제공에 대한 대가라고 할 수 있으므로 노동조합법상의 근로자에 해당된다고 주장했다.

또한 캐디들은 당연히 노동조합을 설립할 수 있으며, 유성구청장의 취소 처분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을 전개하기 위해 노동법상의 근로자 개념과 그 범위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를 하고 그 결과를 정리한 준비서면을 제출했다. 특히 근로기준법상의 근로자와 노동조합법상의 근로자 개념이 다르고, 노동조합법상의 근로자는 더 넓게 적극적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회사 측은 회사와 캐디 사이에 정식 근로계약을 체결하지 않았고, 캐디들은 근로소득세를 내지 않고 사업소득세를 내고 있으며, 캐디피도 회사가 지급하는 것이 아니라 고객이 지급하는 것이므로 이를 임금이라 할 수 없다는 등의 이유로 캐디들은 근로자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행정심판 단계에서 잘못된 행정처분이 시정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행정관청 내부에 시정 기회를 주자는 취지에서 행정심판 절차가 인정되고 있으나, 오히려 행정소송 제기를 지연시키는 역할밖에 하지 않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그러한 폐단으로 인해 1993년 사법 개혁의 일환으로 행정심판 절차가 임의화되어 행정심판을 거치지 않고 바로 행정소송을 제기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당시 행정소송을 제기하고 효력정지신청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행정심판 절차를 거쳐야 했기 때문에 형식적으로 행정심판 절차를 밟았던 것이다. 행정심판에 대해서는 전혀 기대를 하지 않았고, 예상대로 아무런 소득도 없었다.

신속한 노동조합의 지위 회복을 위하여 효력정지 신청을 하였는데, 재판부는 1989년 9월 27일자로 효력정지 신청을 기각했다. 본안소송에서 우리 측과 회사 측은 필요한 증거서류를 제출하고, 각각 증인을 내세워 주장과 사실을 입증했다. 행정소송 판결은 1990년 2월 1일 선고되었는데 우리가 패소했다(서울고등법원 1990. 2. 1. 선고 89구9762 판결 : 재판장 판사 김연호, 판사 서태영, 판사 홍성무). 이유는 캐디들이 회사와 근로계약을 체결했다고 보기보다는 오히려 회사의 중개로 내장객과 고용 내지 도급 계약을 체결하고 내장객의 경기를 보조하는 업무에 종사한다고 보는 것이 맞다는 것이다.

캐디들이 회사로부터 출근시간, 근무 상태, 내장객의 경기과 정에서 생긴 잔디 파손 부분의 손질이나 청소 등에 관하여 일정 범위 내에서 지시감독을 받고 있는 것은 골프장 시설을 이용함에 부수적으로 질서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범위에 국한되어 있는 만큼 그것만으로는 캐디들과 회사 및 내장객 사이의 법률관계를 달리 볼 수 없어 결국 캐디들은 회사의 근로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나중에 간접적으로 들은 이야기지만 고등법원에서 이 사건을 담당했던 재판장이 동료 변호사와 함께 유성컨트리클럽에 가서 골프를 쳤는데, 캐디들이 판결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재판장이 아무것도 모르면서 노동조합의 청구를 기각했다고 재판장을 비난했다고 한다. 옆에 바로 그 재판장이 있는 줄도 모르고 캐디들이 그렇게 말을 했지만 이를 들은 재판장은 아는 체할 수도 없어 무척 쑥스러워 했다고 한다.

대법원 판결, 재판장 입에서 '원'이 발음됐다

우리는 고등법원 판결을 받고 14일 이내에 대법원에 상고를 제기했다. 고등법원 판결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상고이유서를 제출하고, 상대방도 답변서를 제출했다. 그런데 대법원은 도무지 선고를 하려고 들지 않았다. 상고된 사건을 어느 기간 내에 반드시 선고해야 한다는 강제 규정이 법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헌법 제27조 제3항은 "모든 국민은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대법원이 지나치게 늦게 선고하는 것은 국민의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국민의 기본권 보장 기관으로서 대법원 본연의 직무를 유기한다는 비난을 모면하기 어렵다.

대법원 판결은 1993년 5월 25일에야 선고되었다. 상고를 제기하고 3년 3개월 이상이 지난 후이다. 판결의 주문은 '원심 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에 환송한다'로, 상고를 제기한 우리가 승소한 것이다{대법원 1993. 5. 25. 선고 90누1731 판결: 대법관 최재호(재판장) 배만운 김석수(주심) 최종영}. 대법원 선고를 들을 때 첫말이 '원'인가 '상'인가에 따라 승패가 갈린다. 주문이 '상고를 기각한다'였으면 우리가 패소하는 것이었는데, 어렵게 우리가 승소한 것이다.

대법원은 고등법원과는 달리 골프장 소속의 캐디들은 회사와 종속적 근로 관계에 있다고 인정했다. 같은 사실관계이지만 달리 평가한 것이다. 대법원은 캐디피가 근로기준법상의 임금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당시 노동조합법 제4조 소정의 "기타 이에 준하는 수입"으로 못 볼 것도 없다고 보았다.

캐디피의 지급 방법을 내장객이 캐디에게 직접 지급하는 방법으로 변경하였다고 해도, 이는 캐디피의 지급 의무가 있는 것으로 보이는 회사가 골프장에서 경기에 임하려면 어차피 캐디피를 지불해야만 할 입장에 있는 내장객으로부터 캐디피를 수령한 것으로 하고, 그 대신 내장객에게 캐디에 대한 캐디피의 지급을 위임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므로, 캐디피의 지급 방법 변경으로 캐디피의 지급 주체가 달라진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라고 명확히 했다.


대법원의 늦은 판결문을 받고 보니 조합원들은 모두 떠난 상태

대법원에서 실체적인 판단을 하고 서울고등법원으로 환송하였다. 그래서 환송심에서는 형식적인 심리만 간단히 하고 최종적으로 원고 승소 판결이 선고되리라 생각하며 가벼운 마음으로 파기환송심에 임했다. 그런데 파기환송심에서 회사 측은 조합원들이 모두 퇴직하거나 탈퇴하여 조합원이 한 사람도 없기 때문에 실체가 없는 노동조합은 원고로서 자격이 없고, 또한 나에게 소송을 위임한 노동조합 위원장도 현재 조합원이 아니므로 소송대리권이 실제로 위임되었는지도 알 수 없다고 했다. 소송대리권을 부인하는 항변을 한 것이다.

변호사가 소송대리권을 부인당하면 당사자가 작성한 소송위임장을 공증에서 제출하거나 당사자가 직접 법정에 출석하여 소송대리권을 부여한 사실을 소명해주어야 한다. 그런데 대법원이 3년 넘게 판결을 선고하지 않고 있는 동안 노동조합을 설립했던 사람들이 모두 회사를 떠났고, 설립 당시의 노동조합 위원장과는 연락마저 끊긴 지가 오래되었다.

결국 나는 소송대리권을 소명할 수 없게 되어 어쩔 수 없이 사임계를 제출하고 말았다. 그후 소송에 관여할 수 없어서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으나, 아마도 노동조합으로서 실체가 전혀 없다는 이유로 각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캐디가 노조법상의 근로자에 해당하여 노동조합을 설립할 수 있다는 대법원 판결을 받아내 나름대로 성과를 거두기는 하였으나, 결론적으로는 권리 구제에 실질적인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 것이다. 이것은 물론 대법원 판결이 너무 늦게 선고되었기 때문이다. 당사자들이 열정을 가지고 투쟁하고 있을 때 대법원 판결이 선고되었다면, 그 판결은 당사자들의 권리 구제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였을 것이고, 캐디와 유사한 처지에 있는 학습지 교사, 보험 모집인 등 특수고용노동자들의 노동 기본권 신장에 크게 기여했을 것이다.

아직도 진행 중인 특수고용노동자의 문제

캐디와 같이 사실상 근로자로서 근무함에도 형식상 사업자등록을 하고 도급 또는 위탁 등의 형태로 노무를 제공하는 사람들은 특수고용노동자라 한다(산업재해보상보험법에서는 '특수형태근로종사자'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편집자>). 근로기준법이나 노조법과 같은 노동법상의 근로자로 인정되느냐 여부가 이들의 권리 보장과 관련하여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근로자로서 지위가 부정되면 해고 제한 규정의 적용을 받지 못해 고용이 불안정하고, 업무상 재해를 당하더라도 산업재해보상보험을 적용받지 못하며, 노동조합 활동도 보장받지 못하게 된다.

캐디가 노동조합법상 근로자에 해당한다는 판결을 받은 이후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에 해당하는지 여부에 대한 소송을 우리 사무실에서 담당하게 되었다. 어떤 캐디가 1993년 9월 29일 경기를 보조하다가 갑자기 쓰러져 병원으로 옮기던 중 사망하여 그 유족이 산업재해보상보험법에 근거하여 유족 보상 등을 청구하였으나, 근로복지공단이 캐디는 근로기준법상의 근로자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부지급처분을 했다. 이에 대해 행정소송을 제기하여 서울고등법원은 근로기준법상의 근로자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아 원고 승소 판결을 선고했다(서울고등법원 1995. 8. 3. 선고 94구17255 판결).

그런데 대법원은 골프장에서 일하는 캐디는 골프장 시설운영자인 회사에 대하여 사용종속관계 하에서 임금을 목적으로 근로를 제공하는 근로기준법상의 근로자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대법원 1996. 7. 30. 선고 95누13432 판결: 대법관 지창권(재판장) 천경송(주심) 안용득·신성택}. 같은 캐디에 대해 대법원은 노동조합법상 근로자에는 해당하지만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에는 해당하지 않는다는 서로 다른 결론의 판결을 내린 것이다.

그리고 이 문제는 아직도 정리되지 못한 채 이어지고 있으며, 사실상 캐디들이 노동법상 근로자의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노조법상의 근로자 개념을 근로기준법상의 근로자개념과 명시적으로 구분하여 판단한 대법원 판결은 서울여성노조 사건에 대한 대법원 판결{2004. 2. 27. 선고 2001두8568 판결, 대법관 윤재식(재판장) 변재승·강신욱·고현철(주심)}이다. 이 판결은 '구직 중인 자, 즉 실업자'의 경우 근로기준법상의 근로자에는 해당하지 않지만 노동조합을 설립할 수 있는 노조법상의 근로자에는 해당한다고 명시적으로 판단했다. 위 사건은 당시 같은 사무실에 근무하던 김진 변호사가 수행했는데, 나는 김진 변호사와 같이 근무하고 있고 소송위임장에 공동대리인으로 들어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서울여성노조로부터 감사패를 받았다. 훌륭한 후배를 만나면 복을 받는다는 말이 꼭 맞다.

최근에 학습지 교사에 대해 서울행정법원에서 노조법상의 근로자에는 해당하지만 근로기준법상의 근로자에는 해당하지 않는다는 판결이 선고되었다(서울행정법원 2012. 11. 1. 선고 2011구합20239 판결: 재판장 판사 박태준, 판사 안승훈, 판사 곽상호). 이제야 1993년 5월 15일 판결의 수준으로 되돌아왔다고나 할까. 법 개정을 통해 특수고용노동자들의 무권리 상태를 해결하기 위해 입법 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2007년 10월 16일에 '특수형태근로종사자 보호방안'에 대한 의견을 표명하여 국회의장과 노동부장관에게 특수형태근로종사자 보호 법률의 조속한 제·개정 등을 권고했다. 입법이 되기 전이라도 대법원이 캐디 등의 노동 기본권과 생존권 등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견해를 정리해주면 해소될 수 있는 문제이다. 언제나 대법원이 이런 문제에 대해서 전향적인 태도를 취할 날이 올까? 과연 생전에 기대할 수 있을까?

▲ 서울여성노조에서 전한 감사패. ⓒ김선수 변호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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