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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도 '보드 게임' 마니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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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도 '보드 게임' 마니아였다

[성현석의 토이 스토리] 학습 게임? 차라리 정치 게임!

'브렉시트' 후폭풍, 이제 막 시작입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있을지 모르죠. 시인 김수영은 "풀이 눕는다 /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라고 노래했는데요.

'브렉시트' 이후, 유럽 배경 게임에서 영국이 삭제됐다?

'바람보다 더 빨리 눕는 풀', 어쩌면 게임일 수도 있겠습니다. 컴퓨터 게임 <유로 트럭 시뮬레이터 2>가 엉뚱한 후폭풍에 휩싸였죠. 게임 이용자가 트럭 운전사가 돼 유럽 전역으로 화물을 나르는 게임인데요. '브렉시트' 국민투표 결과가 나온 지난 24일, 이 게임 디자이너인 제임스 오크(James Oak)가 한 게시판에 글을 올렸습니다.

"영국이 삭제되는 패치가 진행됐다."

영국이 유럽연합(EU)에서 빠져나가기로 했으니, 이 게임에서도 영국이 빠진다는 거죠. 일부 외신이 이 내용을 보도하면서, 전 세계 <유로 트럭 시뮬레이터 2> 이용자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화제가 됐죠.

앞뒤 잘라내고, 한두 마디만 콕 짚어 보도하는 '기레기' 행태, 외국 언론도 마찬가지였나 봅니다. 이 기사, 오보였죠. 제임스 오크가 쓴 글을 끝까지 읽어보면, '농담'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기자가 글을 끝까지 읽지 않은 채 기사를 썼고, 그걸 다른 매체들이 베껴서 보도했습니다.

결국 <유로 트럭 시뮬레이터 2> 개발사인 SCS소프트웨어 측이 해명 공지를 하면서 논란이 종식됐습니다. "다행히 이 게임은 유럽연합 시뮬레이터가 아니다"라는 내용입니다. 유럽연합에서 탈퇴해도, 영국은 여전히 유럽의 일부라는 거죠. 결국 영국을 삭제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게임, 그러니까 놀이 문화는 어떤 식으로건 시대 상황의 영향을 받습니다. 글을 다 읽지 않고 기사를 쓴 기자는 분명히 잘못했지만, '<유로 트럭 시뮬레이터 2>가 브렉시트의 영향을 받을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 자체는 일리가 있다는 거죠. 어쩌면 앞으로 출시될, 유럽을 배경으로 한 게임 가운데는 영국을 배제한 것도 있겠네요.

코끼리가 살았던 중국 고대의 흔적, 장기에 남아 있다

▲ 우르의 게임.
컴퓨터가 등장하기 전에도, 게임은 있었죠. 흔히 '보드 게임'이라고 불리는 것들입니다. 윷놀이도 일종의 보드 게임입니다. 바둑, 장기, 화투 등도 마찬가지죠. 1980년대에 유행한 부루마불 게임도 있고요.

실물로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보드 게임은, 기원전 2600년 경 수메르 인들이 하던 '우르의 게임'입니다. 고대 바빌로니아의 도시 우르에서 발굴돼 대영박물관에 소장돼 있죠. 2인용 보드 게임인데요. 발굴 당시에는 게임 규칙을 알 수 없었어요. 그런데 1980년대 초 쐐기 문자가 적혀있는 진흙 서판이 해독되면서 규칙이 알려졌습니다. 우리가 지금 하는 보드 게임과 다를 게 없습니다. 주사위를 던지고 말을 이동시키는 거죠.

고대의 보드 게임 역시 당대 상황을 반영합니다. 예컨대 장기는, 중국 최초의 통일 국가였던 진나라가 무너진 뒤, 한(漢)과 초(楚)가 벌였던 전쟁을 모티브로 삼았습니다. 당대의 흔적이 남아 있죠. 상(象, 코끼리)이라는 말이 있는 게 그렇죠.

지금은 중국에서 코끼리를 볼 수 없죠. 하지만 고대 중국의 자연 환경은 달랐다는 게 역사학자 및 과학자들의 설명입니다. '우르의 게임'에도 당대 상황이 반영돼 있겠죠.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걸 알아내기란 어려워 보입니다. '인류 최초의 도시'로 불리는 우르는, 지금의 이라크 지역입니다. 미국의 이라크 공격 이후, 유물과 유적이 많이 파손됐죠.

'시험 지옥'의 '학습 게임'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보드 게임은 '승경도 놀이'입니다. 당대 상황이, 동시대인의 욕망이 아주 노골적으로 반영돼 있죠. 지금처럼 공장에서 찍어내는 방식이 아니므로, 시간과 장소에 따라 규칙이 조금씩 달랐다고 하는데요. 큰 틀은, '우르의 게임'과 마찬가지입니다. 일종의 주사위인 '윤목'을 굴려서 말을 움직이는 방식이죠. 운(주사위)과 실력(전략)을 적절히 배합하는 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게임의 기본입니다.

'승경도 놀이', 옛 사람들이 하던 거니까 조잡하겠지 하면 잘못입니다. 300여 개의 관직이 경직(중앙 관리)과 외직(지방 관리)로 구분돼 등급별 칸에 그려져 있습니다. 칸마다 종9품부터 정1품까지의 벼슬 이름이 적혀 있죠. 자신의 신분을 정하는 게 게임의 시작입니다. 가위바위보를 하거나 윤목을 굴려서 신분을 정하죠.

은일·문과·무과·남행·군졸 등 다섯 신분 가운데 하나입니다. '은일'이란, 학문이 높은 선비를 과거 시험 없이 발탁하는 경우입니다. '남행'도 과거를 치르지 않고 벼슬을 하는 경우인데요. 전자는 누가 봐도 과거에 합격할 실력이 있는데, 공직에 관심이 없던 이들을 정부가 모셔오는 것이라면, 후자는 집안은 좋은데 과거에 합격하지 못한 이들이 공무원이 되는 경우입니다. '시험과 공부의 나라'였던 조선에서 '남행'은 대접을 못 받았죠. 군졸은 과거에도 합격하지 못하고, 집안도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신분 서열이 은일·문과·무과·남행·군졸 순서입니다. 신분을 정한 뒤엔 똑같은 목표를 향해 달려갑니다. 고위 공직자가 되는 목표죠.

게임 규칙 역시 정교한데요. 현실 정치 상황이 잘 반영돼 있습니다. 비리가 드러나면 '파직'을 당합니다. 심각한 상황이면, '사약'을 받죠. 그럼 강제 퇴장당합니다. 더는 게임을 못하죠. 그러나 '파직'을 당한 경우에는 '복직' 가능성이 있습니다. 일정 수준 이상 직책을 맡으면, '인사권'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일종의 언론 기능을 활용해서 판서 급 고위직(지금의 장관 격)을 파직시킬 수도 있습니다. 이런 기능을 활용하는 건, 그저 운이 아니라 전략적인 판단입니다. 왕의 '성은'을 받으면, 재량이 확 넓어집니다. 같은 품계 안에서 벼슬을 고를 수 있죠.

정말 현실적이죠. 왜 그랬을까요. '승경도 놀이'는 일종의 학습 게임이었습니다. 아이들이 다양한 관직 이름을 외우고, 공무원이 일하는 방식을 이해하게끔 하는 목적이었거든요. 영화 <사도>에서 영조가 아들 사도세자에게 그랬죠. "조선은 공부를 국시로 삼는 나라"라고요.

욕망이 반영된 놀이 문화

물론, 이미 관직에 오른 어른들도 '승경도 놀이'를 즐겼습니다. <난중일기>에도 나오죠. 이순신 장군은 비가 오는 날이면 부하들을 모아놓고 '승경도 놀이'를 했습니다. 그 역시 드라마틱한 공직 생활을 했는데요. '승경도 놀이'의 윤목을 굴리면서, 자기 삶을 돌아봤을 수도 있겠죠.

직업이 많지 않았고, 그 중 괜찮은 건 '공무원'뿐이던 시대에 유행했던 '승경도 놀이'. 당대의 욕망이 적나라하게 반영돼 있습니다. 조선은 공부를 국시로 삼는 나라였다지만, 여성은 예외였습니다. 여성은 공부할 기회도 없었고, 설령 공부를 해도 공무원이 될 수 없었죠. 여성들을 위한 게임도 있었습니다. 인현왕후가 개발한 '규문수지여행지도(閨門須知女行之圖)'입니다. 줄여서 '여행도'라고 하죠. '승경도 놀이'의 여성 버전인데요. 역시 학습 게임 성격이 강합니다. 당대인들이 생각하는 '여성의 도리'를 가르치는 거죠.

인현왕후? 맞습니다. '장희빈'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사극의 단골 주인공입니다. 인현왕후가 '여행도'를 만든 건, 궁궐에서 쫓겨나서 친가에 머물던 당시였습니다. 인현왕후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숙종에 대한 원망? 장희빈에 대한 복수? 쫓겨난 왕비가 이런 마음으로 당대 '모범 여성'의 도리를 가르치는 보드 게임을 만드는 모습. 좀 으스스하죠. 인현왕후는 훗날 다시 궁궐에 돌아옵니다. 장희빈은 쫓겨나고요. '여행도'가 지금까지 남아 있는 건, 그 때문이겠죠.


'승경도 놀이' 개발자로 알려진 사람 역시 사극에서 자주 봅니다. 대체로 조연이죠. 태종 이방원의 책사였던 하륜입니다. '조선의 설계자'로 불리는 정도전의 정적이었죠. 하륜 역시 재야 생활을 오래 했죠. 그는 성리학 외에도 풍수지리 등 온갖 방면에 조예가 깊었다고 하는데요. '승경도 놀이' 개발자로 알려진 것도 어쩌면 그 때문일 겁니다.

여전한 '시험과 공부의 나라'만화도, 게임도 '학습' 목적


조선은 망했지만, '시험과 공부의 나라'는 살아남았습니다. 조선의 성리학 이념과 상극인 신자유주의가 이 나라를 휩쓴 뒤론, 오히려 공무원의 인기가 더 높아졌습니다. 시장 만능주의와 공무원 열기라니…. 얼핏 모순 같지만, 사실 당연한 거죠. 민간 부문의 경쟁과 불안이 심해질수록, 공직의 매력은 높아지기 마련이니까요. 최근에는 기업에서 오래 일했던 이들이 뒤늦게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경우도 많다고 합니다. 시장주의 정치 세력은 걸핏하면 '작은 정부'를 외치지만, 그게 실제로 구현되는 경우는 드뭅니다. 그들 역시 집권하면 더 많은 공무원이 필요해지니까요.

얼마 전, 전라남도 곡성에서 벌어진 비극 기억하시나요.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던 청년이 아파트에서 투신자살을 했습니다. 그런데 청년이 추락한 그 자리에 한 공무원이 있었죠. 그 역시 민간 기업에 다니다 뒤늦게 공무원이 된 경우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공무원은 시험으로 뽑습니다. '시험과 공부의 나라'에선 놀이 역시 '학습 게임'으로 귀결됩니다. 결국 '승경도 놀이'의 변주인 거죠. 이른바 '학습 만화'가 종종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겠죠.

다시 부는 보드 게임 바람

대학가에서 보드 게임 카페가 잠시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대략 십수 년 전이죠. 이런 유행이 오래가지는 않았어요. 보드 게임처럼 시간을 많이 쓰는 놀이를 하기엔, 청년의 일상이 너무 팍팍해졌죠.

그런데 요즘 다시 보드 게임이 주목을 받는다고 하네요. 당시 카페에서 밤을 새면서 보드 게임을 하던 청년들이 부모가 된 지금 말입니다. 아이들에게 보드 게임을 가르치는 부모들이 늘어난다고 합니다.

자신이 젊었을 때 하던 놀이를 아이와 공유하고 싶은 마음? 그렇지가 않습니다. 역시 한때 보드 게임 마니아였던 서울 대치동 학원 관계자에 따르면, 요즘 사교육 트랜드는 '사고력', '창의력' 등이랍니다. 입시에서 영어가 차지하는 비중이 줄어드는 분위기라네요. 상대적으로 수학이 중요해졌다는 거죠. 그러니까 '수학적 사고력'이 화두랍니다. 또 알파고 충격 이후엔 '공학적 창의성'이 각광받습니다. 아이들에게 컴퓨터 프로그래밍(코딩) 교육을 하자는 목소리도 높아졌고요. 그런데 보드 게임이 '수학적 사고력', '공학적 창의성' 등을 동시에 기르는 방법이라는 겁니다. 실제로 보드 게임 학원도 생겼죠. 보드 게임을 통해 사고력을 기른다는 건데요. 그래서 '생각', '창의', '수학놀이' 등의 간판을 걸고 있습니다.

글쎄요. 보드 게임을 가르친다고 해서, 사고력이나 창의성이 얼마나 좋아질지는 모르겠습니다. 놀이는 그냥 놀이로 즐겨야 하는 것 아닌지. 젊은 시절 보드 게임 카페에서 밤을 샜던 경험이 좋았다면, 아이와 보드 게임을 그냥 하면 됩니다. 억지로 가르치지 말고요. 사고력 향상 등의 기대 역시 접어둬야죠. 그렇지 않으면, 또 다른 공부 부담일 뿐이죠.

그냥 놀이만 하자니, 어쩐지 성에 안 찬다고요. 그럼 보드 게임을 직접 만들어보면 어떨까요. 아이 또는 친구와 상의하면서 말이죠. 인현왕후 같은 비극의 주인공만 보드 게임 개발자가 되는 건 아니죠. 보드 게임 만들기, 의외로 쉽습니다.

인터넷 검색으로 찾을 수 있는 보드 게임 쇼핑몰이 많은데요. 그런 곳에서 보드 게임 제작 도구를 판매합니다. 빈 종이 카드와 주사위 등을 담은 세트인데요. 직접 콘셉트를 정하고 규칙을 만든 뒤, 카드에 그림을 그려서 보드 게임을 만드는 겁니다. 보드 게임의 DIY(Do It Yourself) 유형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물론 직접 종이를 잘라서 만들어도 되고요.

아이들에게 필요한 건, 어쩌면 수학보다 정치

개발 경험이 없는 사람이 만든 보드 게임이 큰 화제가 되기도 했죠. 최서윤 월간 <잉여> 편집장, '잉집장'이라고 하죠. 하여튼 그가 만든 '수저 게임'입니다. '승경도 놀이'와 마찬가지로, 신분을 정하고 시작합니다. '금수저', 아니면 '흙수저'죠.

'승경도 놀이'가 공직 세계에서 벌어지는 권력 투쟁을 다룬다면, '수저 게임'은 지금의 계급 정치를 반영합니다. 흙수저는 출발 조건이 훨씬 불리하지만, 숫자가 많습니다. 그들은 토론과 투표, 법안 발의 등의 방법으로 '금수저'를 견제합니다.

'수학적 사고력'은 기대하지 않지만, 그래도 놀이 속에서 교육이 이뤄지길 바라는 어른이라면, 차라리 '수저 게임'을 해보면 어떨까요. '금수저', '흙수저' 등 표현이 자극적일 뿐, 내용은 꽤 유익한 정치 교육입니다.

어쩌면 알파고 이후 세대에게 절실한 건, 수학적 사고력이 아니라 좋은 정치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시험과 공부의 나라'에선 사고력과 성실성의 작은 차이가 사회적 지위를 결정하곤 했습니다. 점수 1, 2점이 운명을 정했으니까요. 하지만 지식 활동까지 기계가 담당하게 된다면, 지능이 조금 높거나 낮은 건 사소한 문제일 겁니다. 마치 기계가 육체 노동을 상당 부분 대체한 지금, 대부분의 사람에게 체력의 사소한 차이는 큰 문제가 아닌 것처럼 말이지요. 물론, 수학적 사고력은 어느 시대에나 중요하겠죠. 다만 그걸로 매긴 서열은 중요하지 않아질 거라는말입니다. 지금도 체력은 중요하지만, 체력의 서열은 큰 의미가 없잖아요. 운동선수 등 예외를 뺀 대개의 보통 사람들에게는 그렇습니다.

알파고 등 첨단 기술을 개발하는데 필요한 자본과 지식을 공급하는 극소수와 나머지 다수가 조화롭게 지내는 게 중요한 문제가 되겠죠. 그게 바로 정치입니다. 그리고 좋은 정치는 소수의 영재가 만들 수 없죠. 다수 시민의 정치 의식이 성숙해야 합니다. 게임이 정치교육의 기회가 될 수 있다면, 굳이 멀리할 필요는 없어 보이네요.

그래도 가족과 함께 '수저 게임'을 하긴 거북하다고요. 네, 저도 아이와는 못 할 것 같습니다. '금수저'를 자식 입에 물려줄 수 없는 보통 부모 입장에선, '수저'라는 표현이 영 불편하죠. 그렇다면, 비슷한 콘셉트의 게임을 직접 만들어 봅시다. 물론 표절은 피하면서요.

ⓒ수저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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