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전태일을 생각하며 변호사를 꿈꾸다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전태일을 생각하며 변호사를 꿈꾸다

[김선수, 노동을 변호하다] <1> 노동 변호사의 길에 들어서다

한국 사회에서 '노동'은 여전히 불온하다. 5월 1일을 '근로자의 날'이라 하고 최소한의 노동 조건을 보장하는 법을 '근로기준법'이라 부르는 것처럼 아직도 노동, 노동자라는 말은 법률적 지위를 획득하지 못했다.

<프레시안>은 2013년 5.1 노동절을 맞아 한국의 대표적인 노동 변호사로 꼽히는 김선수 변호사의 '김선수, 노동을 변호하다'를 연재한다. 지난 20여 년간의 변론기를 통해 그동안 한국의 노동 현실이 어떻게 변해왔으며 거기에 어떤 쟁점들이 있었는지, 그리고 노동을 대하는 사법부의 자세에는 어떤 문제점이 있었으며 우리의 숙제는 무엇인지 짚어보는 자리가 될 것이다. <편집자>


내가 변호사의 길을 선택했을 때 염두에 두었던 것은 우리 사회에서 억눌리고 소외되고 가난한 계층의 입장을 대변해주고 그들의 권리 쟁취를 위해 온몸을 바쳐 정열적으로 활동하는 변호사상(辯護士像)이었다. 나 자신이 어렵게 자랐고, 가장 억압받고 소외된 노동자 계층이야말로 역사의 주인이자 사회 모순을 해결할 주체라고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내가 사법시험 공부를 시작할 당시(1983년 11월)만 하더라도 사법시험을 준비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변혁을 위한 활동에서 이탈하여 개인적인 출세와 영달의 길로 가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사법시험을 준비하면서도 죄의식과 자책감을 안고 있었다. 학생운동이나 노동운동 또는 변혁운동의 장에서 활동하고 있는 동료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과 죄의식을 남몰래 숨기고 공부했다. 당시 가장 열심히 그리고 헌신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노동 현장에 들어가 노동운동을 하였다. 노동자 계층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변혁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계층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왜 변호사가 되려 했는가

사법시험 공부를 하는 중에도, 노동 현장에서 활동하는 동료들은 우리 사회와 역사를 위해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데 나는 개인의 출세와 영달을 위해 이러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회의가 들었다.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법조인이 된다는 것은 기득권을 누리는 집단으로 신분이 상승한다는 의미가 아닌가? 그렇게 되면 누리는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보수화되지 않을까? 애초 공부를 시작할 때 다짐했던 생각들은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결국 내 인생은 타락하고 마는 것이 아닐까?

그런 회의가 들 때마다 한편으로 든 생각은 내가 기득권이나 누리면서 그 유지를 위해 굴욕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은 기질(氣質)상 원천적으로 불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또 기득권을 획득하는 것도 나의 능력상 불가능할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나라는 존재는 애초부터 아부나 다른 사람의 비위를 맞추는 일을 천성적으로 못하는데, 그런 사람이 세속적인 의미의 출세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을까? 사법시험에 합격한다고 해서 당연히 기득권을 누리는 계층으로 신분 상승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그 후에도 여러 가지 노력을 해야 하고 그중에서도 적은 수의 사람만이 성공하게 될 것이다. 내가 사법시험에 합격한 사람들 중에서 세속적인 의미에서 성공한 사람들에 속하기는 불가능하지 않을까? 기득권을 획득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에 그 당연한 결과로서 기득권이나 지키려고 아등바등하는 형태로 타락할 위험성은 없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시험공부에 몰두했다.

<논어>의 다음 구절이 당시 나의 심정을 정확하게 표현해주었다. "부(富)가 구한다고 얻어지는 것이라면 채찍 잡는 하인 노릇이라도 나는 사양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구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닐진댄 내 마음에 드는 길을 따를 것이다."(富而可求也 雖執鞭之士 吾亦爲之 如不可求 從吾所好, 『論語』, 述而)

▲ 김선수 변호사(오른쪽).

전태일의 노동법을 공부하다

인간 사회는 노동의 산물을 향유한다는 점에서 동물의 세계와 다르고, 그러한 의미에서 노동자 계층은 인류 역사의 주체이자 사회의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노동자 계층은 우리 사회의 인구 구성에서도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한다. 또한 우리 사회가 누리는 모든 부와 재화는 노동의 산물이다. 그렇기에 우리 사회에서 노동자들은 그들의 노동에 상응한 대우를 받을 권리와 자격이 있다.

그렇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우리나라는 그동안 경제 성장의 논리를 앞세워 노동자들의 인권과 복지를 무시해 왔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항의가 근로기준법 준수를 요구하며 분신한 전태일 열사다. 노동법을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주고 노동법 준수를 위해 연대해서 싸워줄 대학생 친구를 절실히 갈망했던 전태일.

역사는 노동하는 사람들이 그 노동에 상응한 대우를 받을 수 있는 방향으로 발전되어야 한다. 그러한 사회는 누가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이 만들어야 한다. 양심적 지식인은 노동자들이 그러한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하는 활동을 하여야 한다. 지식인은 자신의 전문 지식을 노동자들을 위해 써야 하며, 법조인은 전문적인 법률 지식으로 노동자들의 활동을 지원해야 한다.

나는 이러한 생각으로 노동법을 공부하게 되었다. 노동법은 시민법에 대한 수정으로 출현하였다. 시민법은 모든 인간의 추상적이고 형식적인 평등을 전제로 하여 계약의 자유와 사적 자치를 기본 원칙으로 하지만, 실제 사회에서는 모든 인간이 결코 평등하지 못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는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한 노동자에 비하여 사회적인 힘이나 영향력이 엄청나게 강하다.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관계를 전적으로 사적 자치 원칙에 맡길 경우 부익부 빈익빈의 심화로 귀결된다. 산업자본주의 후기에 이르러서는 노동자들의 재생산 자체가 어려울 정도로 노동자들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게 되었다. 노동자 계층이 재생산되지 않는다면 자본주의 자체도 존속할 수 없는 모순에 봉착하게 된다. 그 결과 자본주의를 유지하기 위하여 국가는 노동자의 재생산이 가능하도록 노동력을 보호하는 정책을 실시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이를 위한 제도적 장치로서 노동법이 성립하게 된 것이다.

보편적인 사적 자치를 통해서 조화로운 이상 사회를 건설하려는 시민법에 기초한 근대 사법은 현실에서 강자에게는 명령의 자유, 약자에게는 복종의 자유로 양극화됨으로써 '법적 몽상'임이 증명되었다. 시민법의 사적 자치 이념은 '일하는 자(근로자)'의 인격이 '일 시키는 자(사용자)'의 인격에 종속되는 것을 시인함으로써 스스로 모순에 빠졌다. 노동법은 시민법을 위와 같은 모순으로부터 구했다. 노동법은 개별적 차원의 형식적 사적 자치를 집단적 차원의 실질적 사적 자치로 전환시키는 것을 가능하게 하여 자기 함정에 빠진 시민법을 구원함으로써 시민법을 단순히 수정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하는 역할을 한 것이다.

▲ 1986년 당시 조영래 변호사와 권인숙 교수. ⓒ연합뉴스

노동법연구회와 민변

노동법은 자본가나 국가의 시혜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피를 수반한 투쟁의 결과 쟁취된 것이다. 서구자본주의 국가에서 1일 8시간 노동제를 쟁취하기 위하여, 해고 제한을 통한 고용 보장을 위하여 노동자들은 엄청난 투쟁을 하였다. 이렇게 성립한 노동법은 이중적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다. 한편으로는 노동자를 보호하는 성격을 갖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주의를 유지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노동법에 대한 태도 역시 이중적인데, 한편으로는 노동법이 노동자들의 권리 확보를 위해 필요한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입장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법이 노동자들의 의식을 자본주의에 매몰시키는 한계를 갖는다는 입장이다.

변혁은 하루아침에 오는 것이 아니고 현실적으로 노동자들은 노동 현장에서 살아가고 있으므로 현재 상태에서 이용할 수 있는 법적 제도를 충분히 이용할 필요가 있다. 법률 전문가는 노동법을 전문적으로 연구하여 노동자들의 권익 증진에 활용하도록 모든 조력을 다 하여야 한다. 이런 생각으로 사법연수원생 시절부터 김유성 교수님과 이흥재 교수님을 모시고 진행되고 있던 노동법 공부 팀에 합류하였다. 이 공부 팀은 1988년 5월에 '서울대학교노동법연구회'로 이어졌고, 나는 연구회의 창립 멤버로 참여하였다.

1988년 2월 사법연수원을 수료하면서 변호사 활동을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 고민의 과정을 거쳐 고(故) 조영래(趙英來) 변호사님이 운영하던 남대문합동법률사무소에 합류했다. 당시 박석운 선배(현 민중연대 공동대표)가 시민공익상담소를 운영하면서 노동조합들에 대한 지원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사무실 차원에서도 젊은 변호사에 대한 수요가 있었다. 나는 1988년 5월에 출범한 '민주 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약칭 민변)'에도 창립 멤버로 참여하였으며, 여러 특별위원회 중에서 노동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노동 변호사로서 나의 활동은 민변과 서울대노동법연구회를 두 축으로 하여 이루어졌다.

신념을 지켜주는 변호인이 가장 훌륭한 변호인

민변 설립 직후인 1988년 7월 14일 홍성우 변호사님께서 후배 변호사들을 위해 시국형사변론의 의의와 방법 및 자세 등에 대해 강연을 해주었다. 이 강연은 이후 내가 시국사건과 노동사건 변호 활동을 하는데 중요한 지침이 되었다.

시국사건에서 변호인의 역할은 첫째, 법정에 서는 사람을 법적으로 조력하는 것이다. 변호인의 본질적 역할이다. 사람은 감옥에 가면 약해지고 자주 가면 갈수록 약해진다. 누구라도 감옥에 가거나 법정에 서면 조력이 필요하다. 시국사범이 있으니까 변호를 한다.

둘째, 사상과 신념을 보호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시국사범이 감옥에서 좌절할 경우 인격적 파탄이 초래될 수 있다. 신념을 지켜주는 변호인이 가장 훌륭한 변호인이다.

셋째, 시국사범 재판은 민주화운동의 일환으로서 법정투쟁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시국사범의 법정투쟁을 통하여 민주화운동이 확산되고 역사로 기록된다. 시국사범의 법정투쟁 기록은 가장 중요한 역사적 자료이다. 변호인은 법정투쟁을 도와주고, 정리하고 또 계도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넷째, 법원의 입장에서도 변호인은 필요하다. 시국사범들의 거친 주장이나 태도가 변호인을 매개로 하여 순화될 수 있기 때문에 법원으로서도 변호인이 필요하다.

시국사범을 변론하는 변호사는 법정에서 항상 검사 및 판사와 대등한 지위와 자세를 견지하고 당당한 태도를 지녀야 한다. 변호사가 검사에게 맞서지 못하는 모습을 보일 경우 피고인에게 끼치는 영향은 지대하다. 예의는 지켜야겠지만 당당한 태도를 유지하여야 한다.

시국사범 재판에서는 형사소송 절차의 엄격한 준수를 요구해야 한다. 이는 법률 문화의 향상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법정에서는 반드시 피고인의 수갑을 풀고 재판을 진행할 것을 요구하고, 검사의 기소요지 낭독과 피고인의 모두진술을 요구하고, 전차 기일의 공판조서 요지의 고지를 요구하여야 한다. 변론의 수위와 이념 문제에 대해서는 신중하게 판단하여야 한다. 피고인의 주장이나 사상이 변호인의 주장이나 사상과 다른 경우 피고인의 주장을 인용하는 방법 등 기술적으로 처리한다. 변호인으로서는 가능한 한 피고인의 입장을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는 자세로 임해야 한다. 그러한 과정에서 변호사의 의식도 발전하는 것이다. 즉흥적인 변론이나 감정적인 격앙은 피해야 한다. 책임질 수 있는 변론을 위해 변론 내용을 미리 서면으로 작성하는 것이 안전하다.

구속된 사람을 접견하는 것은 당사자에게 만족감을 주는 척도가 되고, 신뢰관계 형성의 기초가 된다. 공판기일 전에는 꼭 접견을 하는 것이 좋다. 당사자의 가족과 관계에서도 원칙을 세울 것이 필요하고, 사석에서 만나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 온정주의적인 자세는 삼가야 한다. 일부 정치 변호사들이 가족들에게 아부하고 온정주의적인 자세를 취하며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아부하는 자세나 온정주의적 자세로 임하는 경우 그 관계는 오래가지 못한다. 반대신문이나 증거 조사, 변론 준비에 있어서 성실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 반대신문 같은 것은 미리 작성하여 예행연습을 해보는 것도 좋다. 뜨거운 가슴과 정열로 변론 준비를 하여야 한다. 사회과학적인 전문 지식을 활용해야 할 때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할 필요도 있다.

시국사범 사건에 있어서 변호사 보수 문제는 어려운 문제이나, 원칙적으로 실비와 보수를 받아야 한다. 정치 변호사들이 무료 변론을 하기도 하나 적정한 보수를 받는 것이 당사자와 대등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약력>
김선수 변호사는 1985년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1988년 고 조영래 변호사의 '남대문합동법률사무소'에서 변호사를 시작했다. 이후 ILO공대위 전국노동자대회 사건, 한국노동연구원 파업, 콜트악기 정리해고 등 주요 노동 사건의 변론을 맡아왔으며 한국의 대표적인 노동 전문 변호사로 꼽힌다. '민주 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창립 멤버로 2011년 모임 회장을 역임하였으며 노무현 정부 때는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 기획추진단장을 맡기도 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