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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만은 부패하지 않았다? 기이한 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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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박정희만은 부패하지 않았다? 기이한 환상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90> 유신의 몰락, 스물한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세 번째 이야기 주제는 유신의 몰락이다.

프레시안 : 유신 체제가 단명할 수밖에 없었던 요인을 앞에서 몇 가지 살폈다. 더 짚어볼 점으로 어떤 것들이 있나.

서중석 : 유신 정권은 왜 다른 나라 독재 정권과 달리 7년밖에 못 갔는가. 그렇게 만든 요인 중 하나로 살펴봐야 할 것이 더 있다. 백번 양보해서 독재를 하면 뭔가 좋은 점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예컨대 부정부패를 근절했다거나 복지 정책이나 서민을 위한 정책을 과감하게 폈다든가 하는 게 있어야 한다.

우선 부정부패 문제를 살펴보자. 사실 이상하게도 박정희에 대한 인상 중 하나로 '박정희는 청렴했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 많다. 특히 유신 시대에 초·중·고등학교를 다녔거나 TV를 열심히 본 사람은 박정희가 근엄하고 거룩하게까지 보여서 그런지 박정희는 정말 부정부패하고는 관련이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많이 갖고 있다.

박정희만은 부패하지 않았다? 부정부패 악취 진동한 집권 18년

프레시안 :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허상 아닌가.

서중석 : 1961년 5·16쿠데타를 일으킨 때부터 1979년 유신 체제가 망할 때까지 박정희 정권의 부정부패는 끊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박정희 자신이 이걸 근절할 생각을 갖고 있지도 않았다. 더 나아가서 이 시기에 박정희가 한 행동을 보면 박정희는 '이건 나쁜 것이 아니다', 이렇게까지 여긴 것으로 보인다. '이건 나쁘긴 하지만 필요한 것 아니냐', 이런 식으로 필요악이라고 생각하는 수준을 아마도 넘어섰다고 봐야 할 것 같다.

박정희 집권기에 있었던 선거에서 부정부패는 야당이 여당을 공격하는 가장 중요한 품목이었다. 예컨대 1971년 선거에서도 김대중 후보 쪽에서 부정부패를 추궁했는데, 그게 국민적 인기를 끌었다. 만연한 부정부패를 근절하려면 혁명적이어야 하는 건데, 당시 선거 유세를 보면 박정희는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는 식으로 답변했다.

5·16쿠데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쿠데타 세력이 김지태가 갖고 있던 부산일보사와 MBC를 강탈했다는 이야기가 그간 참 많이 나오지 않았나. 그런 데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박정희 자신과 그 측근들의 부정부패는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박정희 최측근이던 이후락만 해도 검은돈 중에서 자기가 챙긴 걸 떡고물이라고 표현하면서 이건 당연한 것이라는 식의 태도를 취하지 않았나. 그런 인식도 심각한 문제라고 볼 수 있지만, 그 떡고물 규모가 엄청났다는 것도 문제다. 이후락 한 사람이 챙긴 것만 해도 194억 원이 넘을 정도로 떡고물이라는 게 어마어마했다는 것이 1980년 5·17쿠데타 직후 전두환·신군부 정권에서 폭로되지 않았나.

공화당의 유력자들, 그러니까 김종필이나 이후락이나 김성곤이나 박종규 같은 사람들은 막대한 정치 자금, 선거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기업으로부터 돈을 걷는 데에도 거리낌이 없었다. 한국에 직접 투자한 걸프사 같은 미국 회사한테도 기부금을 요구했고, 지하철 리베이트가 얘기해주듯이 일본에서 물품을 사올 때에도 리베이트가 따라붙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심지어 경제 발전을 위해 유용하게 써야 할 차관에서 5퍼센트 정도를 떼어내서 정치 자금으로 썼다는 <신동아> 기사가 크게 논란이 되는 상황까지 나타나지 않았나.

프레시안 : 청와대에서 이런저런 명목으로 돈이 나가는 일도 많던 때 아닌가.

서중석 : 박정희는 격려금 또는 이른바 촌지 봉투, 하사금 같은 걸 무지하게 많이 내렸다. 지방에 내려갈 때에도 지방 관리들한테 촌지 봉투를 돌렸다. 관리한테만 돌린 것도 아니었다. 군이나 야당에도 그런 걸 뿌렸고 사회 저명인사, 직접 면대하는 사람들, 새마을 지도자 등 권력을 유지하는 데 뭔가 도움이 된다고 여겨지는 사람들한테 광범위하게 이런 걸 살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건 일종의 매수 행위 아닌가. 자기 사람을 만드는 데 돈처럼 유용한 건 없다는 판단이 이런 행위를 낳게 한 것 아니겠나. 채명신 회고록을 보면, 심지어 아들 학자금으로 쓰라고 하면서 이런 봉투를 보냈다고 나온다. 채명신이 해외에서 근무할 때인데, 아이 학비에 보태라며 봉투를 보낸 것이다.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느냐 싶은 건데, 그런 일이 공공연하게 벌어졌다.

이런 것들에 대해 공화당 의원이던 이만섭은 유신 이후 장기 집권에 따른 권력 심층부의 타락과 부패가 광범위한 민심 이반을 가져왔다고 얘기했다. 왜냐하면 매수 행위라는 건 한 번만 줄 수는 없고 일단 주면 계속해서 줄 수밖에 없는 면이 있지 않나. 그렇기 때문에도 부패 문제가 계속 더 심각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 고 김지태 씨 유족 송혜영 씨가 눈물을 닦고 있다(2012년 10월 22일 '박근혜 후보 정수장학회 입장 관련 시민사회 및 유족 기자 회견' 중). ⓒ연합뉴스


독재는 했어도 부패는 엄격히 단속한 대만·싱가포르

프레시안 : 다른 독재 국가들은 어땠나.

서중석 : 대만과 싱가포르 사례를 보자. 대만의 경우 대륙에서 쫓겨난 장개석(장제스) 정부는 국민당에서 규율을 잡는 데 초기에 가장 집중적으로 힘을 쏟았다고 한다. 국민당의 기강 해이, 정신적 타락, 부패와 무능이 큰 영향을 끼쳐 대륙에서 밀려났다고 보고 그렇게 한 것이다. 부정부패 퇴치는 국민당이 가장 우선시한 정책 중 하나였다. 부정부패 척결을 위해 심지어 밀수 사건에 관여한 둘째 며느리, 장위국(장웨이궈) 부인인데 그 며느리를 질책해서 자살할 수밖에 없도록 했다는 이야기가 널리 회자될 정도였다. 1965년부터는 부패 공무원에게 최고 사형까지 선고하는 부패방지법을 시행했다.

싱가포르에서는 이광요(리콴유)가 굉장히 장기간에 걸쳐 독재 정치를 했는데, 관료 사회의 부정부패를 방지하기 위해 수상실 직속 기관으로 부패방지위원회를 설치했고 공무원 비리에 어떠한 관용도 베풀지 않았다. 한 번 불명예스럽게 면직된 공직자는 재기의 기회도 얻을 수 없었다. 부패행위조사국에서는 부패를 공공 부문과 민간 부문으로 나누어서 조사했는데, 공공 부문에서는 뇌물 수수, 직권 남용을 집중적으로 조사했다. 민간 부문에서는 외국 기업 유치에서 상거래상의 불법 커미션 수수나 금융 거래상의 불법 행위를 주로 조사했다. 모든 공직자는 재산 신고 외에도 부채로 인한 재정적 궁핍함이 없음을 소명하는 무(無)부채 신고 의무를 지도록 규정했다. 또한 선물을 받으면 소속 기관장한테 신고하도록 했다.

이렇게 부정부패 방지 활동을 엄격하게 전개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광요가 그렇게 비판 세력들을 봉쇄하고 국민한테 호통을 치고 훈계하면서도 장기간에 걸쳐 독재를 할 수 있었던 기반이 생겨난 것 아니냐는 평가가 나온다.

프레시안 : 박정희 정권과는 여러모로 다른 모습이다.

서중석 : 나는 박정희 정권이 사회 경제적 부정부패라도 근절하려고 했어야 할 것 아니냐고 본다. 물론 중화학 공업에서 볼 수 있는 광범위한 정경유착, 이런 것도 사회 경제적 부정부패 아니냐고 얘기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런 건 별개로 치더라도 예컨대 중간 상인의 횡포나 재벌의 부당 이득, 소위 '갑질'로 불리는 행위들, 그런 것들은 정부가 어느 정도 잡아서 서민이나 을에 속하는 사람들이 맘 편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제일 큰 것 중 하나가 농산물 가격 문제였다고 난 본다. 유신 시대에 농산물 시세가 급등한 적이 많았다. 생산량이 갑자기 줄어든 것 같은 점이 작용한 경우도 적지 않긴 했지만, 중요한 건 농산물 가격이 급등하더라도 농민은 하등의 혜택을 못 누리고 도시 서민은 엄청 울어야 하는 일이 많았다는 점이다. 그런 현상이 당시 신문에서 많이 지적됐다. 가락동을 비롯한 농산물 거래 시장에서 중간 상인이 과도하게 마진을 남길 수 있도록 정부가 사실상 방임하다시피 한 것 아니냐는 생각이 그때 많이 들더라. 반대로 농산물 가격이 폭락할 경우 농민은 말 그대로 죽어났다. 그렇다고 해서 도시 주민들이 값싼 농산물을 접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과도한 중간 마진이 거래 상인에게 가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대만은 이와 달랐다. 중간에서 마진을 지나치게 챙기지 못하도록 국가가 철저히 관여해서 그걸 막았다고 한다. 중간 상인들이 과다 이득을 획득할 경우 부정부패에 준해 엄벌에 처했고, 도시민들이 농산물을 현지 가격으로 사 먹을 수 있도록 일종의 공영제 같은 성격으로 농산물 거래를 하게 한 것으로 기억한다.

사실 이런 정책은 독재 정권 아니면 쓸 수가 없다. 그런데 박정희 정권은 유신 체제에서 뭐든지 빨리만 되면 된다고 생각했고 근본적인 정책, 대책을 세우려는 생각을 안 했다. 농산물 거래의 경우에도 이것 때문에 이런저런 상황이 발생하면 귀찮다고 생각했는지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근본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

권력형 특혜와 투기가 판친 병든 사회

프레시안 : 오늘날 농민, 농업, 농촌 문제가 심각한 상태에 이른 건 그 시기에 그러한 방식으로 틀이 짜인 것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전에 살펴본 부동산 투기 문제 역시 박정희 집권기에 짜인 큰 틀과 결코 무관하다고 볼 수 없지 않나.

서중석 : 이 대목에서 부동산 투기 문제를 다시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에 걸친 시기에는 전매를 몇 번만 하면, 또는 분양을 몇 개만 받으면, 혹은 대형 아파트를 몇 채만 소유하면 '떼부자'가 되고 그야말로 일확천금을 할 수 있었다. '저 멀리 엘도라도가 있다', 이런 식의 소문이 아니라 사실 그대로 옆에서 다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었다.

그래서 통계청에서도 그 시기에 이런 글이 나온 걸 볼 수 있다. 뭐냐 하면, 공무원들이 지금 재형저축을 해봤자 사실상 아무 소용이 없다는 얘기였다. 치솟는 물가, 만연한 투기로 재형저축 같은 것이 현실에서 의미가 없어지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1978년 12·12선거에 3대 스캔들이 영향을 끼쳤다고 전에 말하지 않았나. 그중에서 특히 압구정 현대아파트 특혜 분양은 다수의 서민들에게 크게 문제가 될 수 있었다. 동아일보 같은 경우 박정희가 두 번째 체육관 대통령이 된 사실을 보도한 톱기사 바로 옆에 사이드 톱으로 '현대아파트 특혜 260명 소환'이라는 기사를 비중 있게 보도됐다. 그러한 특혜 분양이 얼마나 국민들의 노동 의욕을 꺾고 저축 의욕을 하루아침에 사라지게 했겠나.

프레시안 : 특혜 분양을 받은 사람들은 어떤 이들이었나.

서중석 : 이 특혜 분양을 받은 사람들의 면모를 보자. 언론에 공개된 걸 보면 국회의원이 6명 들어 있었고 언론인이 34명이나 되고 법조인, 예비역 장성도 다수 있었다. 특혜 분양을 받은 공직자가 190여 명이나 됐는데, 힘이 있는 부처 사람들이 많았다. 이런 특별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특혜 분양을 받았기 때문에 더더욱 서민들은 '이럴 수가 있느냐', 이런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1978년 7월 4일 자 <동아일보>에 따르면, 당시 현대는 사원용 명목으로 950여 가구 건설을 허가받았으나 이 중 600여 가구를 비사원용으로 분양했다. 동아일보는 청와대 사정 담당 고위 당국자가 특혜 분양을 받은 공직자 등의 현황을 3일 다음과 같이 밝혔다고 보도했다. 차관 1명, 차관급 1명, 차관보 3명, 전직 장관 5명, 전직 차관 2명, 국회의원 6명(공화당 2명, 유정회 2명, 무소속 2명), 검사 15명, 판사 9명, 장성 3명, 중앙정보부 10명, 상당수의 국장급 공무원, 그리고 변호사, 언론인, 의사, 교수, 예비역 장성, 국영업체, 은행 이사들과 정부 각 부처 국장급 이하 공무원 다수. 엘리트라고 자부하며 어깨에 힘을 잔뜩 넣고 사는 이들 중 상당수의 마음속에는 부끄러움이라는 것이 없음을 대다수 서민은 다시 한 번 절감해야 했다. '편집자')

당시 9급 공무원 월급이 6만 원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분양권을 전매하면 몇 십만 원이 그 자리에서 생겼다. 문제가 된 압구정 현대아파트 특혜 분양의 경우 수사 관계자의 말에 의하면 한 채에 300만 원에서 500만 원까지 프리미엄이 붙어 있었다고 한다. 한번 생각해보자. 그러면 9급 공무원이 몇 년을 모아야 그런 돈이 나오는 건가. 한 번 전매하면 생길 수 있는 이익과 비교해보면 도대체 몇 년이나 모아야 하는 건가, 이 말이다. 문제가 된 특혜 분양 말고 압구정에 있던 여타 현대아파트에는 대개 150만 원에서 250만 원의 프리미엄이 붙어 있었다고 한다. 이러니 누가 공장에서, 농촌에서 성실하게 일하려고 했겠느냐, 이 말이다.

경쟁률이 50 대 1, 100 대 1이 된다는 강남, 여의도 지역의 아파트 분양에서 하나만 당첨돼도 수십 년 먹고살 수 있었다. 이런 것에 몇 번 성공하고 또 몇 채의 아파트를 가지고 있으면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아도 죽을 때까지 잘살 수 있었다. 그래서 당시 주민등록상 주소지를 여러 번 옮기는 사람이 많이 생겼고, 자식들이 다니는 학교도 여러 번 옮기게 하고 그랬다. 어떤 초등학생은 학교를 6~7번이나 옮겼다고 그 무렵 신문에 보도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투기 사회에서 정직한 서민은 만만한 먹잇감이었다

ⓒ오월의봄
프레시안 : 근래 고위 공직자 인사 청문회에서 빠짐없이 나오는 투기 관련 문제가 대부분 그런 것들과 관련돼 있지 않나. 특히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서는 '인사 청문회에서 투기는 필수 과목'이라는 지적이 곳곳에서 나올 정도로 문제가 심각하다. 그만큼 수많은 국민이 분노하고 있는데도, 투기를 비롯한 각종 비리에서 자유롭지 않은 사람들을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고위 공직자로 임명하는 일이 계속되는 것도 정상적인 국가라면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다.

서중석 : 주로 2000년대에 들어와서 장관 후보자들의 재산 획득 과정, 전력 문제 같은 게 세간에 많이 거론되지 않았나. 그때마다 얘기되는 게 이 위장 전입 문제, 그리고 전매를 몇 차례나 했고 아파트는 몇 채나 소유했느냐 하는 문제 아닌가.

하여튼 박정희 집권기에 한국 사회는 투기 사회로 바뀌었다. 투기만 잘하면 일확천금을 하고 떼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이었는데, 이것에 대한 도덕적인 저항을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그게 뭐가 나쁘냐는 식이었다. 건설업체가 특혜 분양을 한 것도 다 이해관계가 관련돼 있기 때문이었다. 당시 건설 기업들은 소형 아파트는 지을 생각을 안 했다. 정부에서도 건설 경기만 좋으면 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이렇게 되니까 셋방살이도 힘든 노동자나 점원 같은 서민들의 박탈감이 심할 수밖에 없었다. 허리띠 졸라매고 평생 열심히 모아봤자 분양권 전매 프리미엄에도 훨씬 못 미치는 사회가 되면 이제 본연의 경제 논리는 중요한 게 되지 않는다. 근면, 검약, 그리고 정직하고 성실하게 산다는 건 투기 광풍 속에서는 존재하기가 어려운 것 아닌가. 저축을 열심히 하면 그래도 나중에 집 한 채는 살 수 있겠다는 꿈도 서민 월급쟁이들은 점점 갖기 어렵게 만드는 구조 아닌가. 결국 부마항쟁 같은 식으로 불만이 언제든 터질 수 있는 사회, 그런 폭탄이 사회 곳곳에 매설된 사회가 된 것이다.

프레시안 : 부동산 문제가 없는 나라는 찾기 어렵지만, 그 점을 감안하더라도 한국의 부동산 투기 문제는 유별난 데가 있지 않나.

서중석 : 나는 이 시기에 스페인에서 한국 같은 투기 광풍이 불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스페인의 경우 2000년대에 금융 위기를 겪고 부동산 문제로 몸살을 앓긴 하지만, 1970년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대만에 대해서도 그런 기사를 본 적이 없다.

일본의 경우 부동산 열기가 대단했고 그 거품이 문제가 되기도 했던 건 사실이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일본도 인구에 비하면 땅이 그렇게 넓지 않고 특정 지역에 집중된 면도 많다. 그래서 부동산 거품이 생길 수 있는 측면이 어느 정도 있긴 하다.

그게 공통점이지만, 일본의 부동산 문제는 한국과는 성격이 다르다. 한국의 경우 권력과 연관된 부동산 투기라는 면이 강하다. 큰 규모의 불로 소득을 노린 재벌이 정권과 짜고 부동산 투기를 이끌었다고 볼 수 있는 면도 있다. 그런 것들이 경제 전체의 구조에까지 영향을 주지 않았나. 그런 점에서도 한국은 특이한 사례다. 그렇지만 일본의 경우 한국처럼 권력이 깊숙이 연관된다든가 하는 부분은 약하다. (이와 관련, 1970년대에 서울시 도시계획국장 등을 지낸 손정목의 증언을 음미할 필요가 있다. 손정목은 2016년 <월간중앙>과 한 인터뷰에서 1970년대 초 투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소위 '복부인'도 이때 나타났다. 하지만 진짜 큰손은 따로 있었다. 윤진우. 내 직전의 도시계획국장이었다. 그가 수십만 평 단위로 땅을 사면 나머지 자투리땅 수백~수천 평을 복부인들이 사는 식이었다. 정치적 사정이 있었다. 1970년 초 그가 강남 일대 땅을 사고 다닌다는 소문이 돌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당시 박종규 청와대 비서실장의 지시였다. 그때 24만 평을 구입한 뒤 18만 평을 다시 팔았다. 윤 국장이 땅을 싸게 사들였다가 땅값이 오르면 되파는 식이었다. 그렇게 20억 원, 지금으로 치면 5000억 원 넘는 돈을 마련했다. 이 자금이 1971년 대선과 총선 정치 자금으로 쓰였다고 하더라." '편집자')

싱가포르 같은 데에는 토지와 주택에 대한 공공 법 제도가 잘 구축돼 있다. 전에 내가 싱가포르에 갔을 때에도 가이드가 그 설명을 열심히 하더라. 서민 주택 부분을 철저히 했기 때문에 독재에 대한 반발이 거의 없다고까지 말하더라. 집이 있고 먹고사는 데 큰 어려움이 없으니 반발이 없을 수밖에 없지 않느냐, 이렇게까지 얘기하더라.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다 믿기는 어렵지만, 서민 주택 정책에 힘을 쏟은 건 사실이다. 주택을 살 때 싱가포르 정부에서 상당히 많은 액수를 보조해줬다. 주택을 가지려는 사람한테는 저리 융자, 토지 매입의 특권을 줬다. 시장 가격보다 낮게 그렇게 해준 것이다.

이러한 체계적, 효율적 주택 정책으로 주택 보급률이 일찍 100퍼센트를 넘어섰다. 공공 주택 거주 인구 비율도 1994년에 86퍼센트에 이르렀다. 그 가운데 대부분인 81퍼센트가 자가 주택에 거주하고 5퍼센트만 임대 주택에 거주했는데, 임대 주택의 경우 낮은 임대료가 적용되도록 짜여 있었다. 이처럼 공공 주택을 저렴하게 공급했기 때문에 독재를 하더라도 욕을 덜 먹는다고 얘기들을 하고 있다. 가이드도 그러더라. 서민을 위한 집이 저렇게 많다고 강조하면서, 부자들은 어차피 따로 사니까 그 사람들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청와대 보고서마저 "편파 인사에 사기 저상" 지적

프레시안 : 지역 차별 문제도 유신 정권 평가에서 놓칠 수 없는 요소 아닌가.

서중석 : 지역 차별과 지역 갈등 문제도 독재 정권에서 더 심각한 상태가 됐다. 1967년을 전후해 공단을 만들 때 경상도 지역에 많이 만들었다. 이것들 중 일부는 납득할 수 있는 것도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과연 그때 다른 지역을 충분히 고려하면서 여러 공단을 만들었나 하는 문제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후락 고향인 울산에 공단을 세우고, 박종규 근거지인 마산에 수출 자유 공단 그리고 창원 공단을 만들지 않았나. 이렇게 된 데에는 권력 관계도 작용한 것이고, 그건 지역 차별 문제와도 연결돼 있었다. 그리고 1960년대에는 비료, 농약 같은 게 귀했고 양수기도 아주 적었는데, 이런 것들도 대개 경상도 지역에 먼저 분배됐다고 신문에 나오고 그랬다.

1970년대에는 이런 지역 차별, 지역 갈등이 훨씬 더 심각한 상태가 됐다. 경제나 건설 쪽뿐만 아니라 공직자 인선에서도 그런 문제가 드러났다. 특히 권력의 핵이라고 할 수 있는 군 요직, 검찰, 경찰, 그리고 힘 있는 경제 부처, 이런 쪽은 모두 특정 지역에서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얘기가 나왔다.

전에 얘기한 12·12선거에 대한 청와대 보고서를 보면 "부처 내 인사에 있어 지연 등이 지나치게 작용되어 예를 들면 경상도 출신이 아니면 기용될 수 없다는 말이 나오는 등 편파적인 인사에 사기가 저상(沮喪)되어 있다"고 돼 있다. 다른 데도 아니고 청와대 비서실에서 작성한 보고서에 이 내용이 다 나온다. 이런 실정이었다.

빈부 격차, 빈익빈 부익부로 당시 얘기되던 그것도 유신 정권이 계속 키웠다. 경제 성장 제일주의 논리와 연결돼 나타난 모습이었는데, 여기서도 유신 체제를 지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좁혀버린 것이다.

"국민은 무조건 따라오기 마련", 불통은 이미 유신 시대에 잔뜩 나타났다

▲ 박정희 전 대통령. ⓒ연합뉴스
프레시안 :
편파적인 인사 이외에 다른 문제점도 관료 사회에 있지 않았나.

서중석 : 관료 사회가 경직돼 있었던 것도 중요하게 지적될 수 있다. 박정희는 한 사람의 지도자가 지시하고 호령하고 나머지는 모두 거기에 기계처럼 복종하면 능률이 최대로 높아질 거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건 관료주의, 무사안일주의, 명령이 떨어지기만 기다릴 뿐 솔선해서 일하지 않는 풍토를 키웠다. 공화당 의원들조차 '전부 대통령이 하지 않나. 우리는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자기 쇄신을 하지 않았다. 이러니 국민들한테 외면당할 수밖에 없었다.

유신 치하에서는 성취형 관료가 나타나기가 어려웠다. 그와 반대로 수치상 성과를 올리는 데 급급해 허위 보고가 나오기 마련이었다. 특히 농업 통계 같은 것에서 그런 문제가 심했다. 예컨대 쌀 통계를 보면 1977년에 수확량 4000만 석으로 돼 있는데, 그 당시 얼마나 이걸 믿었겠나. 1974년에 3000만 석을 돌파했다고 해서 그것도 굉장하다고 했는데, 어떻게 3년 만에 1000만 석을 증산할 수 있었겠나.

지방 관리들, 그러니까 군, 면의 관리들이 위에 보고할 때 그전보다 생산량이 줄었다는 보고를 하기가 굉장히 어려운 상황이었다. 해마다 전보다 더 많이 생산했다는 식으로 쌀 수확량을 올려야 하는 분위기였다. 그리고 그때는 예상 수확량을 많이 보고하게 했는데, 사실은 어림짐작으로 적당히 하는 면이 강할 수밖에 없었다. 정확히 얼마나 생산될지 어느 누가 미리 알 수 있었겠나. 농촌의 경우 그건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수치상 성과를 올리는 데 급급한 허위 보고가 이뤄졌기 때문에 유신 말기 경제 통계를 믿을 수 없다는 얘기가 여권에서도 나왔다. 청와대 새마을 담당 특보, 농촌 담당 특보로 불린 박진환 같은 사람도 그렇게 얘기하지 않았나.

막히고 경직되고 무사안일주의를 추구하는 이런 사회에서는 역동성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독재자가 창의성을 원하지 않는 면도 있지만, 창의성이 나타나기가 굉장히 어렵다. 정상적이라면, 시민 사회의 견제라든가 경쟁 관계에 있는 여러 조직이 있어야 하고 정치 세력의 비판도 따라야 하는 것 아닌가. 비판을 싫어하는 권력은 고인 물과 똑같다. 썩기 마련이고 전횡이 나타나기 쉽다. 장기 독재의 결과로 관료 사회가 얼마나 경직됐는가, 그런 현상이 나타나면서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했는가는 아까 이야기한 12·12선거에 대한 청와대 보고서에 잘 나와 있다.

프레시안 : 그 부분에 대해 어떤 지적이 담겨 있나.

서중석 : 보고서를 보면 "국민은 무조건 따라오기 마련이라는 행정부의 일방적이고 관료적인 풍조가 조성돼 있다", 이렇게 돼 있다. 공화당도 불평했는데, "국민을 의식하지 않고 성과 위주로 밀고 나가려는 행정부 측의 독주적 경향 때문에 금번 선거에서 많은 손실을 봤다"는 불평이 공화당 같은 데에서 나왔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국민의 희생쯤은 감수해도 무방하다는 자만심이 부지불식간에 공무원 사회에 쌓였다는 지적도 나온다. 예컨대 도시 계획 같은 걸 빈번하게 변경해도 괜찮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이 말이다. 또 시책을 졸속 추진해 많은 시행착오를 저질러도 국민한테 미안하다는 사과 한마디 없는 게 예사가 됐다고 이 보고서는 지적했다. '돈만 안 받으면 누가 뭐라고 할 거냐'고 하면서 일종의 무사안일 풍조가 공무원들 사이에 싹터 공무원들이 대민 봉사에서 불친절하고 업무 추진에 소극적인 자세로 임하고 있다는 말도 들어 있다.

일부 각료, 장관의 경우 "엘리트 의식"이 지나치게 강해서 국민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는 말도 담겨 있다. 보고서에는 "엘리트 의식"이라고 표현돼 있지만, 이건 권위주의 또는 권위 의식이라고 하는 게 정확할 것이다. 상황이 이러했기 때문에 정부하고 그렇게 짝짜꿍이 잘되는 재계조차 "여론 소통이 안되어 답답하다"는 불평을 털어놓는다는 지적도 나왔다. "정부 시책에 적극 호응해온 경제계에서조차 금번 총선을 전후하여 여론 소통이 안되어 답답하다는 불평", 보고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그러니까 불통은 이미 유신 시대에 잔뜩 나타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것들에서도 드러나듯이, 문제가 뭔지 자기들도 알 건 다 안 것이다.

이러면서 창조 능력이 극도로 배제된 사회가 돼버렸는데, 이한빈은 1970년대 대학에 창조적인 지도자가 들어갈 수 없었다는 얘기를 했다. 총장이 학생들과 교수들의 존경을 받는 것을 박정희 유신 정권은 몹시 경계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총장을 의사나 이공계 인사로 임명하는 것이 통례였다. 사립대에서 유명한 총장이 배출되는 걸 극도로 경계한 것과 관련 있다고 볼 수 있다. 아울러 졸업한 학생들을 학교에 정보원으로 심기도 했다. 학교에서 인기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조사하지 않았겠나. 이한빈 이 사람은 박정희 집권기에 대학 총장도 했는데, 자기가 그런 일을 겪은 게 아닌가 싶다.

프레시안 : 안타깝게도, 유신 말기 보고서의 내용 중 상당 부분이 수십 년 전 문제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보고서 내용을 보며 박근혜 정부를 떠올리는 독자들도 적지 않을 것 같다. 다시 돌아오면, 최고 권력자의 사생활 측면에서도 유신 정권은 다른 나라의 독재 정권들과는 차이가 나지 않았나.

서중석 : 과다한 폭음, 지나친 여자관계 같은 것도 스페인의 프랑코나 대만의 장개석한테서는 볼 수 없는 현상이었다. 내가 전에 프랑코 딸을 만난 얘기를 한 적도 있는데, 가족 관계에 대한 통제력 문제에서도 이 사람들은 박정희와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여자관계 부분을 조금 더 이야기하면, 프랑코는 근엄하기 짝이 없던 자였으니까 말할 것도 없지만 장개석도 박정희와는 달랐다. 물론 장개석도 장경국(장징궈)의 어머니인 본처를 버렸다고 해서 욕을 좀 먹긴 했다. 젊었을 때, 그러니까 일본에서 군사 교육을 받고 돌아온 후에는 여자관계도 상당했다. 그렇지만 나중에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특히 대만 총통 시절에는 여자관계가 나쁘다는 얘기를 듣지 않았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백아흔한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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