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 아시죠. 로마를 멸망 직전까지 몰고 갔던 장군입니다. 2차 포에니 전쟁 당시, 그가 지휘했던 '칸나에 전투'는 전 세계 사관학교 교재에 실려 있습니다. 이 전투에서 로마군 6만여 명이 죽었는데요. 제1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 유럽에서 하루 동안 가장 많은 군인이 죽은 전투입니다.
전쟁에서 이겨도 나라는 망한다…'피로스의 승리'
'칸나에 전투'를 사관생도들이 공부하는 이유는, 당시 한니발이 보여준 기량 때문입니다. 지휘관이 갖춰야 할 전술 능력의 모범, 그 자체였죠. 군사학자들은 한니발을 '전략의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이토록 뛰어난 장군도 결국 패배했습니다. 로마가 카르타고 본토를 쳤죠. 로마 장군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자마 전투에서 그를 꺾었습니다. 스키피오와 한니발이 나눴다는 대화가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소개돼 있습니다.
"한니발 장군이 생각하기에, 역사상 최고의 명장은 누구인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요. 그를 능가할 사람은 없소."
"그러면 두 번째는?"
"에피루스의 피로스요."
"그럼 세 번째는?"
"바로 나, 한니발이오."
"그러나 장군은 내게 지지 않았나?"
"그러게나 말이오. 내가 지지 않았다면, 내가 사상 최고의 명장이 되었을 거요."
한니발이 역사상 최고의 명장이라고 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유명합니다. 하지만 두 번째로 꼽은 '피로스'는 덜 알려져 있는데요. 그리스 국가 가운데 하나인 에피로스의 왕입니다. 군사적 재능이 뛰어났다고 하죠. 한니발조차 자기보다 한수 위라고 했으니까요. 로마와의 전쟁에서 연거푸 이겼습니다. 하지만 최후의 전투에서 졌죠. 나라가 망했습니다. 그래서 생긴 말이 '피로스의 승리'입니다.
전쟁을 아무리 잘해도, 그래서 싸울 때마다 이겨도, 소용없다는 거죠. 이기기 위해 너무 많은 희생을 했다면, 언젠가 한 번은 지게 돼 있습니다. 그땐 모든 걸 잃지요.
'백전백승'은 위험하다…중요한 건 '안전'
흔히 잘못 인용되는 고전 속 문장이 있습니다. "지피지기(知彼知己), 백전불태(百戰不殆)"라는 문장입니다. <손자병법>에 나오지요.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라는 뜻인데요. 이걸, "지피지기(知彼知己), 백전백승(百戰百勝)"이라고 잘못 인용하곤 합니다. '글자 두 개 틀린 게 대수냐'라고 할지 모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메시지가 완전히 달라져요.
'백전백승(百戰百勝)'이야말로, <손자병법>의 저자 손무(孫武)가 극도로 경계했던 겁니다. 백 번 싸워 백 번 이기면 좋은 것 아니냐고요. 천만에, 그렇지 않아요. 앞서 '피로스의 승리'를 이야기했죠. 백 번 싸워서 백 번 이겼습니다. 그 동안 너무 많은 걸 잃어버렸어요. 결국 백한 번째 싸움에서 졌습니다. 그럼, 아무런 소용이 없는 거죠.
손무는 강조합니다. 중요한 건, '불태(不殆)'라고요. 위태롭지 않아야 한다는 겁니다. 전쟁에서 이겨봤자 뭐 합니까. 재정이 파탄 나고, 지도자가 독선에 빠지고, 민심이 흩어지면, 곧 새로운 전쟁에 휘말릴 텐데요. 그땐 나라가 망할 겁니다.
군대를 운영하는 목적은 승리가 아닙니다. 위태롭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걸 위해서 승리가 필요하면, 승리를 해야 하는 거죠. 승리 자체를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승리는 불태, 그러니까 '안전'보다 하위 범주입니다.
한니발이 칸나에 전투에서 승리하고, '전략의 아버지'가 됐습니다. 그럼 뭐 합니까. 3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는 완벽하게 파괴됩니다. 폐허 위에서 풀 한 포기도 나지 말라는 뜻으로, 로마 인들이 소금을 뿌렸다고 하죠.
손무는 중국 춘추시대 말기에 활동했습니다. 대략 기원전 6세기입니다. 청동기 시대 끝물이죠. 칸나에 전투보다 300년쯤 전입니다. 그때 이미 '피로스의 승리'가 지닌 위험을 꿰뚫어봤습니다. 한니발이나 피로스가 <손자병법>을 읽었다면, 서양 역사가 달라졌을 수도 있겠죠.
<손자병법>은 왜 밀덕에게 인기가 없나
<손자병법>을 실제로 읽어보면, 무척 따분합니다. 소설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신출귀몰한 책략을 기대했다면, 금세 실망할 겁니다. <삼국지연의>에는 적은 병력으로 강한 상대를 물리친 사례가 가득합니다. 그런 승리, 기대하지 말라는 게 <손자병법>의 메시지입니다. 승리란, 우리의 강함으로 상대의 약함을 칠 때만 가능하다는 거죠. 냉정한 이야깁니다.
약한 쪽이 강한 상대를 이긴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간혹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아니에요. 적어도 특정한 조건에선 이긴 쪽이 더 강했던 거죠. 그런 조건을 만들거나 택하는 게 지휘관의 역할인 거죠. 약자가 강자를 이기는 경우란 없습니다.
<손자병법>은 대단히 공학적인, 동시에 실무적인 책입니다. 전쟁 한 번 하는데 얼마나 많은 비용이 드는지 시시콜콜 설명하죠.
<손자병법>이 묘사한 좋은 지도자는 '계산하는 사람'입니다. "묘산(廟算)"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묘당(廟堂)은 원래 궁중의 제사를 지내는 곳인데요. 거기 모여서 귀신에게 빌지 말고, '계산'을 하라는 겁니다.
<손자병법>은 '간첩'을 활용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했는데요. 역시 같은 맥락입니다. '계산'을 하려면 자료, 그러니까 데이터가 있어야죠. 그걸 얻기 위해 간첩이 필요한 거죠.
이렇게 치밀하게 자료를 수집하고 계산을 합니다. 상대가 우리보다 약하다는 결론이 나면, 싸워도 위태롭지가 않습니다. 적어도 지지는 않는다는 거죠. "지피지기(知彼知己)", 즉 상대를 알고 나를 안다는 건, 이런 뜻입니다.
그럼, 이런 판단이 끝나면 싸워도 되느냐. <손자병법>은 아니라고 합니다. 지지는 않는다, 혹은 이긴다는 걸로는 부족합니다. 이겨서 얻는 이익이 싸우는 비용보다 커야 합니다.
이익이 더 크면, 그 땐 전쟁을 벌여도 되나. 그것도 아니죠. 싸우지 않고 이기는 방법이 있는지 찾아봐야죠. 대개는 그게 더 이익이 크니까요. 더 큰 이익이 있는 걸 뻔히 알면서, 굳이 작은 이익을 고르는 지도자는 신망을 잃겠죠. 그럼 나라가 망합니다.
이긴 뒤에 발생하는 비용도 따져 봐야합니다. 점령한 영역을 제대로 다스릴 수 있을지, 혹은 방어할 수 있을지 말입니다. 일본제국이 그렇게 망했죠. 중일 전쟁, 태평양 전쟁을 벌였는데, 전선(戰線)이 너무 넓어지면서 감당할 수 없게 된 겁니다.
이런 논리를 죽 따라가면, 전쟁하지 말자는 생각이 듭니다. <손자병법>이 제시한, 까다로운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전쟁이 과연 가능할까 싶어지는 거죠.
평화학자 요한 갈퉁이 손무를 '평화학의 창시자'라고 한 것도 그래서입니다. 손무는 직접 평화 사상을 설파하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바보짓이라는 걸 자연스럽게 이해시켰습니다. <손자병법>이 이른바 '밀덕(밀리터리 덕후, 군사 마니아)'들에게 큰 인기가 없는 것도 그래서일 겁니다. 읽다보면, 저절로 전쟁에 대한 관심이 식어요.
"모든 게 마음에서 시작" vs. "계산과 관찰이 승부 정한다"
<손자병법> 이야기가 길었는데요. 박근혜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를 읽는 내내 <손자병법> 생각이 났습니다. <손자병법>의 메시지와 정확히 반대편에 있는 듯했거든요. 박 대통령 역시 '장군의 딸'인데, 그래도 되나 싶더라고요.
2016년 8월 15일, 박 대통령은 말했습니다.
"모든 것은 마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기원전 6세기, 청동기 시대에 <손자병법>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多算勝 少算不勝 而況於無算乎 吾以此觀之 勝負見矣(다산승 소산불승 이황어무산호 오이차관지 승부견의)"
(계산이 많으면 이기고 계산이 적으면 이길 수 없다. 하물며 아예 계산조차 없다면 어찌하겠는가. 그걸 관찰해서 승부를 예상할 수 있다.)
중요한 건, '계산과 관찰'이라는 이야깁니다. 승부를 결정하는 건 계산이며, 승부를 예상하는 근거는 관찰입니다.
손무는 줄기차게 이야기합니다. 마음만으로 할 수 있는 건 없다고요. 인구, 식량, 지리, 기후 등 객관적 조건을 관찰하고 따져야 합니다. 그게 지도자가 할 일입니다. 박 대통령과는 확실히 다르죠.
제국주의 일본의 장군들 "정신력이 화력을 이긴다"
물론, 박 대통령과 비슷한 지도자들도 역사에 있습니다.
제국주의 일본의 장군들이 대표적이죠. 그들은 말했습니다.
"정신력이 화력을 이겨낼 수 있다."
일본 언론도 화답했죠. 중일 전쟁 당시 일본 언론은 초호황을 맞았습니다. 신문이 불티나게 팔렸죠. 기사 내용은 이런 식입니다.
"미간을 통해 들어온 총알이 두개골과 피부 사이를 깨끗하게 지나서 후두부로 빠져나갔지만 이를 대수롭지 않은 상처라고 생각해서 싸웠던…."
"40도가 넘는 열에 시달리던 사람이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전투에 나갔는데 그곳에서 병이 완쾌했습니다."
좀비가 나오는 소설이 아닙니다. 실제 <아사히신문> 기사입니다. 일본 언론인 한도 가즈토시가 쓴 <쇼와사>(박현미 옮김, 루비박스 펴냄)에 소개된 내용입니다. 전쟁 당시, 이런 기사 내용이 허구라는 걸 알았던 이들도 많았을 겁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기사가 사실이라고 믿었겠죠. 정신력으로 총알을 이길 수 있다고요.
일본 장교를 꿈꾸던 '청년 박정희'는 당시 어느 편이었을까요. 궁금해집니다.
"할 수 있다는 신념"이 낳은 비극, 임팔 작전
"할 수 있다는 신념"만 있으면 뭐든 된다는 '정신주의'의 극치는, 태평양 전쟁 당시 인도 임팔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였습니다. '임팔 작전'을 지휘한 일본 장군 무타구치 렌야는 정신력으로 물자 부족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죠. 모래로 쌀을 만드는 재주라도 있었던 걸까요. 그럴 리 없죠. 병사 6만5000명의 가운데 1만5000명만 살아남았습니다. 나머지는 대부분 '죽음의 행군' 속에서 굶어죽었어요. 1990년대 초, MBC가 방영한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에 잘 묘사돼 있습니다. 최대치(최재성 분)가 속한 일본군 15사단이 이 작전에 투입됩니다. 최대치가 밀림 속에서 뱀을 잡아 먹으며 홀로 살아남는 장면이 강렬했죠.
패전 이후 전범 재판에서 무타구치 렌야는 불기소 처분을 받습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바보짓으로 연합군에게 오히려 도움을 줬다는 겁니다. '임팔 작전' 만큼이나 엽기적인 재판 결과죠.
박 대통령은 "포기와 좌절을 몰랐던 불굴의 정신"을 강조했습니다. "'불가능은 없다'는 우리 민족의 불굴의 DNA"라는 말도 했고요.
무타구치 렌야를 떠올리게 됩니다. 그가 "포기와 좌절"을 알았더라면, 병사들이 덜 죽었을 겁니다. 어쩌면 역사의 전개도 조금 달라졌을 수 있겠네요. 하긴, 그랬으면 전범 재판에서 무타구치 렌야가 사형 선고를 받았겠네요. 연합군에게 불리한 일을 한 셈이니까요.
어찌 됐건, 광복절 경축사에서 드러난 박 대통령의 정신세계는 <손자병법>보다는 제국주의 일본의 군인들에게 더 가까워 보입니다. 관동군 장교 출신인 아버지의 영향인 걸까요. 걱정스럽습니다.
박근혜 식 정신주의, 군국주의 세계관과 닮은꼴
불가능은 있습니다. 있는 걸 없다고 지도자가 우기면, 아랫사람은 거짓말을 해야 합니다. 태평양 전쟁 말기 일본 군대가 그랬죠. 전쟁을 지휘하는 대본영에 보고된 내용과 현장 상황이 완전히 달랐다고 합니다.
불가능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는 게 지도자의 용기일 겁니다. 불가능이 있다는 걸, 다들 아는데 없다고 거짓말 하면 지도자의 위신만 깎이죠. 정치 및 군사 지도자는 무당이 아닙니다. 실현 가능한 비전을 제시해야 합니다. 아울러 합리적인 근거로 설명할 수 있는 경로를 보여줘야 합니다. '어떻게' 없이 '신념'으로 꿈을 이룰 수 있다는 건, 무당의 언어입니다. 정화수 떠놓고 열심히 빌면 시험에 붙는다는 것과 다를 바 없죠. 지금은 단군 왕검의 시대가 아닙니다. 제사장과 정치 권력자가 일치하는 시대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박 대통령의 '정신주의'는 확실히 문제가 있습니다. 20세기 일본을 패망으로 이끈 군국주의자들의 세계관과 닮았습니다.
신기술에 눈 뜬 인간, 욕망의 극단으로 치닫다…'싸우는 나라들'의 시대
하지만 계산만 강조하는 <손자병법>의 세계관 역시 지나치게 차가워 보입니다. 인간의 의지를 너무 무시하는 느낌이죠. 전국 시대의 장군이었던 오기가 쓴 <오자병법>은 색깔이 좀 다릅니다. <손자병법>에 비해선 인간적인 요소가 더 강조돼 있습니다. 물론, 전쟁을 다룬 책은 기본적으로 차가울 수밖에 없죠. 상대적인 차이일 뿐입니다.
<손자병법>은 왜 그랬을까요. 손무는 춘추 시대 말기의 사람입니다. 싸우는 나라들의 시대, 전국(戰國) 시대를 앞둔 때였죠. 청동기에서 철기로 넘어가는 과도기였습니다. 춘추와 전국은 완전히 다른 시대입니다. 공자는 춘추 시대의 종말을 이렇게 묘사했어요. "西狩獲麟(서수획린, 서쪽으로 사냥을 나가서 기린을 잡다)" 기린은 상서로운 동물인데, 탐욕스러운 인간들이 그걸 잡아버렸어요. 공자는 눈물을 흘렸다고 적었죠. '철기'라는 신기술에 눈을 뜬 인간들은 더 이상 금기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욕망의 극단을 향해 직진하죠. 결과는 끝없는 전쟁입니다.
춘추 시대와 전국 시대는 전쟁의 양상이 완전히 다릅니다. 춘추 시대의 전쟁은 학교 일진의 싸움 비슷했어요. '누가 이 학교에서 제일 센 놈인지'를 정하기 위해 싸웁니다. 시간을 정해서 공터에서 만나죠. 누가 더 센지를 확인하면 싸움은 끝납니다. 중국 역사에 관심 있는 독자들은 '춘추오패' 같은 표현을 자주 접했을 겁니다. 누가 제일 센 놈인지를 정해서 '패자(覇者)'로 떠받들죠. (싸움에 진 사람을 뜻하는 패자(敗者)와는 한자가 다릅니다.)회맹 자리를 열어서 그걸 확인합니다.
이런 시대의 전쟁은 누가 '패자'인지를 정하는 게 목적입니다. 그래서 전투가 길지 않습니다. 보통 하루 안에 끝나죠. 평원에서 싸웁니다. 그러니까 전차(말이 끄는 수레)가 중요한 무기가 됩니다. 전투 양상도 단조롭습니다. 승부가 기울면, 진 쪽은 도망치거나 항복하죠. 그럼 끝입니다.
전국 시대의 전쟁은 달라요. 기습, 매복 등 전에는 잘 쓰이지 않던 전술이 사용됩니다. 누가 강한지를 정하는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상대를 멸망시키는 게 목적입니다. 포위전, 섬멸전 등이 나타나죠. 전투의 무대 역시 다양해집니다. 예전엔 상상할 수 없던 곳, 깊은 산속이나 계곡에서도 전투가 벌어집니다. 그러니까 평원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전차는 퇴장합니다. 대신 보병의 역할이 중요해지죠.
40만 명을 생매장…"'새로운 전쟁'의 시대가 온다"
훗날 중국을 통일하는 진나라와 조나라가 싸운 장평대전이 이 시대 전쟁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데요. 진나라가 이깁니다. 조나라 포로 40만 명을 잡아요. 진나라 병사들은 포로 40만 명을 생매장 합니다. 춘추 시대라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죠. 내가 이겼는데, 항복한 상대를 왜 몰살합니까. 그러면 내가 강자라는 걸 증명해줄 사람도 사라지는 걸요.
전국 시대는 달라요. 상대가 죽어야 내가 살아남습니다. 조나라 포로 40만 명을 몰살했다는 기록이 사실일까요. 훗날의 역사가들은 고대 중국인 특유의 과장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실제 그 지역에서 발굴이 진행되자 판단이 달라졌죠. 수십 만 명의 유골이 나왔습니다. 조나라에서 노동 가능한 남성 전부가 전쟁에 동원됐고, 모두 죽었던 겁니다. 이후 조나라는 인구 부족으로 몰락합니다.
손무가 <손자병법>에서 전한 메시지 가운데 하나는 '이제 새로운 전쟁의 시대가 온다'라는 거였습니다. 춘추 시대의 전쟁 방식은 안 통하게 되리라는 거죠. 새로운 시대의 전쟁은 훨씬 끔찍하리라는 것, 아울러 국가의 모든 역량을 동원하는 총력전이 되리라는 걸 내다봤습니다. 그러니까 전쟁에 대해 신중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전쟁을, 경제와 정치의 다양한 측면에서 살피라고 합니다. 총력전이니까요. 비용과 이익을 꼼꼼히 계산하지 않으면, 전쟁에서 이겨도 나라가 망할 수 있습니다.
"파일럿이 필요 없는 공군"
다시 지금을 돌아보게 됩니다. 한반도에서 새로운 전쟁이 벌어진다면, 어떤 양상일까요. 영화 <인천상륙작전>에 묘사된 모습일까요. 아무도 모르죠. 다만 분명한 건, 과거와는 확실히 다르리라는 것, 새로운 기술을 실험하는 장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철기 시대를 앞둔 시점에 출간된 <손자병법>이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이유입니다. 어떤 전쟁일까요.
안보 전문가인 이상우 전 한림대학교 총장은 "머지않아 파일럿이 필요 없는 공군이 도래할지 모른다"고 했죠. 무인 전투기, 드론이 공중전을 할 수도 있겠습니다. 핵무기 때문에 순식간에 잿더미가 될 수도 있겠죠. 인공지능이 지금은 상상하기 힘든 방식으로 활용될 수도 있을 겁니다.
물론, '이미 다가온 미래'도 있습니다. 곧 배치될 예정인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 체계)입니다. 이게 어떻게든 활용되리라는 건 분명하겠죠.
좋은 무기, 승리가 안전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사드 배치에 찬성하는 이들은 말합니다. 안보를 위해 꼭 필요하다고요. 다시 <손자병법> 이야기로 돌아가죠. 손무가 강조한 건, 승리가 아니었습니다. '불태(不殆)'입니다. 위태롭지 않아야 한다는 거죠. 가장 중요한 목표는 우리 공동체의 안전입니다. 그걸 지키는 게 진짜 안보죠.
사드가 좋은 무기라고 칩시다. 그걸 도입하면, 전쟁 승리에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더 안전해지나요. 진짜 중요한 질문은 이겁니다. 사드 배치 때문에 우리가 더 위태로워진 건 아니냐는 거죠.
좋은 무기로 전쟁에서 이기는 것보다 아예 전쟁을 피하는 쪽이 낫습니다. 그게 <손자병법>의 메시지죠. 사드 배치 때문에 전쟁 위험이 더 높아진다면, 설령 그게 우수한 무기라고 해도 거부하는 게 옳습니다. 더구나 새로운 전쟁은 우리가 영화에서 본 것보다 훨씬 참혹할 수 있습니다.
우리 시대의 손무가 있다면, 신기술이 도입된 새로운 전쟁이 어떤 모습일지를 내다본 군사 전문가가 있다면, 사드 배치에 대해 뭐라고 할까요? 그게 정말 궁금합니다.
미국 대통령에게 컴퓨터 게임 선물한 폴란드 총리
사드 배치 논란이 사실 한국에서만 벌어진 게 아니죠. 사드는 미국의 세계 전략에 따라 배치됩니다. 중국, 러시아의 동쪽에 있는 한국에 배치하려 하고요. 중국, 러시아 등의 서쪽에 있는 동유럽에도 배치됩니다. 예컨대 폴란드에도 배치됐어요.
폴란드는 한국과 닮은 점이 있죠. 주변에 독일, 러시아 등 강대국이 있습니다. 이들 나라의 침략을 받았었죠. 그리고 민족주의가 강합니다. 한편으론 피해자 정서입니다. 다른 한편으론, 자기네보다 더 약한 국가들에게 횡포를 부리게끔 합니다.
당초 폴란드에 사드를 배치하기로 했다가 철회했습니다. 2008년 미국과 폴란드 두 나라 외교 장관이 정식 서명했지만 의회가 반대했던 겁니다. 그러니까, 의회가 반대하면, 사드 배치를 철회할 수 있는 거죠. 한국도 참고할만한 사례입니다.
하지만 결국 폴란드 역시 사드를 배치하는 쪽으로 돌아섰어요. 지난해 확정됐죠. 그 사이인 지난 2011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폴란드를 방문했습니다. 당시 도날드 투스크 폴란드 총리가 오바마 대통령에게 선물을 줬어요. 그런데 선물 내역이 재미있습니다. 폴란드 개발자들이 만든 컴퓨터 게임이 포함됐죠. '더 위쳐2' 한정판입니다. 게임 CD와 함께 게임 주인공의 흉상 등이 담겨 있다고 합니다.
전쟁 겪은 민간인을 취재한 게임 개발자들
정상 회담하러 온 외국 국가 원수에게 게임을 선물하는 나라가 폴란드인데요. 이 나라 개발자들이 만든 게임 중에 재미난 게 많습니다. 이번에 소개하는 게임은 '디스 워 오브 마인 (This War of Mine)'입니다. 지난번에 '레플리카(Replica)'라는 인디 게임을 소개했었죠. '디스 워 오브 마인' 역시 인디 게임이에요. 우리 말로 옮기면, "나만의 이런 전쟁" 쯤 되겠네요.
'전쟁을 겪는 민간인들의 고통'을 주제로 삼았죠. 군인, 혹은 권력자의 눈으로 전쟁을 다루는 게임은 많아요. 하지만 전쟁으로 고통 받는 보통 사람의 눈으로 전쟁을 본 게임은 드물죠.
개발자들은 보스니아 전쟁 가운데 벌어진 사라예보 포위전을 소재로 삼았어요. 당시 내전을 체험했던 시민들을 만나서 인터뷰했죠. 그들의 체험기도 꼼꼼히 읽었고요. 이처럼 광범위한 취재를 거친 뒤, 게임을 만들었어요. 그래서인지 전쟁 상황에서 민간인들이 겪는 고뇌가 생생하게 묘사돼 있습니다. 전시엔 생필품이 절대 부족합니다. 그걸 얻기 위해 민간인들이 아귀다툼을 벌입니다.
전쟁 이전에는 소방관, 축구 선수, 가정주부, 건축업자 등 평범한 직업을 갖고 있던 게임 주인공들은 전쟁 속에서 다양한 윤리적 갈등을 겪습니다. 서로 돕기도 하지만, 약탈도 하죠.
게임을 하다 눈물을 흘렸다는 이용자들이 많습니다. 한 이용자가 올린 후기입니다. 게임 속에서 식량을 구하기 위해, 한 노인 부부의 집을 약탈했습니다. 그때까진 아무런 감정이 없었어요. 이건 그냥 게임이니까요. 그런데 그 노인 부부의 집을 다시 찾아갔을 때,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많이 아파요. 그러니까 약은 가져가지 마세요."
게임 이용자는 한참 동안 머리가 멍해졌다고 합니다. 실제로 게임을 하다가 캐릭터가 자살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양심의 가책 때문이죠.
폭탄 소리를 구별하는 소녀
컴퓨터 게임을 하다보면, 이런 경우가 많죠. 잠깐 몰입한 것 같은데, 시계를 보면 깜짝 놀랍니다. 시간이 훌쩍 지나간 거죠. 이 게임은 반대입니다. 한참 몰입한 것 같아요. 그런데 시간은 얼마 지나지 않았어요. 전쟁 상황 속의 시간이 아마도 그렇게 흘러가겠죠.
'디스 워 오브 마인' 개발자들이 취재 과정에서 만난 한 소녀는 지금도 폭탄 소리를 구별한다고 해요. 소리만 들어도, 그게 어디에 떨어진 폭탄인지, 어떤 종류의 폭탄인지 안다는 겁니다. 극단적인 상황에서 신경을 바짝 곤두세웠던 경험 때문입니다. 폭탄이 떨어지는 짧은 시간이 아주 길게 느껴졌던 겁니다.
개발자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건, 재미있어서는 안 되는 게임"이라고요. 올해 4월에 열린 '넥슨 개발자 콘퍼런스 2016(NDC16)'에 이 게임 개발자인 도브스키 씨가 참석했죠. 그는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실 평소 우리가 즐기는 엔터테인먼트들은 모두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시장에는 비극적인 영화나 소설도 충분히 많이 있고, 우리는 이를 보고 감정적인 만족감을 얻습니다. 그들이 전해주는 메시지가 충분히 가치 있었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게임이라고 왜 이게 안 될까요?"
박근혜 대통령에게 이 게임을 권합니다. 바쁘면, 게임 도입부만 봐도 됩니다. 이런 말이 나오죠.
"In war, not everyone is a soldier. (전쟁에서 모두가 군인인 것은 아니다.)"
"In modern war, You will die like a dog for no good reason. (현대전에서 당신은 별 이유 없이 개처럼 죽을 것이다.)"
군인에겐 승리가 목적입니다. 하지만 군인과 대통령을 먹여살리는 건, 다수 민간인이죠. 그들이 낸 세금으로 군대를 유지하잖아요. 다수 민간인은 대체 왜 벌어졌는지도 모르는 전쟁 속에서 오로지 생존만 걱정합니다. 게임 속에 이런 말이 나오죠.
"군인들에게 전쟁이란, 승리를 위해 싸우는 것이지만, 우리들에게 전쟁이란, 그저 먹고 살기 위해 싸우는 거였어. 난 이 사람들의 도움을 통해 살았어. 우린 서로 뭉쳤고, 살기 위해선 어떤 짓이든 하지. 나는 그날들을 잊지 않을 거야. 네가 전쟁에서 본 것들은, 영원히 함께할 거야."
"전국위상(全國爲上)", 상대를 보존하는 게 최고의 계책
굳이 <손자병법>을 읽지 않아도, 몸으로 아는 이야기입니다. 승리보다 중요한 건, '불태(不殆)'라고요. 위태롭지 않아야 한다는 것, 안전해야 한다는 거죠. '디스 워 오브 마인' 게임을 하다보면, 절실히 공감하게 되죠.
박 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에서 "사드 배치 역시 북한의 무모한 도발로부터 우리 국민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선택한 자위권적 조치"라고 말했습니다.
<손자병법> 저자가 그 이야길 들으면 가슴을 칠 겁니다. 좋은 무기가 안전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상대를 망가뜨리는 것 역시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손무는 "전국위상(全國爲上)"이라고 했죠. 상대를 온전히 보존하여 굴복시키는 게 제일 좋다는 뜻입니다. '파국(破國)', 즉 상대를 망가뜨리는 건 그 다음입니다. 별로 좋은 계책이 아니란 거죠. 그는 '벌교(伐交)', 즉 적의 동맹 외교를 차단하는 것도 좋은 계책은 아니라고 봅니다. '벌병(伐兵)', 즉 무력을 동원하는 건 더 나쁜 계책이고요. 최악은 '공성'(功城)이죠. 성을 공격하는 겁니다. 방어할 준비가 잘 갖춰진 상대와 싸움을 벌이는 건 바보짓이라는 거죠.
이런 관점에서 보면, 김대중 및 노무현 정부의 햇볕 정책이 가장 좋은 평가를 받을 겁니다. '전국(全國)', 즉 상대를 온전히 보존하는 정책이니까요.
북한을 이겼는데, 우린 더 위험해졌다면?
반면, 박근혜 정부는 파국(破國), 벌교(伐交), 벌병(伐兵) 등에 치우쳤습니다. 이게 왜 나쁜지 이해가 안 되면, 지금 컴퓨터를 켜세요. '디스 워 오브 마인' 게임을 해보면 알게 됩니다. 민간인의 눈으로 보면, 전쟁 승리가 얼마나 덧없는지 느끼게 되죠. 거듭 이야기합니다. 중요한 건, 승리가 아닙니다.
군사력으로 북한을 압도했는데, 그래서 한반도가 더 위험해진다면 무슨 소용이 있나요. 중요한 건, '불태(不殆)', 바로 안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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