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노련은 우리나라 산별노조의 '역사'와 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97년 노동관계법 개정으로 기업별 노조의 산별노조 전환이 법적으로 가능해지기 전에도 병원노련은 사실상 산별노조 형태를 띠고 태어났다. 물론 전국의 병원노조 연합체인 병원노련이 1988년 탄생해 1992년 합법성을 쟁취하기까지는 우여곡절도 많았다. 노동부가 상고를 하는 바람에 1993년 상고 기각을 얻어낼 때까지 병원노련은 4년 3개월간 '합법 노조'를 위해 싸워야 했다.
이제 막 탄생한 '87년 헌법' 체제 하에서 병원노련에 합법성을 부여하는 법원 판결을 이끌어낸 김선수 변호사는 그 현장 한가운데 있었다. <편집자>
김선수, 노동을 변호하다 ① 전태일을 생각하며 변호사를 꿈꾸다 ② 노동 변호사를 야유한 노동자들, 그 실체는… ③ 회사는 왜 캐디를 '사장님'으로 만들어줬나 |
1987년 7~8월 노동자대투쟁을 통해 이 땅 노동자들은 권리에 눈을 뜨기 시작했고, 권리를 되찾고자 떨쳐 일어섰다. 노동자들은 개별적으로 있을 때는 자본가에 비하여 약자의 지위에 있을 수밖에 없으므로 자본가와 대등한 지위에서 교섭력을 확보하려면 자주적으로 단결하여 노동조합을 결성하는 길밖에 없다. 자본주의 유지를 위해서도 노동자들의 단결을 인정해야 할 필요가 있으며, 그래서 헌법도 노동자들의 노동3권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군사 독재 정권의 강압적인 탄압과 성장 우선 정책의 결과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인식하지 못했고 더군다나 이를 주장하는 것은 더욱 힘든 일이었다. 노동3권은 헌법 속에서 잠자고 있었다. 1987년 7-8월 대투쟁을 통해서 노동자들이 떨쳐 일어서 노동조합이 우후죽순처럼 설립되고, 기존에 있던 노동조합에서도 민주화 열풍이 불었다. 잃어버린 권익을 되찾기 위한 노동자들의 광범한 투쟁이 전개된 것이다.
▲ 병원노련은 1989년 설립 신고를 한 후 4년 간의 투쟁 끝에 합법성을 쟁취했다. ⓒ보건의료노조 |
1980년 국가보위입법회의에서 전면 개정된 노동조합법은 노동자들의 단결의 자유를 최대한 억제했다. 노동조합 조직 형태를 기업별 노동조합으로 강제하고, 하나의 사업장에서는 물론이고 연합 단체의 경우에도 복수노조의 설립을 금지했다. 단결권의 중요한 내용 중 하나는 노동자 스스로 조직의 형태를 결정하고 어느 조직에 가입할 것인가를 결정할 수 있는 조직 선택의 자유다. 그런데 기업별 노동조합의 강제와 복수노조 금지는 조직 선택의 자유를 부정하여 단결권을 본질적으로 침해한다. 이렇게 해서 5공화국 하에서는 노동자들의 단결권이 거의 유명무실하게 명맥만을 유지했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을 거쳐 자각한 노동자들은 우선 노동조합 결성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기존 한국노총 중심의 체제를 벗어나 민주적인 연합 단체를 결성하여 노동자들의 권익을 진정하게 대변할 수 있도록 하는 방향으로 투쟁을 전개했다. 민주적인 노동조합들은 한국노총의 통제로부터 벗어나 독자적인 연합 단체를 구성하여 활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민주적인 노동조합들은 한편으로는 지역별로 연합하여 지역별 협의회나 지역별 연맹 등 지역별 연합 단체를 설립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동종 업종끼리 모여 업종별 연합 단체를 설립했다. 그리고 이러한 지역별, 업종별 연합 단체가 모여 전국적 연합 단체를 구성했다. 이것이 나중에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에 이어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의 조직으로 연결되었다.
노동조합법상의 노동조합으로서 완전한 법률적 보호를 받기 위해서는 행정관청에 설립 신고를 하고 신고증을 교부받아야 한다. 단결권을 헌법상 기본권으로 보장한 결과 노동조합에 대해서는 자유설립주의 원칙이 관철되어야 한다. 행정관청이나 사용자의 개입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노동조합을 설립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조합의 설립에 행정관청의 허가를 받도록 하는 허가주의는 단결권의 본질적 내용을 침해하여 위헌이다. 노동조합법이 행정관청에 설립 신고를 하도록 한 취지는 노동조합의 설립 요건을 심사하거나 규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행정 서비스를 제공하거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당시는 물론이고 현재까지도 노동조합으로부터 설립 신고를 받은 행정관청이 이런저런 사유를 붙여 설립신고증을 교부하지 않는 사례가 많이 발생했다. 자유설립주의는 사라지고 사실상 허가주의로 운영되고 있는 실정이다.
민주적인 노동조합의 연합 단체들이 막 설립되기 시작했던 그 당시 많은 연합 단체들이 설립신고증을 교부받지 못한 채 활동했다. 특히 문제가 된 것은 노동조합법상의 복수노조 금지 조항으로 말미암아 기존의 연합 단체 이외의 새로운 연합 단체가 설립될 여지가 거의 봉쇄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병원노련의 설립과 설립신고서 반려 처분
병원은 공익을 위한 사업장이라는 인식, 그리고 환자를 치료하는 병원에서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파업을 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는 막연한 인식 때문에 독재 정권 시절에는 병원에 노동조합이 거의 설립되지 못했다. 그러던 것이 1987년 노동자대투쟁을 거치면서 전국의 많은 병원에서 노동조합이 설립되었다.
이미 설립되어 있던 몇몇 병원노동조합들은 기존에 설립되어 있는 연합 단체 중에서 한국노총 산하 연맹 중 하나인 전국연합노동조합연맹('연합노련')에 가입되어 있었다. 연합노련은 상관성이 전혀 없는 55개 업종의 단위노동조합들의 연합 단체였다. 그렇기 때문에 연합노련에 가입한 각 업종의 노동조합들은 그 업종 고유의 특수성을 살려 노동조합 활동을 전개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신설된 민주적인 성향의 병원노동조합들은 병원 업종의 노동조합들만으로 새로운 연합 단체룰 구성하기로 하고, 먼저 전국병원노동조합협의회라는 형식으로 임의적인 연합 단체를 구성하여 1년 정도 활동했다. 그리고 1988년 12월 17일 전국병원노동조합연맹('병원노련')을 구성하고 1989년 1월 5일 노동부에 설립신고서를 제출했다.
이에 대해 노동부는 병원노련의 조직 대상이 연합노련의 규약에 이미 규정되어 있는 연합노련 조직 대상과 중복되므로 복수노조 설립을 금지하고 있는 노동조합법에 위배된다며 1989년 1월 7일자로 설립신고서를 반려하는 처분을 했다. 당시 상황에서 노동부의 설립신고서 반려는 충분히 예상한 바였다. 이에 대해 병원노련은 법률적인 싸움을 통해 합법성을 쟁취하기로 결정하고 소송을 제기하게 되었다.
행정소송의 제기와 위헌제청신청의 제기
1989년 1월경 나는 고 조영래 변호사님 사무실에서 막 노동 사건들을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하고 있었다. 병원노련의 설립과 소송 제기는 우리 사무실에서 오랫동안 노동 상담을 하던 박석운 선배가 관여해왔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우리 사무실에서 사건을 맡게 되었고, 결국 내가 담당하게 되었다. 사건을 수임하고 1989년 2월 14일자로 설립신고서 반려 처분의 취소를 요구하는 행정심판을 제기함과 동시에 같은 취지의 행정소송을 서울고등법원에 제기했다.
소송 진행 과정에서 소송 전략과 관련해 나는 복수노조를 금지한 노동조합법 조항의 위헌성을 정면으로 다투어 위헌제청신청을 할 것인가, 아니면 현행법 해석상으로도 병원노련의 합법성은 인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복수노조 금지 조항의 위헌성을 다투는 것이 정도(正道)이기는 하지만 그 조항의 위헌성이 인정되지 못하면 패소할 가능성이 그만큼 높아지게 된다. 복수노조 금지 조항의 위헌성 자체를 다투지 않더라도 그 해석 여하에 따라 병원노련의 합법성을 인정하는 해석이 가능할 수도 있을 것으로 보였는데 이를 집중적으로 주장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즉, 법에서 복수노조를 금지하는 것은 이미 노동조합이 존재함에도 그와 조직 대상이 중복되는 노동조합을 설립하는 경우인데, 조직 대상의 중복성 여부를 기존 노동조합의 규약을 기준으로 판단해서는 안 되고 실제 가입 노동조합들이 중복되는지 여부를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주장할 여지가 있었고, 또 노동조합법에 의하면 산업별 연합 단체는 '동종 산업의 단위노동조합'을 구성원으로 하도록 규정되어 있는데 연합노련은 구성원이 동종 산업의 단위노동조합이 아니므로 노동조합법상 산업별 연합단체라고 할 수 없다고 주장할 여지가 있었던 것이다.
법원이나 헌법재판소 입장에서 복수노조 금지 조항의 위헌성을 인정하기에는 몹시 부담스러울 수 있다. 정공법이기는 하나 그만큼 위험성이 높다. 반면에 복수노조 금지 조항의 위헌성 여부를 언급하지 않고 현행법의 해석 문제로 할 경우 법원이 받아들이기도 위험 부담이 적고 따라서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처음에는 복수노조 금지 조항에 대한 위헌제청신청을 하지 않고 해석 문제로 풀어가 보려고 했다.
그러나 재판을 진행하는 도중에 위헌제청신청을 한다고 해서 법조항의 해석 문제를 주장할 수 없는 것도 아니어서 위헌제청신청도 하기로 하여 1989년 6월 13일 위헌제청신청서를 접수했다. 그 2일 후인 6월 15일 변론기일이 있었는데, 재판부에서는 위헌제청신청에 대해 먼저 판단을 해보겠다면서 다음 기일을 잡지 않고 추후에 지정하는 것으로 했다.
언론노련 사건에 대한 고등법원 판결 선고
다음 기일이 추후 지정으로 된 후 복수노조 금지 조항의 위헌성 여부에 대한 법원 결정을 조마조마한 가슴으로 기다렸다. 그런데 추후 지정된 변론기일이 몇 달이 가도, 심지어는 1년이 가고 2년이 가도 잡히지 않았다. 그 사이 병원노련은 병원단위노동조합의 상급 단체로서 활동을 실질적으로 수행했다. 나는 법원의 결론을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나서서 변론기일 지정신청서를 제출하고 법원의 조속한 결정을 촉구하지도 않았다. 병원노련이 불완전한 상태이기는 하나 실질적으로 산업별 연합 단체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괜히 법원의 조속한 결정을 재촉했다가 엉뚱한 결론이 나오게 되면 그나마 그동안 해오던 활동마저 봉쇄될 가능성도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고 있던 중인 1991년 5월 30일,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언론노련')의 노동조합 설립신고서 반려 처분 취소 사건에 대한 고등법원 판결이 선고되었다. 언론노련의 사안은 병원노련과는 다르다. 언론노련의 경우에는 조직 대상의 중복 여부가 문제된 것이 아니라 설립 신고를 하면서 설립신고서와 규약에 노동조합법상의 기재 사항인 '소속된 상급단체의 명칭'을 기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설립신고서가 반려되었던 것이다.
당시는 민주노총이 설립되기 전이어서 총연합단체는 한국노총밖에 없었다. 산업별 연합단체의 경우 소속된 상급 단체로 될 수 있는 것은 한국노총밖에 없었으므로 한국노총에 가입하지 않으면 이를 기재할 수 없게 된다. 언론노련은 한국노총 체제에 반대하여 한국노총에 가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소속된 상급 단체를 기재하지 않고 설립신고서를 제출했던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해 언론노련에서 소송을 제기하기 전 조영래 변호사님에게 법률적 견해에 대한 질의해온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조영래 변호사님의 지시를 받고 그 사안을 검토한 뒤 설립신고서나 규약에 소속된 연합 단체 명칭을 기재하도록 한 것은 반드시 상급 단체에 소속될 것을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소속된 연합 단체가 있는 경우 기재하라는 임의적인 규정이므로 소속된 연합 단체 명칭을 기재하지 않았다고 설립신고서를 반려하는 것은 위법이라는 의견서를 작성하여 언론노련에 전달한 바 있다. 언론노련의 행정소송 재판은 조용환 변호사가 수행하였는데, 고등법원으로부터 승소 판결을 받았다.
언론노련 승소 판결이 선고된 이후 나는 병원노련 사건의 재판을 빨리 진행시키면 분위기상 좋을 결론이 나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언론노련 사건과 병원노련 사건은 사안과 쟁점이 달라서 망설이고 있었다. 복수노조 금지 조항의 위헌성을 인정한다는 것이 법원으로서는 엄청난 부담일 것이기에 결론을 장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우연히 조용환 변호사를 만나 병원노련 사건 때문에 고민하고 있는 사정을 말하자 조용환 변호사는 단호하게 법원이 패소 판결을 쓰지는 못할 것이니까 곧바로 변론기일 지정 신청을 해서 재판을 진행하라고 했다.
한동안 더 고민하고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 기일이 추후 지정되고 재판이 중단된 지 2년 이상이 지난 1991년 7월 2일, 변론기일 지정신청서를 법원에 접수하였다. 그 사이에 재판부는 여러 차례 바뀌었다.
▲ '병원노련 설립 정당' 판결을 알리는 <한겨레> 기사 ⓒ한겨레신문 기사 캡처 |
추정되었다가 다시 진행된 절차
법원은 변론기일을 1991년 7월 25일로 잡았고, 이후 재판이 다시 진행되었다. 재판부는 복수노조 금지 조항의 위헌성 여부에 대한 판단은 재판 절차를 진행하면서 판단하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병원노련과 연합노련의 조직 현황, 대상의 중복 여부, 규약 규정 등을 정리하여 주장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대한 우리 측과 노동부 측의 주장이 있은 후에 변론을 종결하고 1991년 11월 7일을 선고기일로 잡았다.
선고 결과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기다렸으나 변론을 재개하여 재판이 더 진행되었다. 당사자들은 변론 종결 후 재개될 때 무엇 때문인지, 결과에 어떤 영향이 있을지 노심초사하게 된다. 재판부는 양쪽에 우리나라 전국의 병원노동조합 중에서 연합노련에 소속된 단위노동조합과 병원노련에 소속된 단위노동조합 현황을 정리하여 줄 것을 요구했다. 그래서 조사해본 결과 전국 병원노동조합 중에서 병원노련에 소속된 노동조합이 110개(조합원 2만4260명)인데 반해, 연합노련에 소속된 노동조합은 14개(조합원 6426명)에 불과했다.
재판부는 그 이후에도 매 기일마다 원고 측과 피고 측에게 많은 사항의 석명을 요구했다. 피고 측에게는 연합노련에 가입한 병원노동조합의 현황, 병원노련과 중복되는 노조가 있는지 여부, 연합노련이 노동조합법상 어떤 지위에 있는지 여부, 화학노련·금속노련·섬유노련·고무노련 등에는 신고증을 교부한 이유와 이들 연맹이 병원노련과 다른 점, 설립신고서 수리 시 조직 대상 중복 여부를 기존 노조 규약만을 기준으로 하는지 여부 등에 대하여 석명을 요구했고, 원고 측에 대하여는 병원노련과 연합노련의 소속 노동조합으로 주장되는 단위노동조합에 차이가 있는 부분에 대한 소명 자료의 제출과 연합노련의 노동조합법상의 지위에 어떤 문제점이 없는지 여부에 대한 검토를 요구했다.
재판부의 위와 같은 적극적인 재판 진행에 나는 상당히 고무되었다. 특히 연합노련의 노동조합법상의 지위를 검토하라는 재판부의 요구에서 나는 재판부가 어떤 방향으로 판결을 쓰려는 것인지 예측할 수 있었다. 재판부가 부담스러운 복수노조 금지 조항의 위헌성에 대해 합헌 결정을 하면서도 원고의 청구를 인용할 수 있는 길을 찾은 것으로 보였다. 재판부가 우회로를 발견했음을 예감했다.
연합노련의 노동조합법상의 지위라는 문제는 다음과 같다. 당시 노동조합법 제13조 제2항에 의하면 산업별 연합단체는 "동종 산업의 단위노동조합을 구성원으로" 하도록 규정하고 있는데, 연합노련은 기존의 어떤 특정한 산업별 노조에 속하지 않은 55개 이상의 서로 다른 업종에 속하는 단위노동조합을 그 구성원으로 하고 있어서 현행 노동조합법상 산업별 연합단체인 노동조합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연합노련이 현행 노동조합법상의 산업별 연합단체에 해당되지 않는다면 연합노련의 규약상 조직대상 업종에 대한 규정은 규범력이 없고 따라서 특정 업종만을 조직대상으로 하여 산업별 연합 단체를 설립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아무래도 재판부가 이러한 논리로 피해가려는 것이 아닌가 짐작되었다.
이와 같은 재판부의 결론에 대한 감을 얻은 후에도 재판은 상당히 긴 시간 동안 더 진행되었다. 우리 측에서 증인을 신청하여 병원노련의 설립 경위와 소속 노동조합 현황, 그동안의 병원노련의 활동 상황 그리고 국제적으로 병원노련이 이미 산업별 연합 단체로서 인정받고 활동하고 있는 상황 등에 관해 증언했다.
지나치게 장기간 동안 계속 되는 소송 과정 중에 당시 양건모 병원노련 위원장이 소속 단위노동조합인 서울대학교병원 노동조합의 쟁의 현장에 가서 격려사를 하고 활동을 한 것을 문제 삼아 검찰이 제3자 개입 혐의로 1992년 5월 28일 사전구속영장을 발부받는 사태가 벌어졌다. 당시 법률상으로는 노동조합이 소속된 연합 단체인 상급 단체는 제3자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규정되어 있었는데, 병원노련이 아직 설립신고증을 교부받지 못했다고 하여 제3자 개입 혐의로 사전구속영장이 발부된 것이다. 불가피하게 양건모 위원장은 수배 상태에서 활동하게 됐다.
법원의 판결과 합법화
소송을 제기하고 3년 6개월이 넘게 지난 1992년 7월 16일이 되어서야 고등법원 판결이 선고되었다(서울고등법원, 1992. 7. 16. 선고 89구1232 판결: 재판장 판사 조용완, 윤승진, 김영태). 선고 결과와 내용은 예측한 대로 복수노조 금지 조항에 대한 위헌제청신청은 기각, 설립신고서 반려 처분 역시 취소다. 하여간 우리의 승소 판결이다.
이 선고의 결과로 양건모 위원장에 대한 사전구속영장 발부가 우습게 되었다. 검찰이 구속영장의 유효 기간이 도과한 후 다시 구속영장을 발부받지 않아서 실질적으로 수배 상태가 해제됐다. '구속영장에는 도망가는 것이 상책'이라는 '삼십육계(三十六計)'의 진리가 확인되었다. 구속영장이 발부되었을 때 그대로 영장이 집행되었다면 헛징역을 산 꼴이 되었을 것이다. 직후에 병원노련은 고등법원의 승소 판결과 위원장의 수배 해제 잔치를 벌였다. 나도 초청을 받고 그 자리에 참석했다.
고등법원 판결에 대해 노동부 측이 상고했으며 대법원은 10개월 이상 사건을 갖고 있다가 1993년 5월 25일 상고기각 판결을 선고했다{대법관 최재호(재판장), 배만운, 김석수(주심), 최종영}. 이로써 병원노련은 완전히 합법적인 연맹이 되었다. 당시에는 행정소송이 2심이었는데도 1989년 2월 소송을 제기하고 4년 3개월이 넘는 장기간이 걸렸다.
병원노련의 승소로 말미암아 그동안 연합노련 때문에 합법적인 연맹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임의적인 상급 단체로서 활동하고 있던 전국전문기술노동조합연맹(약칭 '전문노련'), 전국건설노동조합연맹(약칭 '건설노련') 등이 일거에 합법화되었다. 그래서 우스갯소리로 전문노련이나 건설노련은 병원노련에 로열티를 지급해야 한다는 말이 돌았다. 사건을 담당한 변호사에게는 무엇을? 고맙게도 병원노련이 1993년 7월 9일 정기대의원대회에서 내게 공로패를 주었다. 변호사로서 활동한 것에 대하여 보람을 느낀 흐뭇한 순간으로 기억된다.
▲ 병원노련이 김선수 변호사에게 준 공로패 ⓒ김선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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