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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알파고, '묵찌빠'로 이겨 볼까?

[성현석의 토이 스토리] '아빠 육아'와 '절대 놀이'

'삐익, 긴급!' 부산 고리 핵발전소(원전)에서 사고가 났습니다. 냉각 기능이 고장 나면서, 원자로 출력이 순간적으로 폭주했습니다. 핵연료 파손, 증기 폭발, 노심 파괴, 연쇄 폭발….

부산, 경남 일대는 아수라장입니다. 핵발전소 인근 30킬로미터 안에 있는 사람들은 당장 대피하라는 방송이 나왔습니다. 무려 500만 명이 목숨을 건 탈주를 합니다. 군과 경찰이 투입돼 질서를 잡으려 하지만 역부족입니다.

고리 원전 폭발 사고북한, '서해 5도 점령'

그 와중에 북한이 도발했습니다. '서해 5도 점령' 속보가 지나갑니다. 한국이 불법 점유하던 섬들을 자기네가 되찾겠다는 게 북한 측 주장입니다. 핵발전소 사고로 인한 혼란을 수습하기에도 벅찼던 한국 정부는 어쩔 줄을 모릅니다. 반격을 하자니, 전면전이 벌어질까 두렵습니다. 시민들이 정부의 무력한 대응을 질타합니다. 그제야 정부는 서해 5도 탈환에 나섭니다.

백령도, 대청도, 소청도, 연평도, 우도 등 서해 5도 주변에서 남과 북이 포탄을 주고받던 어느 날, 서울 시내 한 복판에 북한의 미사일이 떨어집니다. 파괴된 건 아파트 한 채뿐이었지만, 시민의 머릿속에선 이미 서울은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입니다. '그 미사일에 핵무기가 장착돼 있으면 어쩔 뻔 했나.' '앞서 날아온 미사일을 못 막았는데, 또 날아올 미사일인들 막을 수 있겠나.' 공포가 버섯구름을 그리며 번져갑니다.

수도권 시민들은 남으로, 남으로 몰립니다. 방사능에 오염된 영남 일대로는 갈 수 없죠. 호남과 충청 일대는 무법천지입니다. 정부 대표가 미국으로 날아갔지만, 끝내 빈손으로 돌아왔습니다. 전면전이 아니므로, 미국이 개입하기가 애매했죠. 자칫하면 중국, 러시아와 충돌할 수도 있는 일이니까요.

더구나 북한은 핵무기를 갖고 있잖아요. 무슨 일이 생길지 모릅니다. 미국, 일본 등은 북한을 격렬히 규탄했지만, 그뿐이었습니다. 군사 행동은 자제했죠. 결국 정부는 서해 5도 탈환을 포기했습니다. 이제 아무도 정부를, 공권력을 신뢰하지 않겠죠. 한반도 남쪽에선 지옥도가 펼쳐졌습니다.

당연히 상상입니다. 소설가 김성종 씨의 연작 단편소설 <달맞이 언덕의 안개> 후반부 내용이죠. 실제로 그가 사는 곳이 부산 해운대 달맞이 언덕입니다.

남의 핵발전소, 북의 핵무기

부산 고리 일대에는 이미 7기의 핵발전소가 가동 중입니다. 단위 면적당 설비 용량이 세계 1위인데요. 여기에 핵발전소 2기를 또 짓기로 했어요. 지난달 23일, 원자력안전위원회는 신고리 5, 6호기 건설 승인 안을 통과시켰죠.

그리고 지난 5일, 울산 앞바다에서 규모 5.0의 지진이 발생했고요. 울산을 포함한 영남 일대에 있는 핵발전소가 20곳입니다.

김성종 씨의 소설을, 안 떠올릴 수가 없었겠죠. 김성종? 맞습니다. <여명의 눈동자>, <제5열> 등을 썼던, 그 김성종입니다. 이들 소설은 드라마로도 만들어졌죠. 고(故) 김종학 PD가 연출을 맡았던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에선 채시라, 최재성, 박상원, 고현정 씨 등이 혼신의 연기를 했습니다. 벌써 24년 전이네요.

한반도 남쪽의 핵발전소, 북쪽의 핵무기가 동시에 우리를 위협하는 상황. 그저 소설 속 설정으로 그쳐야 할 텐데요. 불안한 마음이 안개처럼 번지는 건 어쩔 수 없네요.

'국가'를 선포한 핵잠수함


핵발전소 사고, 핵무기 등이 무서운 건, 그게 지닌 비대칭적 성격 때문입니다. 방어 수단이 없죠. 한번 터지면 끝입니다.

핵무기의 이런 성격은 영화나 만화의 소재로도 종종 쓰였습니다. <침묵의 함대>라는 일본 만화가 있어요. 일본인 장교가 이끄는 핵잠수함 한 척이 독립 국가를 선포하는 내용인데요. 바다 속을 돌아다니는 잠수함 한 척이 영토의 전부이지만, '국가'를 자처할 수 있는 건, 핵무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핵무기 앞에선 모든 나라가 평등하거든요. 아무리 강력한 경제력, 군사력을 갖고 있어도 핵의 위협에 대해선 똑같이 무력합니다. 총 앞에선 무술 유단자도 힘을 못 쓰는 것과 비슷하겠네요.

'덕후' 기질이 다분해 보이는 북한 김 씨 가족이 혹시 <침묵의 함대>를 읽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문득 해봅니다. 아울러 '국가'를 자처하는 수니파 무장 조직 IS는 이 만화를 읽지 않기를 바랍니다.

옛날 전쟁, '절대 무기'는 없었다

병력과 경제력의 차이를 무력화하는 절대 무기. 옛 사람들은 상상도 할 수 없었을 겁니다. 옛날 전쟁은 기본적으로 병력이 승부를 결정짓는 핵심 요소였죠. 그리고 각각의 무기는 장단점이 뚜렷했습니다. 다른 모든 무기를 제압하는 '절대 무기'는 있을 수 없었죠.

1950년 한국 전쟁 이전에 겪었던 가장 큰 전쟁, 바로 1592년 임진왜란이죠. 조선 역사의 결정적인 분기점입니다.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은 감옥에 있던 시절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한탄합니다. 임진왜란 이후에 조선 왕조가 망했어야 한다고요. 당시 조정은 전쟁을 막지 못했고, 전쟁 내내 무책임한 모습을 보였으니까요. 일종의 '정권 교체'가 필요했다는 겁니다. 이후 책으로 출간된 <옥중서신>에 담긴 내용이죠. 하지만 조선 왕조는 전쟁 이후에도 살아남았습니다. 그리고 확실히, 활기를 잃었죠. 전보다 더 교조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김 전 대통령의 지적은 꽤 일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조선 사회가 임진왜란으로부터 아무런 교훈도 못 얻었느냐, 그건 아닙니다. 군사 분야에서 다양한 혁신이 있었죠.

장창→낭선→등패→곤방→장도→당파→장창

정조 시대에 편찬된 <무예도보통지>가 대표적이죠.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군대가 왜군을 상대했던 다양한 노하우를 배웠던 게 영향을 줬습니다. 그럼, 명나라 군대는 어떻게 그런 전술을 익혔을까요. 그들 역시 실전을 통해서였죠. 명나라 역시 왜구의 잦은 침략으로 고생했는데요. 명장 유대유가 잘 막아냅니다. 유대유는 숭산 소림사의 무예 고수 열여덟 명과 한꺼번에 대련했던 일화로도 유명하죠. 소림사 고수들이 펼친 '십팔나한진'을 유대유가 깨부숩니다.

유대유의 뒤를 이어 왜구와 맞섰던 장수가 척계광인데요. 그가 쓴 책이 <기효신서>죠. 긴 칼을 휘두르는 왜구를 상대하는 요령이 잘 녹아 있습니다.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그게 조선에 전수됩니다. 주로 활에 의지하고, 칼이나 창을 쓰는 데는 서툴렀던 조선 무인들의 전술은 혁신의 계기를 맞죠. <무예도보통지>는 그 결과물이고요. <기효신서>와 <무예도보통지>에 모두 소개된 전술 가운데 하나가 '원앙진'인데요.

장창, 낭선, 등패, 곤방, 장도, 당파 등 여섯 가지 무기를 각각 들고 있는 병사들이 조를 짜서 움직이는 겁니다. 보병 전술 혁신의 핵심 사례죠. 장창은 말 그대로 아주 긴 창이고요. 낭선은 가지를 쳐내지 않은 대나무에 쇠붙이를 주렁주렁 단 무기입니다. 등패는 방패, 곤방은 긴 막대기(곤봉), 장도는 긴 칼이죠. 당파는 삼지창입니다. 사극에서 흔히 보는 포졸들이 들고 있는 거죠.

흥미로운 건, 이들 가운데 어떤 것도 절대 무기는 아니라는 겁니다. 장창은 낭선을 이길 수 없습니다. 낭선은 등패를 뚫지 못하고요. 등패는 곤방에겐 집니다. 곤방은 장도에게 패배하고요. 장도는 당파보다 불리하죠. 다시 당파는 장창에게 집니다. 한 바퀴 빙 도는 구조죠.

▲ 원앙진(<무예도보통지>에 실린 형태인데, 여기엔 곤방과 장도를 든 병사가 빠졌다).

누구나 천적이 있다. 핵만 예외

옛 사람들의 세계관이 대체로 이런 식입니다. 오행의 원리와도 닮았죠. '음양오행' 할 때의 그 '오행'입니다. 물(水, 수), 나무(木, 목), 불(火, 화), 흙(土, 토), 쇠(金, 금)이죠. 여기에도 절대 강자는 없습니다. 역시 한 바퀴 빙 돌죠. 나무는 흙을 이깁니다. 흙은 물을 이기고요. 물은 불을 이기죠. 불은 쇠를, 쇠는 나무를 각각 이깁니다.

이런 사례는 무궁무진합니다. 생태계도 비슷하죠. 어느 종에게나 천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균형을 이루죠. 인간은 예외라고요? 글쎄요. 지난해 메르스 사태 잊으셨나요. 인간은 뛰어난 지능 덕분에 자연을 지배한다고 하죠. 하지만 지능이 아예 없는 바이러스 앞에서는 무력합니다.

그런데 핵무기에겐 '천적'이 아예 없습니다. 그러니까 '절대 무기'죠. 우리가 어릴 때 하던 놀이를 떠올려 보면, 이게 얼마나 어색한 개념인지 알 수 있습니다. 놀이의 세계에서 '필승 카드', '만능열쇠'가 있으면 재미가 없죠.

'가위 바위 보', 한 바퀴 빙 도는 구조

누구나 아는, 가장 익숙한 놀이, '가위 바위 보'를 떠올려 보죠. 앞서 소개한 원앙진을 구성하는 여섯 무기, 그리고 오행과 마찬가지입니다. 역시 한 바퀴 빙 도는 구조죠. 가위는 바위에게 지고, 바위는 보에게 집니다. 그리고 보는 가위에게 지죠.

'가위 바위 보'를 하면서, 우리는 세상 이치를 배웁니다. 핵무기를 제외하면, 절대 강자는 없습니다. 아무리 똑똑하고 힘이 센 사람에게도 천적은 있기 마련입니다. 의외로 어수룩하고 약한 사람이 천적이 될 수 있습니다. 잘나간다고 으스대다간 엎어지기 십상이죠.

아, 그러니까 이 글의 결론은 '아이들과 가위 바위 보를 하면서 인생의 교훈도 얻고 탈핵을 실천하자'인 거구나. 아닙니다. 그건 너무 따분하잖아요. 가위 바위 보만 하면, 무슨 재미가 있겠어요. 결론은 이제부터입니다. 여기는 <프레시안>이죠. 기사가 길어요.

행운과 실력을 배합한 놀이

지난 회에서 '잉집장' 최서윤 씨가 개발한 '수저 게임'을 소개했습니다. 게임 개발자들에게 물어봐도, 꽤 잘 만든 게임이라고 합니다. 우선 균형이 잘 맞습니다. 게임을 시작할 때, 흙수저와 금수저 가운데 하나를 택하는데요. 어느 쪽을 택하건 승률이 비슷합니다. 이런 균형이 깨지면 재미가 없죠. 시작할 때 이미 승부가 어느 정도 결정된다면, 게임을 계속하고 싶은 마음이 안 들 테니까요. 그렇다고, 흙수저와 금수저의 역할이 똑같다면, 역시 재미가 없습니다. 흙수저는 흙수저 방식대로, 금수저는 금수저 방식대로 게임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흙수저와 금수저를 택할 때마다 각각 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어요. '수저 게임'은 그래서 뛰어납니다.

'가위 바위 보' 놀이가 부족한 게 이 대목입니다. 확실히 공평합니다. 가위, 바위, 보는 각각 승률이 정확히 3분의 1입니다. 눈을 감고 있어도, 술에 취한 채여도 승률이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지루합니다.

역시 오래된 게임인 바둑과 정반대입니다. 바둑은 철저히 실력에 따라 승부가 정해집니다. 제게 아무리 대단한 행운이 따라도, 저는 이세돌을 이길 수 없죠. 대신, 그게 바둑의 재미를 떨어뜨리는 점입니다. 어느 정도는 결과가 예상되죠.

완벽하게 운에 의지하는 '가위 바위 보', 고도의 전략 능력이 필요한 바둑. 아이들이 쉽게 몰입하는 놀이는 대개 그 중간에 있습니다. 행운과 실력 요소를 적절히 섞는 거죠. 여기에 움직임이 더해지면 더 좋습니다. 예컨대 '가위 바위 보' 놀이를 변용한 '묵찌빠'는 어떤가요. 행운 외에도 순발력 등의 요소가 더 필요하죠. 그러니까 조금 더 재미있습니다. '가위 바위 보, 하나 빼기' 놀이도 있죠. 역시 운이 결정하는 면이 압도적이지만, 약간은 전략적인 요소가 섞였습니다. '가위 바위 보' 가운데 각각 다른 걸 두 손에 골라야 합니다. 실수로 같은 걸 두 손에 고르면 확 불리해지죠. 상대의 실수를 유도할 수 있으면 유리해집니다.

'절대 놀이'의 등장

이 정도만 해도, 아이들과 시간을 보낼 만 합니다. 옛날 사람들은 확실히 그랬을 거예요. 그런데 요즘은 놀이 생태계에 절대 무기가 나타났죠. 바로 스마트폰 게임입니다. 핵무기에 비할 정도는 아니지만, 확실히 다른 놀이들을 무력화합니다. '절대 놀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네요.

여기 한번 빠지면, 다른 놀이에는 흥미를 잃곤 하죠. 스마트폰 등 디지털 기기를 활용한 놀이 문화가 꼭 나쁘냐.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장점과 단점이 모두 있겠지요. 다만 분명한 건, 아이의 시간은 제한돼 있다는 점입니다. 특정 종류의 놀이가 아이의 시간을 독점해 버리면, 다른 놀이를 할 시간이 줄어든다는 거죠. 자칫하면 아이 시기에만 할 수 있는 놀이들을 평생 하지 못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게 좀 걱정스럽습니다. 특히 알파고 이후 세대라면 더 그렇습니다. 정신 노동마저 기계가 담당한다면, 사람과 직접 몸으로 부대낀 경험이 더 중요해질 겁니다. 그건 기계가 대체하기 힘든 영역이니까요.

놀이 운동가 편해문 씨는 온라인 게임에 몹시 비판적인데요. 게임이 지닌 중독성 위험에 대해서도 동의하는 입장이고요. 그가 예전에 <프레시안> 인터뷰에서 한 말이 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정도까지 '놀이밥'을 꼬박꼬박 먹고 자란 아이들은 게임 중독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이런 아이들은 온라인 게임을 해도 적당히 즐기는 선에서 멈춘다는 거죠. 중독 수준으로 몰두하면, 일단 좀이 쑤셔서 못 견딘다는 거예요. 일각에서 걱정하는 '게임 중독'을 막기 위해서라도, 아이에게 '놀이밥'을 충분히 먹여야 할 겁니다. 오프라인 공간에서 다양한 놀이를 해야 한다는 거죠. 여기엔 아빠의 역할도 중요하겠죠.

아빠 육아 시대의 놀이 문화

다행히 요즘 뜨는 트렌드 가운데 하나가 아빠 육아라고 합니다. 아빠 연예인들이 아이 돌보는 모습을 중계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들이 인기를 끈 것도 한몫했겠죠. 반가운 일입니다.

그런데 간혹 불만도 나옵니다. 아빠들이 아이와 많은 시간을 보내는 건 좋은데, 아이와 노는 방식이 주로 게임이라는 거죠.

아빠 입장에선 이해가 가는 일입니다. 우선 본인이 어릴 때 즐겼던 놀이죠. 그걸 아이와 함께하고픈 마음은 당연합니다. 또 고단한 노동에 지친 입장에선 몸으로 하는 놀이가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고요. 돈과 시간을 들여서 멀리 나가는 것 역시 마찬가지죠. 아빠 육아를 중계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들이 살짝 못마땅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방송에선 걸핏하면 멀리 나가죠. 보통 아빠들에겐 힘든 일입니다.

그럼 어쩌죠. 그냥 집안에서 '묵찌빠' 정도를 해보면 어떨까요. 아니면 '가위 바위 보, 하나 빼기'에 가벼운 벌칙을 곁들이는 것도 좋아 보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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